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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그들의 시간을 조립하지 않고 목격한다는 것, <레이의 겨울방학> 박석영 감독

박석영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 <레이의 겨울방학>은 레이(구로사키 기리카)와 규리(정주은)가 겨울방학 동안 맺는 한 계절의 우정에 대한 영화다. 지난해 <샤인>개봉에 이어 올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새 영화를 공개한 것에 대해 감독은 “지난 10년 동안 5편의 영화를 찍으면서 지쳤던 것 같다. 머릿속이 수세미처럼 엉켜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영화가 자초한 당시의 기분을 영화로 풀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감독 스스로가 누렸던 겨울방학에 대한 영화적 기록이기도 하다. 감독은 데뷔작 <들꽃>으로 첫 인연을 맺었던 이성은 촬영감독, <샤인>을 함께한 정주은 배우와 일본으로 향했다. “한때 거리를 같이 뛰어다니며 영화를 찍었던 일본인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 친구의 딸을 만났는데, 단단한 느낌이 드는 친구였다. 이 친구랑 영화를 찍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행동으로 옮긴 것이 영화가 되었다.”

정주은 배우와 함께 일본을 향한 것에 대해서는, “<샤인>을 찍을 때, 주은이의 용감하고 상상력 넘치는 모습을 봤다. 신 안에 들어가 역할을 잘 이해하고 그 인물로서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며 신뢰를 드러냈다. 영화에서 레이와 규리는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한다. 그들의 대화는 어긋난 문법과 조각난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둘은 친구가 된다. 대본에 대해 감독은 “특별히 시나리오라고 할 것이 없었다. 한국에서 온 규리가 레이를 만난다. 그리고 둘은 서로 겨울의 어떤 시간들을 보낸다. 이것이 다였다”며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전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해왔기 때문에 익숙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일본에서의 시간들을 기록했을까. 그는 “나에게 편하지 않는 공간에 가야 편견이 덜한 것 같다. 만약 이 영화를 한국에서 찍었다면 그들의 시간을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찍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영화에서 레이와 규리는 비록 서툴지만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레이가 말하는 ‘왓 두유 원 투 비 인 더 퓨처’와 같은 대사도, 배우가 스스로 찾아낸 언어였다. 아이들의 모습을 어떻게 있는 그대로 찍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었다. 해결 방법은 결국 배우들 안에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어쩌면 우리가 그리워해온 순수한 우정의 장면으로 도약한다. “그들의 시간을 억지로 조립하지 않고, 목격하려 했다. 영화를 찍으면서 세운 원칙이 있다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거다. 어떤 일이 현장에서 일어나면, 웃긴 얘기지만 영화의 신이 우리에게 준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인간에 대한 신뢰라기보다, 영화에 대한 신뢰에 가까운 것이다.”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 여정에 대해서는 “사람을 계속 더 좋아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끌어안는 일이다. 그래야만 찍을 수 있다”며 방학을 끝내고 돌아온 감독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