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위기로 인해 제작 현장이 폐쇄적으로 변하자, <HBO>는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을 아이디어를 구상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방역으로 제한된 촬영 환경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면 뭐든 만들어도 좋다는 제안을 받은 쇼러너 마이크 화이트는 특정 로케이션 촬영지 한 군데에서 찍을 수 있는 컨셉의 이야기를 고안, 5성급 리조트를 찾은 특권계층 사람들이 끔찍한 사건에 휘말리는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화이트 로투스란 이름의 글로벌 리조트 호텔 체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화이트 로투스>는 동시대 드라마 중에서 가장 날카로운 세태 풍자 코미디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2021년 하와이 배경의 첫 시즌이 방영됐고, 곧장 시즌2 제작이 확정되어 이탈리아 휴양지에서 벌어진 두 번째 참극이 큰 사랑을 받았으며, 최근 종영한 시즌3는 태국으로 장소를 옮겨 진행된다. 모두 동일한 럭셔리 리조트 체인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휴양지를 찾는 부자 관광객들과 이들을 케어하는 직원들, 혹은 현지에서 살고 있는 하위 계층간의 계급 갈등이 중심축에 놓인다.
매 시즌 첫화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이 등장해 후더닛 서사의 살인 미스터리를 바탕으로 회가 거듭될수록 투숙객들이 서서히 숨은 탐욕을 드러낸다. 대개는 가족, 친구 사이의 추한 진실과 마주해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망가지는 수순을 거친다. 투숙객과 직원들의 관계는 계급, 인종 갈등을 비롯해 제국주의적인 면모를 자랑하는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중산층 가족의 허물을 벗겨내고 평생의 트라우마와 마주하게 되는 상황과 대조를 이루는 휴양지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되는 것이 이 시리즈의 매력이다. 시즌마다 명확하게 구분되는 비주얼, 음악, 배경 컨셉 등의 프로덕션디자인이 모두 등장인물의 숨은 욕망, 계급과 관계가 있다.
<화이트 로투스>의 장르적 정체성을 다잡은 시즌1의 첫 번째 주인공은 접객에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호텔 지배인 아몬드(머레이 버틀릿)다. 그는 뒤틀린 욕망을 꾹 누른 채 살아가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 레이첼(알렉산드리아 다다리오)과 셰인(제이크 레이시)이 아몬드와 얽히면서 위기가 고조된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타냐(제니퍼 쿨리지)는 부모가 남기고 떠난 깊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하며, 호화로운 일상을 누리는 어른들의 불안하고 나약한 이중성을 조롱하듯 바라보는 10대 소녀, 올리비아(시드니 스위니)와 폴라(브리트니 오그래디)만이 유일하게 구조적 모순을 슬퍼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두 번째 시즌에 이르면 첨예한 계급 갈등 묘사뿐만 아니라 섹스와 폭력을 앞세워 성인 블랙코미디 색을 강조한다. 명백한 공격 대상은 늘 기득권 백인 남성, 가부장 사회의 모순이다. 현재 종영을 앞두고 있는 세 번째 시즌은 역대 가장 잔인한 학살극을 예고하며 시작했기 때문에 피날레 엔딩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이 시리즈를 통해서 제니퍼 쿨리지, 오브리 플라자, 미셸 모너핸 등의 배우들이 재발견되고 있는데 워낙 많은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시리즈라서 인지도와 몸값에 상관없이 모든 주연급이 동일한 출연료를 받는데도 캐스팅 문의가 쇄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음악
매회 시작할 때마다 귓가를 호로록 때리는 독특한 사운드트랙이 인상적이다. 사건의 진실이 드러날 때마다 중독성 강하면서도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음악은 칠레계 캐나다인 작곡가 크리스토발 타피아 데 비어가 작곡했다. 불협화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는 타악기와 플루트, 우쿨렐레의 조합은 언뜻 신음처럼 들리기도 한다. 각 시즌 배경인 하와이, 이탈리아, 태국의 현지 민속음악이 매번 다르게 접목된 것도 매력이다. 시즌3의 테마곡 주제는 ‘열대의 불안’이라고 하니, 누가 어떻게 죽어나갈지 음악이 먼저 나서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