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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당선자 김연우 이론비평] 퀴어한 상상의 힘,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2023)와 <빛나는 TV를 보았다>(2024)를 중심으로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

한국퀴어영화제가 상영할 공간으로부터 대관 취소를 통보받았다는 기사(“개막 앞둔 ‘퀴어 영화제’, 대관 취소 일방 통보…뒤에는 ”동성애 반대“ 악성 민원”, 배시은/백민정, 2025.05.02. 경향신문) 를 보았다. 상영 반대 서명을 주도한 측의 주장을 살피면, “(퀴어영화제가) ~~정신에 반하기에”, “동성애 홍보장이 되지 못하게(막아달라)” 등의 문구들이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퀴어에도 영화에도 사실 별로 관심이 없다. 이들이 반대하는 대상은 ‘어린 학생들과 청소년을 위협하는, 선택지로서의 동성애’라는 전략적 허구에 가깝다. 그 환상 안에서 “어린 학생들”, “청소년”은 퀴어가 ‘전염’시키기 전엔 순수한 이성애자일 것이라고 전제되며, 퀴어 유스youth는 차별됨과 동시에 비가시화된다. 그러니 이루어져야 할 것은 ‘퀴어영화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설득보단 허구적 이미지의 해체다. 역으로 그 해체에 기여해 온 것이 퀴어영화이기도 하지만, 퀴어가 등장하는 일부 영화들은 왜곡된 상을 더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본다, ‘퀴어영화란 과연 무엇인가?’ 퀴어인 인물이 등장하면 퀴어영화인가, 아니면 퀴어인 인물이 올바른 방식으로 재현되는 영화인가. 허면 올바른 재현은 무엇인가, 벡델 테스트처럼 최소한의 기준을 정해야 할까.(농담이다.) 답하기 위해 특정한 작품들을 계보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고, 퀴어영화로 불리는 최근의 작품을 몇 추려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세부질문들이 생겨날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트랜스혐오적인 면이 있는 <록키 호러 픽쳐 쇼>(1975)는 왜 퀴어 컬트 클래식으로 사랑받고 있는가? <티탄>(2021)과 <크래쉬>(1996)는 퀴어영화인가? 만약 그렇다면 ‘동성 간 성관계 묘사’나 ‘여성 주인공의 남성성 수행’(<티탄>) 만으로 설명되는가, 등. 이쯤에서 ‘퀴어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우문에 대한, 현답은 아니어도 하나의 답을 적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물음에 정답은 없을 테다. 그러나 우리는 답을 고민하며 ‘어떤 영화가 퀴어영화인가’를 물을 것이고, 떠올린 영화들이 ‘어떻게 퀴어한가’를 그려보게 될 것이다.

영화의 퀴어함을 해석/재해석하는 일은 중요하다. 가령 2025년의 누군가는 <악마의 키스>(1983)의 미리엄이나 <뱀파이어의 인터뷰>(1994)의 레스타트를 곧이곧대로 현실화해 저들이야말로 ‘자연스럽고 마땅한’ 이성애를 위협하는 실제의 퀴어라고 왜곡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든 퀴어와 퀴어영화를 기꺼이 오해할 의지를 품은 관점에 반박하려 힘쓰기보단, 영화에 반영된 사회적 욕망, 공포, 혐오를 읽어내며 이 작품들이 ‘어떻게 퀴어한가’ 혹은 ‘동시대에 어떻게 퀴어하게 와닿을 수 있는가’를 분석하는 방향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를 뒤집어 이야기하면,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미지의 퀴어/동성애자’에 관한 믿음은 동성을 유혹해 감염시키는 판타지 호러 속 뱀파이어가 현실에 실재한다는 망상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담론 속에서 퀴어는 ‘여기 있다’고 언어나 몸으로 발화하기 전에는 없는 것으로 가정되고, 발화 후에는 예외적이거나 심지어는 꾸며낸, ‘본래의 인간’과 동떨어져 있으며 전염성을 지닌 존재로 왜곡되곤 한다. 퀴어를 유령화, 픽션화하는 서사의 상상력은 오히려 상상력의 결여에서 비롯하는 면이 있다. 가능하다고 이야기되지 않았던 삶들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신화myth를 덮어씌워 지우는 행위. 비단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과거 어느때보다 퀴어가 가시화된 동시에 글로벌한 극우 포퓰리즘이 부상한 현재다. 퀴어를 겨냥한 거짓 서사는 꾸준하게 또 조직적으로 생산/재생산되고 있으며, 때론 국가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영국에서는 펜데믹 동안 퀴어 대상 혐오범죄가 급격히 증가했고, 올해는 대법원에서 ‘여성’을 생물학적 성별로 정의하는 사건이 있었다. 미국의 경우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를 겨냥한 신화 만들기에 힘써 온 조직적 혐오 세력의 움직임이, 최근 몇 년간 다수 법안 발의와 통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장소들에서 각각 재작년과 작년 나온 두 영화가 있다. 야마다 타이치의 유령 이야기를 각색한 앤드류 헤이의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와 <우리는 모두 월드 페어로 간다>에 이어 독특한 오리지널 호러를 내놓은 제인 쇼언브런의 <빛나는 TV를 보았다>로, 오픈리 퀴어인 감독들의 경험이 반영된 작품들이다. 퀴어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려 하는, 두 영화의 방식에서 흥미로운 유사성을 발견했다. 나는 이 작품들이 ‘어떻게 퀴어한가’를 풀어 보려고 한다. 퀴어queer는 형용사에서 출발한 말임을 떠올린다. 오랫동안 멸칭으로 쓰이며 굳어진 것을 성적 소수자들이 자긍심의 언어로 재의미화했고, 지금은 맥락에 따라 퀴어, 퀴어한, 퀴어링하다 등 다양하게 쓰이는 표현이다. 대개는 (이성애)규범에 맞게 ‘보통/정상normal인 것’으로 구획된 수행틀을 넘나들거나 벗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수행을 달리 하기 위해선 상상력이 필요하다. 뒤에서 더 설명하겠으나 우선 적어두면, 두 영화는 영화여서 가능한 상상력으로 위안을 준다. 동시에 초현실과 그 모호성을 통해 현실에서 가려지곤 하는 영역을 상상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퀴어하다.

두 작품에는 바탕과 줄기부터 초현실이 자리한다. 스티브 로즈가 2017년 가디언즈지 기사(“How post-horror movies are taking over cinema”)에서 범주화한 ‘포스트-호러’ 로 분류될 만한 이 영화들은,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거나 벌벌 떨게 하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보단 초현실을 현실로 보여주고 현실을 비현실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집중한다.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의 초현실은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굵직한 서사는 원작 <이방인들과 보낸 여름異人たちとの夏>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년의 각본가가 고향에 방문해 오래전 사고로 죽은 부모와 재회하고, 낯선 이웃과 로맨틱한 관계를 맺는데 그마저 실은 죽은 자였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두드러지는 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초현실인 사건을 현실처럼 다룬다. 애덤이 재방문하는 부모의 집은 앤드류 헤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며, 현대에 소환된 8-90년대 히트송들은 대개 화면 속 턴테이블, 케이블 TV, 클럽 스피커에서 시작된다. 죽은 부모와의 첫 재회 씬에 있는 것은 서스펜스나 쇼크보다는 신비로운 분위기와 향수다. 원작 속 하라다와 그 부친의 조우는 우연하고 놀랍지만 애덤과 그 부친의 조우는 꼭 예고된 수순처럼 보인다. 원작에서 적의를 품은 유령 여인 케이와 하라다가 이별하는 챕터는 주로 긴장과 공포를 유발한다. 반면 해리의 시신을 발견한 애덤은 크게 놀라거나 패닉하지 않은 채 해리의 영혼을 보듬는다. 이 반전의 충격은 두려움보단 슬픔에 닿아 있다.

그런가하면 영화 전체를 초현실이 지배하는 <빛나는 TV를 보았다>는, 현실이라고 이야기되는 세계를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에 집중한다. 오언은 어려서 좋아했던 TV쇼 <핑크 오페이크>와 그것을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해 주곤 했던 친구 매디를 중심으로 과거를 회상하는데, 현실과 TV쇼는 뒤섞이거나 뒤집히는 듯 보인다. 공간들은 그 상징성을 하나하나 읽어내지 않는 편이 나을, 오묘한 색과 모양을 지닌 소품들로 구성돼 있다. 분리된 숏들이 포개지고 서로 다른 씬들이 연결되며 ‘TV쇼’와 ‘현실’의 화질이 뒤바뀌기도 한다. 제인 쇼언브런은 90년대 미국의 교외를 투영한 마을을 창조했고, 뮤지션들에게 “영화 안 우주에 존재하는”(-제인 쇼언브런) 사운드트랙을 의뢰했다. 이 트랙들은 자주 오언의 심리를 은유한다. 8-90년대 대중문화 아이콘이 영화 안에 재배치되기도 한다. TV쇼의 제목은 콕토 트윈스의 1986년 컴필레이션 앨범 “The Pink Opaque”에서 따왔으며, 오언의 아빠는 림프 비즈킷의 리드 보컬 프레드 더스트가 연기한다. 이러한 연출 선택들은 두 작품이 인물을 통해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에선 화면에 펼쳐지는 일들이 현존함을 관객이 믿는 것, 유령화된 몸에 실물의 형체를 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빛나는 TV를 보았다>는 몸이 두 세계에 걸쳐 있는 듯한 비현실적 느낌, 으레 그렇다고 믿어온 것이 유일한 진실이 아닐 가능성에 관한 감각을 전하고자 한다.

정확히 그것을 짚는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더라도, 두 영화가 화면 위로 불러오는 초현실적 설정들은 퀴어를 뒤덮는 신화적 담론들을 떠오르게 한다. 허나 이 영화들은 그것에 맞서거나 그리하여 (이를테면)‘퀴어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방향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초현실로 형상화되는 것은 그보단, 그러한 담론의 영향을 받은 퀴어가 겪는 상태와 감정, 특히 이야기되지 않는 공포와 상실감이다.

<빛나는 TV를 보았다>: 퀴어 불편함과 젠더 디스포리아, 질식 ‘바디 호러’

표면적으로 <빛나는 TV를 보았다>는, 숲 속에서 모닥불을 피워놓은 오언의 씬을 현재로 두고 그가 회상하는 과거의 연대기를 재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장소는 마을 하나로 한정돼 있고 시간은 엉킨다. 컷들이 페이드 인/아웃으로 겹치는 디졸브는 수없이 사용되고 음악은 서로 다른 과거의 날, 또는 현재와 과거를 한 씬으로 잇는다. 회상 속 오언은 자주 카메라를 응시하며 내레이팅한다. 일단 영화가 화면에 재현하는 바가 실제 과거보단 오언의 주관적 회상에 가깝다는 점으로 이 혼돈을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언뜻 <빛나는 TV를 보았다>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TV쇼라는 대체물, 픽션에서 찾아 헤매며 결국 그것에 잡아먹히는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오언은 통제 성향이 강한 아버지와 아픈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했고, 친구는 십 대에 실종된 매디 외엔 없었다. 그는 무의식 중에 ‘잃어버렸다’고 느끼던 어린 시절을, 추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TV쇼 <핑크 오페이크>에 투영했다. 주인공 이사벨과 자신을 동일시해 현실 감각에 혼란을 느낀다. 매디의 경우 내면화한 타라가 자아를 대체해 결국 환상을 구체적으로 믿게 된다. 어린 시절이 떠나갔음을 인정하지 않고 TV쇼를 반복해 시청하기에 오언의 우울증은 지속된다. 그러나 앞에 밑줄로 구분한 프로이트 기반 해석은 충분치 못하다. <빛나는 TV를 보았다>의 재구성된 과거 속에서는 시간뿐 아니라 ‘현실 세계’와 <핑크 오페이크>의 세계 또한 뒤섞인다. 영화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텅 빈 교외의 밤거리다. 배경 설정숏이어야 하지만 실은 그 배경을 서서히 해체하는 숏이다. 아스팔트에는 분홍색 분필로 그린 낙서가 가득하고, <핑크 오페이크>에 나오는 아이스크림 트럭이 서 있다. 이 숏은 후에 몇 차례 변주되어 재등장하며 그 배경, 즉 영화 속 현실(교외 마을)이 환상이거나 조작임을 의심케 한다. 이에 더해, 회상하는 주체로 추측했던 모닥불 앞 오언마저 불을 끄고 자리를 뜨며 카메라와 눈을 맞추고 내레이팅한다.

실종됐다 수 년 만에 돌아온 매디가 <핑크 오페이크>를 언급하자 오언은 이사벨의 “매직 드레스”를 입은 과거 자신의 모습을 연상한다. 그런 오언과 그를 바라보는 매디의 회상 숏-리버스 숏은 현재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숏-리버스 숏으로 연결된다. 현재의 매디가 당시의 오언을 바라본다는, 즉 오언에게서 이사벨을 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너는 이사벨, 나는 타라이며 이 현실은 조작된 것’이라는, 매디의 주장을 듣는 오언의 기억 속에서 타라와 이사벨의 상은 매디와 오언의 상으로 이어진다. 이전에도 영화는 오언의 단독 숏을 이사벨의 단독 숏-TV 스크린의 노이즈 섞인 화질이 아닌 선명한 화질의 숏-과 포갠 바 있었다. 하지만 매디가 말하는 ‘핑크 오페이크’(TV쇼만을 일컫는 <핑크 오페이크>와의 구분을 위해 기울임꼴로 적겠다.)가 실재한다는 물리적 증거를 두 사람이 함께 목격하는 장면은 없다. 오언이 사는 ‘현실’ 세계와 TV가 뒤섞이는 묘사들은 오언과 관객만이 보는 것이므로 환각일 따름이라고 해석할 여지도 없지는 않다. 오언과 매디가 공유하는 것은 감각과 기억이다. 앞서 <빛나는 TV를 보았다>가 공들여 드리우는 것은 ‘으레 그렇다고 믿어온 것이 유일한 진실이 아닐 가능성에 관한 감각’이라고 적었다. 매디의 말대로 진짜를 구별해내는 근거는 오언 자신이 ‘알고 있는 감각’에 있다고 영화는 말하려는 것일지 모른다. 허면 나이든 오언이 신형 TV로 스트리밍하는 <핑크 오페이크>가 기억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TV쇼 주인공과의 동일시가 그들로 하여금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끼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괴리감 또는 위화감이 핑크 오페이크를 발견하게 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여기서 유효해지는 것은 핑크 오페이크가 물리적으로 실재하는가를 판별하는 일 혹은 그것의 정체나 정의를 밝히는 일 보다는, ‘왜 매디와 오언이 핑크 오페이크일 수도 있는가’, ‘핑크 오페이크를 통해 영화는 어떤 감정을 형상화하고 있는가’라는 물음들을 던지는 행위가 아닐까.

오언과 매디가 <핑크 오페이크>를 계기로 친구가 된 “1996년”으로 돌아가 보자. 오언이 매디가 좋아하는 쇼를 보기 시작하는 순서지만, 오언은 매디를 만나기 이전부터 광고를 보고 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알고 있던 핑크 오페이크를 공유한다. 그들이 운동장 벤치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관객은 여성인 매디가 “여자애들을 좋아한다”는 것과, 오언이 섹슈얼리티와 관련해 스스로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매디가 학교에서 당한 모함이나 후에 오언이 직장 동료에게 당하는 놀림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대화는 영화가 관객에게 알려주는 것보단 매디와 오언이 서로에게 들려주는 것으로서 더 의미가 있다. 이들이 유대하며 구체화된 핑크 오페이크는, 젠더 디스포리아gender dysphoria를 비롯한 “퀴어 불편함”과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퀴어 불편함’에 관해서는 사라 아메드의 <감정의 문화정치>(시우 옮김, 오월의 봄 2023 번역본) 318~333쪽 참고. 이는 “퀴어 몸이 규범적인 공간에 ‘맞지 않아서’ 발생하는 효과”로, “불편함은 단순히 선택이나 결정의 문제(”나는 어떤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거나 ‘확장하지’ 않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몸이 경험하는 느낌”이라고 아메드는 설명한다. ] 즉 오언의 경우 태어났을 때 남성으로 지정되었으나 스스로 여성인 이사벨일 수도 있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 매디가 오언의 뒷목에 이사벨과 타라의 상징인 타투 문양을 그린 날 밤, 오언은 허공에서 TV 스크린을 닮은 노이즈를 발견한다. 다음날 오언은 패닉해 매디로부터 도망친다. 그는 이성애 규범적 세계에서 떨어져나간 몸을 낯설게 인식하고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매디와의 유대가 오언이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 유대가 ‘아빠가 취침 시간과 시청할 프로그램을 정하는 세계’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더욱 선명히 자각하는 일을 돕는다는 뜻이다. 오언은 문양을 벅벅 문질러 지웠으나 그 흔적은 피부에 남는다.

이어 적으면 오언의 우울은 어린 시절을 <핑크 오페이크>에 투영해 ‘내면화’하는 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 세계에 딱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서, 그리고 다른 삶을 배제하고 몸을 정해진 틀에 끼워맞추려 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상실감에서 이사벨과의 동일시가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언이 이사벨로 살 수도 있다는 점이’ 상실감의 원인과 관련이 있다. ‘마음이 텅 빈, 나 자신과 동떨어진’, ‘심장을 빼앗기고 파묻혀 서서히 질식하고 있는’: 구체적으로 서술되는 오언/이사벨과 매디/타라의 상태는, 퀴어 불편함 특히 젠더 디스포리아, 그와 연결된 멜랑콜리아에 관한 은유로도 읽힌다. ‘내가 나임을 잊게 만든 후 자정의 왕국이라 불리는 감옥에 가두는’, 핑크 오페이크 속 악당 “미스터 멜랑콜리”는 일단 우울증의 형상화라고 적어볼 수 있다. 허나 우리가 그 영향력 내에 있음을 인식하지조차 못하는, 이성애 규범의 (가상의) 신이라는 해석을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매디가 스스로를 생매장하고 되살아난 경험을 자세하게 털어놓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퀴어 불편함과 디스포리아는 “생각하지 않으면, 진짜가 아니게 되는”(-오언) 내면만의 문제가 아니며, 손바닥 뒤집듯 외면을 선택해 ‘전환’함으로써 ‘해결된다/끝난다’는 식으로 말해서도 안 된다. 이사벨은 유일한 원본이 아니고 핑크 오페이크의 세계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러나 이사벨을 픽션의 산물로 규정하는 세계 안에서 오언은 숨쉬기 어렵다. “20년 후”, 흡입기에 의지해 호흡하던 오언은 일하던 도중 별안간 패닉해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절규한다. 와중 주변 인물들은 일시정지 된다. 오언의 내적 비명이 시각화된 것이라는 해석도 틀리지는 않으므로,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식의 단정은 피할 것이다. 다만 오언의 아빠처럼 저도모르게 무언가에 복무하고 있다는 의심은 남겨둔다. 다음 장면, 화장실에 널브러져 있던 오언은 유니폼을 벗고 칼로 가슴 중앙을 가른다. 피 대신 TV 화면을 닮은 와글거리는 소리와 섬광이 새어 나온다. TV와 오언의 몸이 혼합되는 묘사는 처음이 아니다. <핑크 오페이크>의 마지막화를 본 그가 TV 속으로 반쯤 들어갔을 때 그의 아빠가 끄집어내는 장면이 있었다. ‘TV’ 또는 ‘핑크 오페이크’는 오언을 감싸기도 하고 오언에게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영화가 이사벨의 매직 드레스를 몸에 걸친 오언의 상을 되풀이해 삽입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놓인다. 영화는 “내부/외부의 단절된 이분법”(-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2024년 문학동네 개역판 334쪽) 에서 벗어나 몸의 표면에 주목하며, 젠더 규범과 디스포리아는 퀴어가 세상과 만나는 경계인 피부의 안팎을 순환하는 것에 가깝다고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기성의manufactured 상과 자신이 불일치하는, 그 불일치에 대한 주위의 반응을 맞닥뜨리는, 간극을 메워 일치하려 애쓰면 균열이 일어나는 사건이 반복되며 오언은 점차 질식한다. <빛나는 TV를 보았다>는, 퀴어 불편함과 젠더 디스포리아를 이해하며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의 바디가 느끼는 호러와 공명하려는 영화다.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 뱀파이어화와 유령화 공포, 만남의 긍정

원작의 장르적 요소를 덜어내거나 얼버무리는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의 ‘호러’는 어디에 있는가. 오프닝을 살펴보면, 푸른색 도시의 풍경이 화면에 들어오고 거기 애덤의 실루엣이 포개진다. 곧 해가 뜨며 화면을 오렌지빛이 가득 채운 후 타이틀 인. 블루와 오렌지의 배치는 애덤과 해리의 첫 대면에서 재등장한다. 해리가 있는 복도와 애덤이 있는 거실은 검푸른색이, 두 사람이 교류하는 현관은 오렌지색이 지배한다. 이는 혹시 애덤이 겪을 변화의 방향을 은유하며 그 핵심에 해리와의 관계가 있음을 은근히 암시하는 배색은 아닐까. 해리가 애덤을 찾아온 이후에 애덤이 부모의 집을 처음 찾아가고, 애덤의 부모 집 방문과 해리의 애덤 집 방문은 번갈아 이루어진다. 물론 푸른색과 오렌지색이 만나는 곳은 빛의 경계이므로 뭉개져 있다. 이처럼 두 사람의 세계와 이들의 만남 전후는 맞물리고 변화하는 가운데 뚜렷하게 분리되지는 않는다. 이 모호함을 전제로, 해리와의 로맨스가 애덤이 무언가를 재발견하는 계기로 작용했음을 먼저 말하고자 한다. 매디와의 유대가 오언이 ‘불편함’을 이해하는 일을 도왔듯이 말이다.

두 번째로 부모의 집을 방문하며 애덤은 엄마에게 커밍아웃한다. 게이의 삶을 외롭고 위험한 것으로 가정하는 엄마의 반응은 그날 내린 비처럼 애덤의 몸을 적신다. 런던 플랫으로 돌아온 애덤은 해리가 제안한 목욕으로 비를 씻어내고 해리와 사랑을 나눈다. 다음 방문에서 애덤은 아빠와의 대화로 과거를 복기하고, 돌아와 해리를 이끌고 클럽으로 향한다. 이후 약물 환각 씬에서 애덤의 불안은 시각화된다. 지하철에서 기침(HIV 바이러스 전염의 원인이 아닌)하는 애덤은 주위 승객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며 자신을 그들과 떨어뜨려 놓는다. 그의 맞은편 창에 비친 상은 절규하는 어린 자신이다. 타인과 맺었거나 맺을 관계로 인해 자신과 주변의 몸에 일어나리라고 여겨지는 일에 관한,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방치당할 것이라는 두려움. 애덤의 공포 역시 오언의 디스포리아가 그렇듯 내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위험이 (질병보다 먼저) 하이퍼섹슈얼한 것으로 상상되는 게이의 몸자체에 있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에이즈 담론은, 애덤의 피부에 침입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부모 사이에 누워 있던 애덤을 중심으로 카메라가 좌우로 이동하며 아빠, 엄마, 해리가 차례로 프레임에서 나가 애덤 홀로 남는 연출은 소외 불안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다. 부모의 사고 이전부터 감각해 왔고 사고 이후 느낀 충격, 슬픔 등과 엮여 한데 “매듭”지어진 외로움과 두려움이, 부모와의 대화, 해리와의 접촉을 계기로 되살아나 악몽으로 발현된 것이 아닐까. 해리와의 접촉 자체가 악몽의 원인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애덤이 방어 기제처럼 여러 차례 말하는 “딱히 그렇지(외롭지, 두렵지, 슬프지) 않다Not really”와 “지금은 다르다Things are different now”에 숨어 있는 감정을 스스로 꺼내보게 했다는 뜻이다.

애덤이 “매듭”에 관해 해리에게 털어놓는 순간 카메라는 제 가슴을 움켜쥐는 그의 손을 조명한다. 그쪽으로 시선을 내리깐 해리의 얼굴이 뒤따르는 것으로 보아 이는 해리의 시점숏일 가능성이 있다. 해리는 환상이 아닌 애덤을 마주보며 상처를 응시하는 타인이다. 여기서 해리의 유령은 부모의 유령과도 조금 다름을 짚는다. 애덤이 재회하는 부모는 그가 줄곧 그리워했던, 이미 오래전 죽은 과거의 부모다. 이들과의 만남에서 초점은 과거에 있고, 주로 애덤이 미처 부모와 나누지 못했던 것들의 복기와 고백, 해소가 이루어진다. 반면 그 죽음이 뒤늦게 드러나는 해리는 낯설고 새로운 현재의 타자다. 그들의 관계는 상호 영향을 미친다.

첫 방문에서 해리는 애덤에게 “집 문 앞에 뱀파이어가 있거든요.”라고 말했다. 이는 당시 애덤이 TV에 띄워 듣고 있던 프랭키 고우즈 투 할리우드의 ‘The Power of Love’ 레퍼런스이며, ‘뱀파이어에게 물릴 것’이라는 공포와 그리하여 ‘나도 뱀파이어가 될 것’이라는 공포를 모두 내포하는 대사다. 뱀파이어는 피를 매개로 희생자와 동족을 만들며 어둠에 몸을 숨기는 괴물이다. 앞서 언급한 에이즈 담론은 이런 식의 신화와 닮아 있다.(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와중, 프랭키 고우즈 투 할리우드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업은 그로 인한 두려움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보고 어쩌면 발화하도록 도왔을 수 있다. 스스로 말하듯 해리는 에이즈 펜데믹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세대가 아니다. 허나 애덤이 들으며 자랐을 80년대 퀴어 팝 아이콘의 히트송을 해리의 입에 올리는 제스처에는, 서로 다른 세대의 퀴어인 그들이 겪는 일에 유사성이 있다는 느슨한 암시의 의도 또한 있으리라 생각한다. 정적을 못 견뎌 타인을 찾아가는 해리와, 타인을 집에 들이기 주저하고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 애덤의 공포는 얼핏 상반되는 듯하나 교차된다. ‘퀴어’를 멸칭으로 기억하는 애덤은 “프루티tutti frutti”하다며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다리를 꼬면 아빠에게 혼나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괜찮지만, 사소한 것 하나에 그때로 돌아가버린다’고 그는 고백한다. 애덤의 엄마는 “자녀가 그렇다고(게이라고) 예상하는 부모는 없다.”고 말한다. 해리는 ‘게이’를 조롱으로 들어 왔다. 그는 부모가 자신의 커밍아웃을 ‘무리없이 받아들였’지만, 결혼한 형제들이 중심을 차지하는 가족 안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난drifted to the edge”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해리의 시신은 애덤이 발견하는 순간까지 방치된다. 사망 시점은 애덤과의 첫 대면 후로 짐작되나 영화는 그의 생사 경계를 모호하게 표현한다. 어쩌면 그는 죽기 전부터 스스로 보여지지 않는다고 느껴왔다. 화재경보를 듣고 대피하지 않은 자신을 애덤이 먼저 목격했기에, 해리는 애덤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이 예외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과 느낌에 처해 왔다. 애덤의 불안과 공포가 매듭에 비유되었다면 해리의 우울은 -점차 투명해지고 밀려나는- 유령이라는 존재 형태로 은유된다. 따라서 접촉은 애덤과 해리가 각자의 공포를 풀어내도록 돕는 행위가 된다. 영화는 죽은 해리의 (영혼의)몸과 살아있는 애덤의 몸이 샅샅이 부딪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베드씬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살이 맞닿는 곳은 자주 클로즈업되는 한편, 해리의 시신은 애덤의 손이 얹히는, 옷으로 가려진 부분만 보여진다. 부모는 작별 인사를 하고 사라지지만 해리의 경우 엔딩에서 애덤이 단단히 감싸안는다.

그러니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는 소설 <이방인들과 보낸 여름>의 각색작이기에 앞서 <위켄드>(2011)와 맥을 공유하는 영화다. 애덤과 해리의 대화는 영국 내 게이의 삶에 관해 러셀과 글렌이 나누던 대화와 교차된다. 일상에 침범하는 조롱을 듣고 “소화불량”을 느끼던 러셀의 낯을 돌이키며, 우리는 거기에서 단단히 엉킨 애덤의 매듭이나 해리를 둘러싼 짙은 블루를 연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 러셀과 글렌의 것이 그렇듯 애덤과 해리의 느낌은 같은 것으로 뭉뚱그릴 수만도 없다. 그들은 한 건물 안 각자의 플랫에 머무는 두 사람이다. 맞닥뜨리는 혐오가 형태를 바꾸며 반복해 수행되는 것이라 해도, ‘너’와 ‘나’의 감정은 동일한 것이 되지 않는다. 기성의manufactured 사회과 개인이 마주치는 경계에서 발생해 꾸준히 되새겨지며 굳어지는 공포들은 단숨에 ‘극복’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화는 그들이 대화와 접촉을 통해 그것을 풀어내도록 한다. 여백을 두는 묘사로 만남 자체를 긍정하는 이별은 <위켄드>의 기차역 씬을 떠오르게 한다. 속마음을 털어놓고 살을 맞댄 경험, 그 상대방을 이끌고 밖으로 나간 경험은 흔적으로 남는다는 것을, 앤드류 헤이는 이번엔 유령 이야기를 통해 말한다. 만남과 사랑의-상대의 일부가 내게 들어와 살아남는다는 의미에서의- ‘바이러스성’(-조지프 오스먼슨, <바이러스, 퀴어, 보살핌> 2023년 곰출판 번역본 102쪽) 을 말이다.

초현실적 애도와 위안, 구획 너머를 상상하는 힘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는 애덤과 해리의 기억에서 꾸준히 되살아나는 공포와 소외감, 외로움을 화면에 불러오고, <빛나는 TV를 보았다>는 오언의 몸 안팎에 닿아 있는 ‘다른 세계’가 지속적으로 억눌리는 데에서 오는 질식 상태를 그린다. 그러한 느낌들은 상실감을 유발한다. 그들이 살아온 날들 전부를 잃었다고 뭉뚱그리는 서술은 해서도 안 되고 사실도 아니다. 굳이 적어보자면 애덤과 해리가 그런 식의 공포와 소외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었던, 오언이 십 대부터 이사벨로 살 수도 있었던, 가능성에 대한 상실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허나 이 영화들이 중점을 두는 바는 잃은 대상을 특정하고, 퀴어 인물의 서사를 이반의 비극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단 ‘애초에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기에 잃어버렸다고도 생각되지 않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던 상실감’을 호명해 애도하는 것이다. 사라 아메드의 글을 한번 더 빌려오면, “자신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상실한 것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감정의 문화정치> 335쪽)

앤드류 헤이는 “이방인”이라는 단어에 유령이라는 속뜻을 숨겨 놓았던 원작을 각색하며, 거기 ‘퀴어(로서의 이방인)’라는 또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 이방인 모두All of Us Strangers”라는 표현은 애덤과 해리를 감싸안고, 그들에게 공감하는 관객들을 호명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애덤은 해리를 안고 침대에 누워 있다. 첫 대화에서 해리가 뱉은 “집 문 앞에 뱀파이어가 있거든요.”를 돌려주듯 ‘The Power of Love’의 첫 구절 “I’ll protect you from the hooded claw / Keep the vampires from your door”를 속삭인다. 이어 곡이 흘러나오고, 카메라는 포옹한 두 사람을 천정숏으로 촬영한다. 해리의 존재 형태에 관한 복선을 신비스러운 섬광으로 드리웠듯 여기서 영화는 추상화를 그린다.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 거리가 끊임없이 멀어지며 배경이 사라진다. 두 사람이 하나되어 심연으로 가라앉는가 싶더니, 바닥과 천장이 뒤바뀌고 곧 심연은 밤하늘이, 그들은 별이 된다. 주변으로 다른 별들이 빛난다. 영화는 애덤이 해리를 떠나보내거나 ‘내면화하는’ 식으로 완결을 내지 않는다. 대신 그와 같은 마주침들은 수 광년 너머의 별빛처럼 우주에 현존한다고 긍정하는 방향을 택한다.

<빛나는 TV를 보았다> 역시 오언이 이사벨이 되거나 핑크 오페이크를 환상으로 파묻는 식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영화는 <핑크 오페이크> 시즌5 마지막화와 중첩되며 끝난다. 아니 어쩌면 그 에피소드에서 끝난다. 가슴속 빛을 꺼내보고 미소 지었던 오언은 다시 유니폼을 입고 화장실 밖으로 나와, 자신을 거의 알아채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과한다. 이 엔딩을 관람한 기분은 이사벨이 생매장되는 장면을 관람한 오언의 것과 유사할 수도 있겠다. 해피엔딩 없이도 <핑크 오페이크>가 오언에게 위안이 되었듯, <빛나는 TV를 보았다>는 이대로 위안의 영화가 된다. 오언의 비명은 영화의 비명이 되어 스크린 너머로 울려 퍼지며 어떤 관객과 공명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결말이 비극이라는 단정은 이르다. 시리즈의 종영은 시즌5의 마무리이지 핑크 오페이크의 영원한 종결이 아니다. 상실은 현재진행형,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되풀이해 재생되는 그 감각은 “절대 낡지 않던never got old”(-오언)것이다. 오언이 가슴을 열어 빛을 꺼내볼 때 흘러나온 음악은 영화 초반 어린 오언과 겹치던 곡이다.(yeule - ‘Anthems For A Seventeen Year-Old Girl’) 애도는 매초 업데이트되고, 오언이 거기 있는 이상 다음 시즌은 언제나 예고된다. 불투명한opaque 미래의 가능성은 가슴의 좁은 틈에서 새어 나오는 빛으로 존재한다.

이 영화들은 현실과 초현실, 이쪽과 저쪽, ‘일반과 이반’의 바이너리binary를 건드린다.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는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 사이를 흐리고, 유령에게 몸을 부여하며 보여지지 않았던 것들을 화면에 불러온다. <빛나는 TV를 보았다>는 ‘TV쇼’와 ‘현실’의 구분을 흐리며, 유일한 진짜라고 믿었던 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두 작품에서 초현실이 실재하거나 실재할 수도 있다는 허구의 설정은 위안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 안의 대화와 은유들은 현실을 망각케 하기보단 현실에서 비가시화된 감정과 가능성을 조명한다. 영화가 초현실을 통해 제안한 감각은 영화 밖 삶을 다르게 상상하는 힘으로 변환될 수 있다. 황정은 작가의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나기는 말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 상상 자체가 거부되거나 훼손할 의도로 상상되어 온 것들을 초현실로 애도하며, 이 퀴어한 영화들은- 사라지고 밀려나는 자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꾸며낸 것이라 여겨지는 세상이 진짜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 참고문헌

“개막 앞둔 ‘퀴어 영화제’, 대관 취소 일방 통보…뒤에는 ”동성애 반대“ 악성 민원”, 배시은/백민정, 2025.05.02. 경향신문

참고: “Supreme Court backs ‘biological’ definition of woman”, Angus Cochrane, 2025.04.17. BBC

“How post-horror movies are taking over cinema”, Steve Rose, 2017.07.06. The Guardian

“I Saw the TV Glow Is an Instant Cult Classic. Jane Schoenbrun Tells Us Where It Came From”, Ariel LeBeau, 2024.05.03. GQ

사라 아메드(Sara Ahmed), <감정의 문화정치> 2023년 번역본, 시우 옮김, 오월의 봄 (P.318~333)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젠더 트러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2024년 개역판, 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P.334)

조지프 오스먼슨(Joseph Osmundson), <바이러스, 퀴어, 보살핌> 2023년 번역본, 조은영 옮김, 곰출판 (P.102)

사라 아메드(Sara Ahmed), <감정의 문화정치> 2023년 번역본, 시우 옮김, 오월의 봄 (P.335)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2014, 창비 (P.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