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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을 경험한 아이는 더 빨리 성장한다, <르누아르> 하야카와 지에 감독

전작 <플랜 75>에서 하야카와 지에 감독은 75살 이상 노인의 죽음을 지원하는 정책을 권장하는 근미래 일본을 배경으로, 노년 여성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말년의 모습을 담담히 제시했다. <르누아르>에선 80년대 일본으로 시선을 돌려 11살 소녀 후키(스즈키 유이)의 일상에 주목한다. 이번 신작에서도 죽음을 주요하게 다루지만 어린아이를 통해 그려지는 죽음은 “단순히 두려움뿐만 아니라 경험해본 적 없는 매혹적인 호기심의 대상”이다. 후키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고, 일찌감치 상실을 경험해본 이들의 심정을 궁금해하며 영적 존재와 소통하는 텔레파시에 몰두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초자연적인 것에 끌린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후키가 느끼는 수많은 감정을 영화의 색감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다.” <르누아르>는 80년대에 실제로 11살이었던 하야카와 지에 감독의 경험이 상당수 반영됐다. “스즈키 유이 배우가 캐스팅된 이후로 배우의 면모가 많이 반영됐지만 시나리오를 쓸 때만 해도 캐릭터의 70~80%가 나와 닮아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가 암 투병을 하셨고 나 역시 10살부터 20살까지 병원을 자주 오가며 죽음을 마주하고, 가족의 고통을 분담하는 이들을 자주 봐왔다. 이후로 죽음이 내게 중요한 주제가 됐다.” 10, 20대 때부터 <르누아르>를 연출하고 싶었으나 어른이 된 현재로선 당시 부모님의 심정을 더 잘 이해한 채로 영화를 완성하게 됐다고 말한다. “10대 때 영화를 연출했으면 아마도 어머니 캐릭터를 더 비판적으로 그렸을 것이다.” 하야카와 지에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얼마나 보여주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프레임 밖의 것들을 관객이 어떻게 인식하게 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대사에 없는 감정까지 관객이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후키의 감정 연출에 각별히 유의했다. 다만 후키를 연기한 스즈키 유이는 맡은 역에 관한 설명을 자세히 듣길 원치 않았고 감독 역시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한번만 읽고 느끼는 대로 연기하길 요청했다고. 하야카와 지에 감독은 죽음을 다루되 극을 냉담히 마무리 짓진 않는다. <플랜 75>에서 그랬듯 <르누아르>에서도 연대의 순간이 등장하는데 이는 후키와 학원의 영어 선생님 사이에서 일어난다. “둘이 대단히 가까운 관계는 아니다. 다만 영어 선생님은 미국과 일본 혼혈이라는 설정이라 감정 표현에 자유롭다. 일본인들은 신체 접촉을 거의 하지 않는데 그와 달리 자신을 기꺼이 안아주는 선생님을 보며 그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깨닫는다.” “상실을 경험한 아이는 더 빨리 성장한다”고 믿는다는 하야카와 지에 감독은 자신의 분신과 다름없는 후키를 통해 죽음과 연대라는 주제를 더 깊이 탐구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