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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레이트’를 꿈꾸는 거대 그룹, 혹은 미국에 대하여, <석세션>

<석세션>

나쁜 놈들이 벌이는 나쁜 짓을 구경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순수한 보는 재미를 제공하는 콘텐츠가 또 있을까? 그 주인공들이 돈은 많지만 평판은 좋지 않은 거대 미디어 그룹의 창업주 가족이라면, 게다가 지금 그들이 경영권 승계 과정 중에 있다면, 그리고 심지어 그 모습이 현실에서 벌어진 특정 재벌 기업의 수난사를 떠올리게 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드라마를 보기 좋게 진열해놓았다 하더라도 방금 설명한 이 작품에 먼저 손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왕좌의 게임> 이후 비어 있던 드라마 명가 <HBO>의 정당한 후계자 자리를 계승받았다고 평가받는 <석세션>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당연한 말이지만 <석세션>에 대한 세상의 찬사가 단순히 그 재미로부터만 비롯된 건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이 에미상과 골든글로브를 비롯한 여러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거의 독점했다시피 수집한 수많은 트로피들은 다른 작품들에 골고루 분배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따지고 보면 재벌가의 경영권 다툼 또한 그리 새롭지 않기도 하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어째서 <석세션>에 그리도 열광한 것일까. <석세션>이 2020년대의 아메리카를 살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석세션>이 주인공 삼은 미디어 그룹 ‘웨이스타’가 새로운 미디어생태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환심의 블랙코미디

여전히 그 기세만큼은 대통령에 버금가는 총회장 로건 로이(브라이언 콕스)의 여든 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온 가족이 모인다. 물론 로건은 실제로 대통령과 종종 통화를 나눌 정도로 여전히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리더다. 그의 생일 파티는 그런 로건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다. 그중 오늘따라 유난히 달뜬 마음을 감추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 후계자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차남 켄달(제러미 스트롱)이다. 로건이 곧 일선에서 물러날 걸로 예상되기에 켄달은 오늘이 바로 자신의 대관식이 될 거라 믿고 있다. 그런데 로건이 돌연 변심하여 자신이 운영을 이어갈 거란 선언을 하자 켄달은 크게 반발한다. 무엇보다 그는 아버지가 회장직을 수행하기엔 신체적, 정신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날 이후 켄달은 자신의 유능함을 뽐내기 위해 무리한 전략을 내세우는데, 아버지에 비해 판단력과 카리스마가 부족한 탓에 곧 제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후계자가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정보가 새어나가자, 음흉한 미소를 짓는 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아무래도 로건의 삼남 로먼(키런 컬킨)이다. 입을 열 때마다 상스러운 농담을 할 뿐 아니라 실제로 종종 그걸 실행에 옮기기까지 할 정도로 기행을 일삼는 그지만, 켄달에 비해 확실히 배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직 경영에 참여한 적은 없으나 정치권에서 유의미한 커리어를 쌓고 있는 막내딸 시브(사라 스누크)도 있다. 경영권엔 무관심한 듯 보이나 모자라 보이는 오빠들보단 자신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눈치다. 그외 아직은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웨이스타 계열사의 임원으로 일하고 있는 시브의 남편 톰(매슈 맥페이든)과, 비밀이 많아 보이는 로건의 새 부인 마샤(히암 아바스), 눈치 없이 모두에게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쏟아내는 외손자 그렉(니컬러스 브라운), 그리고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즐기고 있는 장남 코너(앨런 럭)까지가 이 소란스러운 파티의 참석자다.

그러나 로건을 제외한 가족들은 아직까진 자신들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인지를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타고 있는 웨이스타라는 레거시미디어를 대표하는 배가 급격히 침몰 중인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을 위시한 테크 기업이 생태계를 바꿔놓은 지 오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선장 로건이 늘 그렇듯 또 한번 이 배를 정상에 올려놓을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고 그저 어떻게든 로건에게 잘 보일 생각뿐이다. 머지않아 웨이스타의 부실한 재정 상태가 만천하에 공개될 때, 그들은 자신이 탑승하고 있는 배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보단 그저 선장 자리를 뺏고 싶은 야심을 드러내기만 한다. <석세션>이 그 승패와 상관없이 근본적으로 블랙코미디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들이 아직 도착하지 못한 미래에서, 그들이 딱히 경쟁자라고 쳐주지도 않았던 더 새로운 플랫폼들을 통해,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미국을 꿈꾸는 아이러니

<석세션>은 그 미래를 예민하게 감각하고 있는 작가들이 쓴 자기혐오적인 농담과 약점을 지닌 자들을 향한 비아냥들, 그리고 F 워드(욕설)가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작품이다. 총괄 프로듀서 및 시즌 초반 연출을 맡은 애덤 매케이의 특유의 연출 스타일이, 중구난방 쏟아지는 대화들을 하나로 이어내 고유한 매력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도저히 받아치기 어려운 수위 높은 농담을 접수한 한 인물의 표정이 흔들리는 줌 화면에 담길 때, 그리고 그 인물이 바닥에 겨우 남아 있는 한줌의 자존감을 끌어올려 꾸역꾸역 욕설로 대꾸할 때, 그 순간 한번이라도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면 당신은 이 우스꽝스러운 승계 과정을 끝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당연히 배우들의 연기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데, <석세션>은 그 분야에서만큼은 어떤 기념비적인 드라마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 위에 나열한 주요 인물들을 연기한 주조연 배우들 중, 주요 TV 시상식 연기 부문에서 후보로 지명되지 않은 배우가 없을 정도다. 무엇보다 <석세션>은 그 배경 특성상 <왕좌의 게임>과 같은 장르물에 등장하는 화려한 시각효과가 등장할 수 없다. 누군가는 이렇다 할 볼거리 없이 농담 따먹기만 반복하는 이 작품을 지루하게 볼 수도 있지만, <석세션>엔 분명 그 모든 걸 상쇄하는 드라마가 존재한다. 그리고 피날레에서 마침내 이 게임의 승자가 밝혀질 때, 우리는 승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너무나 뻔하지만 그래서 잊고 있던 소중한 깨달음을 다시 얻게 된다.

한번 더 뻔한 얘기지만, <석세션>은 어쩌면 미국이라는 제국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화려한 전성기를 지나 다시 ‘그레이트’를 꿈꾸는 한 거대 그룹에 관한 이야기, 다시 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기에 그래서 더 계승하려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 그들의 발버둥이 이렇게 우스꽝스럽다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역설하는 작품이 저물어가는 또 하나의 분야인 레거시미디어의 대표 주자인 <HBO>에서 탄생됐다는 사실이 주는 아이러니한 아름다움이 있다. <석세션>의 성공을 ‘그들’에게도 아직 희망이 있다는 징표로 받아들여도 괜찮을까? 미래의 누군가가 이 질문을 보고 코웃음을 치는 것까지가 <석세션>의 완성일 것이다.

무조건 키런 컬킨

<석세션>

올해 초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포함해 모든 영화상에서 남우조연상을 독식한 배우 키런 컬킨에 관심이 생겼다면 반드시 <석세션>을 봐야 한다. 그가 <리얼 페인>에서 선보인 유쾌하고 엉뚱한, 하지만 상처도 많아 보이는 수다쟁이 벤지 캐릭터의 기반엔 <석세션>의 로먼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석세션>의 악랄한 작가들이 쓴 아슬아슬한 수위의 농담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것도, 키런 컬킨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