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드>는 감시의 붉은빛이 반짝이는 도시 풍경에서 클럽 앞에 선 다섯 친구에게로 시야를 좁힌다. 일련의 사건 후 웃으며 달리는 그들의 상이 일시정지되고 음악이 흐른다. 근미래를 과거의 추억처럼 포착함으로써 영화가 하려는 것은 무얼까. 실제의 것은 생략한 채 정치사회적 이슈를 모호하게 극화해, 향수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일종의 스타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허나 영화가 전하려는 바는 메시지보단 감각에, 재현함/재현하지 않음 자체 보단 그것이 위치하는 맥락에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미래를 과거처럼 찍는 것을 시제를 뒤섞는 행위로, ‘예고된 일이 이미 일어난 적 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음’을 감각하라는 권유로 읽어 보면 어떨까. 생략해버린 것처럼 보이는 공간은 의도된 여백, 영화가 관객에게 상상을 요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슈가 글라스 보틀>(2022)에서도 네오 소라는 사람이 사라진 곳을 보여주며 외화면으로 주의를 돌린 바 있었으니.
영화가 이주민 위협 망상에 빠진 국가의 통제를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연도나 시대 배경을 명시하지 않은 채 그 작동 원리를 은유하는 데 집중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퇴학당한 유타가 엄마와 귀가하는 낮의 장면은 모자의 대화만으로 끝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위에 나가 보호자 소환 처분을 받은 코우가 엄마 후쿠코와 귀가하는 밤의 장면은 다른 상황으로 이어진 바 있었다. 모자가 어둠 속에서 언쟁하던 도중 맞은편에서 전등을 든 자율방범대가 다가온다. ‘순수한 국민의 형상’을 독점한 이들은 빛으로 무장하고 타자에게 “비국민”의 그림자를 드리울 자격 또한 독점한다. 자위대원 특강을 듣지 말 것을 명령받은 이주민 n세 학생들이 복도로 나가자 인공지능 감시카메라 “판옵티”는 추방을 이탈로 판정해 벌점을 매긴다. 시스템의 허점을 드러내는 오판은 안전을 명분으로 하는 자동화된 감시가 결국 무엇에 복무하는가를 상징적으로 폭로한다. 유타와 코우가 “테러”를 행하기 이전, 교장과 “판옵티” 회사 관계자가 밤늦게 학교에 머물러 있었음을 떠올려보자. 위협(이라고 말해지는 것)과 통제/감시의 인과는 애초에 거꾸로일지 모른다.
그러한 폭로는 인물들의 심리와 관계 변화 묘사에 얽혀 있다. 후쿠코의 가게 출입구 커튼에 적힌 “비국민” 낙서를 본 날, 서브우퍼를 옮기다 재일조선인이기 ‘때문에’ 단속당한 이튿날, 코우는 말없이 다리를 떤다. 공포나 분노에 질려 떠는 듯한, 그것은 버릇이 아닌 이상징후다. 후쿠코가 든 행주와 커튼이 마찰되는 소리를 다리를 떠는 소리와 잇는 편집은, 달라붙은 낙인의 영향이 피부 안쪽으로 침투해 마음과 몸의 진동을 유발함을 보여준다. 코우의 흔들림은 주변으로 번진다. 그가 유타에게 분노를 터트리자 우정의 지진은 그림자의 휘청임으로 은유된다. 코우가 자리를 뜬 다음의 암전을 ‘화면이 숨을 죽인다’고 적어도 될까. <해피엔드>에서 숨죽이는 감각은 지진과 연결된다. 지진 경보가 울리면 사람들은 숨을 죽인다. 실제 지진은 사운드 없이 묘사된다. 차별당하며 숨죽이는 감각은 코우를 뒤흔들고 저항하게도 하나, 행동에 대한 대가가 동일하지 않다는 데에서 오는 공포는 다시 숨을 죽이게도 한다. 후미가 항의를 조직하고 유타가 마이크를 잡는 동안 망설이거나 침묵하는 코우에게 성급한 꼬리표를 붙여선 안 되는 이유다.
허면 영화는 왜 암전중 시위대의 목소리만을 들려주고는 악기숍에서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는 유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나. 왜 코우의 저항을 부각하는 대신 유타가 마이크를 잡게 했나. 교장이 감시카메라 시스템 재논의에 대한 대가로 차를 세운 자의 자백을 요구한 다음, 반응하는 학생들의 숏 사이엔 코우와 유타가 상대를 응시하는 숏들이 섞여 있다. 유타는 자리를 뜨며 코우의 시야를 벗어났다가 연단에 서며 코우를 마주 본다. 줄곧 어긋나던 시선은 이때 만난다. 유타가 코우에게 전하고 있는 것은 스피커로 증폭되는 언어가 아니다. 이는 일종의 희생이나 이별 선언보단 연결의 시도에 가깝다. 영화가 이후 유타를 놓아주고 코우를 조명하는 까닭은 그것이 닿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렇다고 영화가 벌어진 사건 모두를 ‘친구사이’로 수렴시키며 유타를 우정의 구원자로 만들려 하는 건 아니다. 그보단 관계의 재인식이 변화로 이어지는 순간을 그리고자 한 것이라고 본다.
유타가 내일에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오늘을 위협받는 일이 적어서이기도 했을 테다. 그는 즐거움을 위한 불복종에 능했다. 클럽에 경찰이 들이닥쳐도 리듬을 탔고, 교장의 자가용을 세우기를 제안했고, 동아리방이 폐쇄되자 음악 장비를 훔쳤다. 악기숍에서 면접을 보던 유타에게로 돌아가보면, 그는 자동문에 부딪힌 시위 참여자가 기동대에게 폭력적으로 연행당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때 유타에게 시위는 약속시간에 늦은 사유일 따름이었다. 저절로 닫히는 문은 그를 ‘우리’에 포함시키며 ‘저들’과 분리했다. 코우가 경찰과 귀가한 후 홀로 서브우퍼를 끌고 클럽에 도착한 유타는, 임시 차단벽에 붙은 내진설계 빌딩 홍보 현수막과 추방된 음악 장비들을 발견한다. 이는 정확히 ‘안전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공간’이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통제가능한 공간’으로 대체되는 예다. 영화는 개인적 일탈로서 불복종을 하던 유타가 코앞에서 닫힌 자동문을 맞닥뜨리는 찰나를 포착하기 위해, 코우가 아닌 유타를 따라간 것이 아닐까. 코우가 다리를 떠는 모습에는 그것을 지켜보는 유타의 모습이 뒤따랐음을 떠올려보자. 유타는 ‘너의 오늘이 위협받고 있다면 내 즐거움도 곧 위협받게 된다’는 것을 깨달으며 코우가 겪는 지진을 조금은 알게 됐을지 모른다. ‘우린 같다’도 ‘너와 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도 아닌 ‘너와 나는 다르고 우리가 처한 상황도 다르지만, 우린 엮일 수밖에 없어’라는, 관계의 재인식.
교장의 명령에 형식적으로 복종하는 유타의 발화, “장난”이라는 고백은 본인의 의도를 넘어서 “테러” 프레임을 무력화한다. 여기서 영화가 놀이를 공들여 담는 숨은 까닭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먼저 더빙 놀이를 살펴본다. 내용을 모르고 희극으로 상상한다는 점은 같으나, 때와 장소에 따라 역할은 달라진다. 다섯 친구가 서로의 대화를 더빙하는 행위는 실제 대화를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 영역에 보존한다. 반면 밍과 아타가 유타와 교장의 대화를 더빙하는 행위는 통제를 피해가는 놀이다. 장난이 “테러”로 둔갑한 상황에 다시 장난을 덧씌우기, 영화는 이러한 놀이/예술의 힘을 긍정한다. 벌점을 받자 불복종 퍼포먼스를 펼쳤던 아타는 졸업식에서도 디자인예술로 권력자를 조롱한다. 밍은 그 광경과 번지는 환호성을 촬영한다. 유타가 구슬픈 멜로디를 연주하자 ‘즐거운 걸 연주하라’던 악기숍 사장이 전자 음악을 믹싱하는 씬, 세 직원이 리듬을 타는 모습에 뒤따르는 것은 가게 전체를 담는 숏이다. 음악의 파동을 감지한 손님들이 고개를 돌리고 있다. 물론 앞 사례들은 즐거움의 추구일 뿐이다. 허나 지진의 진동처럼 그 파동은 주위로 번진다. 놀이와 음악, 예술이 늘 그 자체로 변화의 열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타자들을 연결해 무언갈 일으키는 매개가 될 수 있음을 영화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교장실을 점거한 학생들이 지쳐갈 무렵 코우가 김밥과 함께 들고 온 것은 노래다. 후미를 따라간 모임에서 배운 노래를 코우가 부르고, 후미가 따라 부른다. 그것이 힘이 되는 까닭은 60년대 금지곡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공유하는 곡이어서다. 음악이 그렇듯 변화, 관계는 일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인물들은 분리-집단화되거나 개인화되지 않고 엮이며 움직인다. 엔딩에서 톰, 아타와 밍은 차례로 화면을 나간다. 자리를 뜨려던 유타가 몸을 휙 돌려 코우에게 특유의 장난을 치는 순간 영화는 두 번째로 정지한다. 그대로 끝나는가 싶더니 다시 재생되고, 코우와 유타가 차례로 화면을 나간다. “해피엔드”는 없다. 도달에 실패했다는 의미가 아닌, 미정이며 타이틀 아트가 보여주듯 구획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다.
<해피엔드>는 근미래 사회를 구체적으로 그리기보단 그 통제의 작동 원리를 은유해 동시대와 겹쳐보게 하고, 거기 민감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의 진동이 번지는 과정을 살핀다. 전통적인 운동movement의 재현을 반복하기보단 놀이를 묘사하는 데 비중을 할애하고, 그 즐거움만을 추구하던 행위 주체가 너와 나, 오늘과 내일의 상호관계성을 인식할 때 발생하는 가능성을 그린다. 더 나아가 영화가 전한 상호관계의 감각이 어떤 파동을 낳기를 기대한다. 영화는 창작자의 의도를 벗어나곤 한다. 그러니 감독이 이 영화가 팔레스타인과 연대한다고 믿는대도 관객은 (영화를) 추억 사진첩이나 테크노 레코드로 보관해두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한 소비를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허나 이들의 앞날을 상상하며 화면에서 (나간 것이 아닌)사라지거나 생략된 것들 또한 상상해 보기를 제안한다. 코우, 후미와 집회에 나갔던 담임교사는 어떻게 됐을까, 서브우퍼를 옮기다 경찰과 집에 간 코우는 무슨 일을 겪었을까, 이런 성질의 사건은 영화 밖에서 어떤 형태로 일어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