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라즐로는 사업가 해리슨에게 이렇게 말한다. “건축이란, 폭우와 홍수로 다뉴브강이 범람해 도시 전체가 잠겨도 내 건물만은 남아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세상이 흔들려도 본질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들린다. 건축물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시대와 인간을 담아내는 증거물이자 왜곡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뉴브강은 부다페스트에 있고 라즐로는 헝가리 출신의 건축가다. 헝가리는 독일 나치에 점령당한 상태며 유대인 라즐로와 그의 가족은 각각 다른 수용소에 갇혔다가 이민선을 타고 미국으로 이주한다. 건축가로는 불멸이나 영속을 의미하지만 유대인으로는 기록이자 증언이 된다.
아내의 편지와 파편적인 장면 연출로 이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미국에 왔는지 압축해 보여주고 있으나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불충분하다. 홀로코스트와 수용소, 유대인이 등장하는 순간 영화엔 강력한 지반이 형성된다. 이후로 전개될 서사는 이 지반을 벗어나기 어려우며 등장인물이 쌓아가는 고난 극복 과정은 이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다. 이를 벗어난다면 그들의 배경 서사는 군더더기로 인식되거나 손쉽게 아픈 역사를 가져다 썼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브래디 코베 감독은 왜 이 지반을 영화에 충분히 활용하지 않았을까. 유대인 건축가의 이민사에 러닝타임을 할애해 명료하게 보여주었다면 관객은 라즐로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측하느라 서사에서 멀어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브루탈리즘에 기반한 영화이기에 폐쇄적인 서막이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
브루탈리즘의 기본은 노출이다. 정직함이며 외부와 내부의 동일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핵심적인 장면을 감춘다. 밴 뷰런 인스티튜트의 건물모형에 손전등을 올릴 때 빛의 십자가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결말에서 느껴야 할 충격과 감동을 미리보기로 반감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달빛으로 구현되는 십자가의 실물이 기대만큼 압도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건축가의 의도가 응축된 아름다운 결과물인 건 분명하지만 빛의 십자가가 구현되는 순간에 관객의 시선은 해리슨의 시신을 찾는 데 동원돼야 했다. 달빛 십자가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 작품을 감상할 시간도 충분히 주지 않는다. 이 결정적인 장면에 시간을 아낀다면 긴긴 러닝타임은 어디에 쓰기 위한 것인가. 관객이 달빛 십자가를 온전히 대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음향도 자막도 없이, 어둠과 정적 속에 관객과 십자가만 남겨두었다면 라즐로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높은 해상도로 들여다보였을지 모른다. 이탈리아산 대리석 위로 시신이 떨어질 것만 같은 다급한 상황 속에 십자가를 노출한 것은 권력의 죽음과 고통으로 건설한 아름다움이 충돌하는 결과를 낳는다. 모형 십자가를 과감히 보여주고 실물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실감할 기회를 주었다면, 건축예술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차이를 느끼게 배려했다면 라즐로의 천재성이 돋보이고 건축가의 삶에 입체감이 부여됐을 것이다. 빛의 십자가를 희생하면서도 해리슨의 시신은 끝까지 보여주지 않아 노출과 감춤의 대칭적 균형도 깨져버린다.
해리슨이 목숨을 끊은 이유는 수치심 때문이다. 약물과 술에 취한 라즐로를 성폭행한 사실이 사람들 앞에서 폭로돼서다. 이때 성폭력을 가하는 장면이 직설적으로 노출된다. 인간의 이중성과 권력의 폭력성을 각인시키고 재력에 쉽게 매료되는 관객을 각성시키려는 의도는 전달되었으나 난데없는 장면 앞에 관객은 사고의 끈을 놓친다. 영화 후반까지 일관되게 쌓아온 권력자로서의 견고한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화되며 두 사람이 힘겹게 건축해온 서사가 허무하게 무너진다.
권력자가 예술가를 비하하고 파괴하는 서사는 영화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감추는 기법을 사용해도 관객은 알아서 능숙하게 전달받는다는 얘기다. 노출하는 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했거나, 감추는 노선을 통일성 있게 선택했다면 관객은 혼란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노출할 곳은 감추고 감출 곳은 노출한다. 노출과 감춤의 어긋남은 강력한 역사적 지반과 거대한 규모의 영화적 기반을 소심하게 운용한다는 인상을 남긴다.
웅장한 외형의 건축물이 영화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으나 그만큼의 무게와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 돈과 권력이라는 외력에 라즐로는 얼마만큼의 내력으로 저항하며 떠받치고 있는가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버드나무를 연상케 하는 라즐로의 이미지는 부드럽고 유약해 보이나 끝까지 견뎌주리라는 심리적 지지를 보내도록 만드는데 그러한 관객의 믿음과 달리 라즐로는 삶과 예술이 가하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위태로운 모습으로 일관한다. 라즐로의 휘청거림은 시대와 역사의 외력 때문이라기보다 개인의 내력이 약해서라는 심증을 갖게 한다. 그가 세운 건축물이 기대만큼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건 외력에 반하는 동질의 내력이 느껴지지 않아서다. 시대의 아픔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강력한 장치로 활용하지 못했고 천재성과 예술성으로 덮어지지 않는 윤리적, 심리적 방황은 허약한 개인의 고단한 역사로 축소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관객을 머물게 하는 건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가 있어서다. 배우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 하나뿐인 영혼을 라즐로에 바칠 결심을 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를 지켜보는 동안 라즐로를 넘어 애드리언 브로디의 본체가 손상되는 건 아닌지 염려되었다. 그는 라즐로와 애드리언 브로디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지우기도 하면서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세계를 건축했다. 또 하나는 음악이다. 브루탈리즘 건축물을 소리로 만든다면 이와 같지 않을까. 콘크리트 건축물을 맨손으로 만지는 감촉. 브라스와 타악기로 차갑고 묵직하게, 아름답고 믿음직하게 브루탈리즘의 세계를 구현했다. 마지막으로 이 한 장면. 빛을 활용해 새로 꾸민 해리슨의 서재. 건축물의 성패는 건축가가 아니라 하늘이 결정한다는 겸손함과 대범함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무엇보다, 해리슨의 서재는 직관적으로 아름답다. 건축에 아는 바 없어도 그 자체로 감동할 수 있으며 라즐로에 신뢰가 생기는 시작점이 된다. 배우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와 영화음악, 해리슨의 아름다운 서재가 아니었다면 영화는 범람한 다뉴브강에 떠내려갔을지도 모른다. 달빛이 십자가를 만들었듯, 균형 잃은 거대한 몸집의 영화를 달빛 같은 요소들이 추어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