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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더 라스트 오브 어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워킹 데드>를 떠올리고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1을 감상한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아니, 얘가 이렇게 죽는다고?”라는 충격적 단말마를 연신 자아내며 좀비 디스토피아의 끝없는 절망과 자극적 충격을 선사한 <워킹 데드>류의 작품과 달리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그 속의 한 줄기 희망에 유장하게 집중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의 설정과 배경은 꽤 잔혹하다. 곰팡이인 동충하초가 인간을 숙주 삼아 퍼지고, 숙주가 된 인간은 좀비처럼 변해 인간을 공격한다. 감염자에게 물린 인간은 곰팡이에 전염돼 인격을 잃고 감염자가 된다. 이에 세상은 순식간에 초토화됐으며 주인공 조엘(페드로 파스칼)은 가족을 잃고 피폐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조엘의 앞에 나타난 이는 소녀 엘리(벨라 램지)다. 으레 좀비 디스토피아 장르의 전통적 ‘희망’의 역할을 지닌 엘리는 감염자에게 물려도 곰팡이에 전염되지 않는 항체의 보유자다. 이런저런 사건으로 인해 조엘은 엘리를 안전하게 특정 조직에 데려다줘야 하는 임무를 가지게 되고, 두 사람은 황폐한 세계를 함께 거닐기 시작한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근본적으로 아포칼립스 장르의 재미를 일부 잃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우선 엘리는 항체 보균자이고, 조엘은 혼자서 다수의 감염자와 수십명의 군인을 사냥할 정도로 실력 있는 생존 전문가다. 어쩔 수 없이 둘에겐 감염자와 적들에 의한 죽음이나 패배의 기운이 옅게 스며들 수밖에 없다. 죽음에 가까운 위기에 처하긴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들의 죽음을 쉬이 상상하기 어렵다. 주인공 릭(앤드루 링컨)을 중심으로 모인 다수의 동료가 끝없이 죽어나가며 최고조의 카타르시스를 안기는 <워킹 데드>와는 다르다. 그보다 명확한 투톱 주연 체제의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주인공들에게 죽음의 위험을 덜 안긴 채 조금 더 평안한 여행을 이어가게 된다. 이는 게임을 원작으로 삼은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숙명이기도 하다. 게임의 서사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플레이어가 금세 죽는 것은 마땅치 않기에, 원작의 줄거리를 거의 그대로 이식한 시리즈 역시 이러한 리스크를 떠안을 수밖에 없다. 조엘과 엘리의 관계는 마치 <워킹 데드>의 대릴(노먼 리더스)과 베스(에밀리 키니)처럼 유사 부자 관계를 형성하며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따스함을 내뿜는다. 다만 대릴과 베스가 언제든 죽어 크나큰 슬픔을 주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과 달리 조엘과 엘리는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 디스토피아 장르에서 죽음의 희박함은 곧 장르적 재미의 감소와도 같다.

생존이라는 저주

반대로 생각해보자.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두 주인공이 각각 남들보다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난 인물이란 것은 그들이 ‘살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는 뜻과도 같다. 지옥 같은 세계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것, 더 잘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마 축복보단 저주에 가깝지 않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어쩌면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워킹 데드>보다 더 극악무도한 디스토피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조엘과 엘리는 가족과 친구 등 주변인의 죽음을 몇번씩 경험한다. 그러나 엘리는 감염당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몸이며, 조엘은 그런 엘리를 지켜야 하는 수호자로서 죽어선 안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되레 엘리가 노쇠한 조엘의 보호자가 되어 그를 지켜야 하는 상호보완의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즉 둘은 서로를 살려야 하는 축복의 관계인 동시에, 서로가 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저주의 관계이기도 한 셈이다. 더군다나 엘리는 항체의 보유자로서 인류를 위해 생존해야 하고, 조엘은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질렀던 수많은 폭력의 과오를 참회해야 한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가 통상 서부극에 비유되는 이유는 개인과 공동체의 대립, 드넓은 하늘과 대지의 정경뿐 아니라 조엘이 지닌 죄의식에 있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조엘은 ‘아직은’ 죽어선 안되는 생존의 속박에 묶여 있는 셈이다.이러한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가치관은 시즌1의 3편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조엘의 오랜 협조자인 빌(얼 브라운)과 프랭크(머레이 바틀릿)은 생존 파트너이자 연인이다. 평소 세계의 멸망에 대비하던 빌의 기이한 특성 덕에 둘은 자신들만의 유토피아에서 꽤 안전한 행복을 즐긴다. 그러나 죽음은 곰팡이 때문에 찾아오지만은 않는다. 다른 이유로 죽음을 눈앞에 둔 두 사람은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맞닥뜨린다. 이때 둘이 선택하려는 죽음의 방식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존엄 혹은 숭고에 가깝다. 인간의 유한한 생명을 어떻게 인정하고 수용할 것인지. 세계의 모든 이가 빠짐없이 짊어지고 있는 이 고민을 더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좀비(곰팡이) 디스토피아라는 장르를 후경에 배치했을 뿐이다. 요컨대 조엘과 엘리의 이야기는 이 곰팡이의 지옥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잘 죽을 것인지에 대한 끝없는 지연, 생존 공략집이라기보다는 죽음의 지침서에 가깝다.

시즌2를 기다리며

죽음의 지독한 지연 속에서 조엘과 엘리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자기만의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생존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러한 고민은 더욱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조엘과 엘리는 누구보다 이 디스토피아의 더 비극적인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1에 수여된 세간의 찬사와 수많은 트로피는 결국 이 비장한 비극의 드라마와 어떻게 잘 죽을 수 있을지란 한 떨기 희망에 공감하는 시청자들의 실존적이고 모순적인 욕망과도 같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실존의 고민은 현지 기준 4월13일에 1화가 방송될 시즌2에서 이어진다. 해외 시사회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시즌2 역시 원작의 줄거리를 대개 흡수할 예정이다. 만약 조엘과 엘리가 빌과 프랭크처럼 누구나 인정할 법한 죽음의 숭고를 마주하며 희망의 견인자가 될 것인지, 결국 그 고민의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비극의 주인공으로 생을 마칠 것인지, 혹은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비자유의 삶을 이어갈 것인지는 두눈으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서부극의 향취

<로건>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정서에 더 몰입하기 위해선 종래의 좀비 디스토피아보다 서부극 장르의 작품을 함께 보는 편이 좋을지 모른다. 이를테면 본문에 언급한 클린트 이스트우스의 <용서받지 못한 자>나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혹은 근래에 서부극 장르를 재현한 <로건> 등 삶의 저주, 죽음의 욕망에 묶인 이들의 연대기를 탐험하며 <더 라스트 오브 어스>에 당도해도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