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할머니라는 여자, <첫여름> 허가영 감독

“이 여자가 누릴 수 있는 뜨거운 여름을 되찾아주고 싶었다.”(허가영 감독) 가족을 우선시하며 살아온 노년 여성 영순(허진)은 손녀의 결혼식이 아닌 남자 친구 학수(정인기)의 49재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 한줄의 로그라인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단편 <첫여름>으로 허가영 감독은 한국 최초로 제78회 칸영화제 라 시네프 부문 1등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로레알 파리의 라이트 온 우먼스 워스 어워드 수상작에도 이름을 올렸다. 허가영 감독이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이 바탕이 된 <첫여름>은 제2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돼 곧 국내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사진제공 WINNERS LA CINEF 2025 © MANON BOYER / FDC

- 축하한다. 라 시네프에서 1등상을 수상하게 된 소감은.

감사하다. 원래 무대 체질이라 긴장을 잘 안 하는데 1등상으로 이름이 불리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졌다. 프랑스의 노인 관객들이 <첫여름>을 보고 삶의 용기를 얻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고 말해준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들, 사람들의 삶, 사랑,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야기에 관해 다루고 싶다.

- 청소년기에 할머니와 지낸 시간이 <첫여름>의 바탕이 됐다고.

6개월 정도 할머니 댁에서 지낸 적이 있다. 할머니는 특이한 여자였다. 손녀의 안부를 묻거나 밥을 차려주는 법 없이 거울 앞에서 자신을 치장한 뒤 훌쩍 집을 나서곤 했다. 매일 밤 마스크팩을 하고 주무시는데 내겐 한번도 나눠주신 적이 없다. ‘이 사람은 대체 뭘까, 할머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지’와 같은 의문이 항상 들었다. 대학생 때 노인복지에 관한 수업에서 자신과 가까운 노인을 인터뷰하라는 과제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오랜만에 할머니를 찾아가 인사 드렸다. “할머니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내가 사실 남자 친구가 있는데, 그놈이 연락이 안돼서 수면제를 먹고 잔다.” 여기서부터 시작해 할머니가 어떤 여자였고 어떤 사랑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6시간 동안 묻고 들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대화를 나눌 때의 감각들이 도저히 잊히질 않더라. 그저 늙고 병든 약한 노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고 여전히 사랑받고 싶어 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노인에 관해 갖고 있던 편견이 전부 부서진 순간이었다. 이후로 항상 노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왔다. 2년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49재를 절에서 지냈다. 스님들이 불경을 낭송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걸 듣는데 그에 맞춰 할머니가 춤을 추는 모습이 자꾸 그려졌다. 할머니가 내 눈앞에서 누구보다 자유롭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싶어 영화로 꼭 재현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 중노년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거나 그의 비중을 크게 둔 작품의 수가 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어떻게 바라보나. 또한 앞서 공개된 영화들과 어떤 차별점을 두고자 했는지.

누군가가 내 영화를 보고 할머니를 팔아먹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거나 중노년의 삶을 다루는 트렌드를 좇는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 가장 큰 공포였다. 노인의 삶을 납작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목표를 항상 염두에 뒀다. 그리고 허진 배우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그와 함께라면 내가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 허진 배우의 어떤 점을 보고 그렇게 느꼈나.

내가 20대 청년 여성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시나리오의 빈틈이 있었고 이를 영순을 연기한 배우와 함께 채워갈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래서 배우 캐스팅이 중요했는데 생각보다 신선한 얼굴을 찾기 어려웠다. 70대 배우들은 대체로 너무 유명하거나 연기 경험이 적었고 그렇다고 60대 배우를 분장시켜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허진 배우의 목소리나 마스크가 정말 독특했다. 첫 미팅 때 몸에 딱 달라붙는 티셔츠를 입고 오셨는데 내가 이해하고 쓴 영순 캐릭터와 가장 닮아 있었다. 그 밖에 정인기, 신미영, 김미향, 장경호, 이금주 배우 등의 캐스팅을 이뤄나가면서 함께 잘해볼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 영화 초반 영순이 집에서 춤추는 장면과 후반부 학수의 49재가 치러지는 절 근처 숲속에서 춤을 추는 신이 특히 인상적이다.

<첫여름>은 평생 살던 곳에 갇혀 춤을 추던 여자가 밖에 나와 자신이 택한 공간에서 자신을 위해 춤을 추는 이야기다. 멜로물이 아닌 영순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에 그의 춤이 단순히 학수를 애도할 목적으로 보여지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49재를 많이 보여주지 않으려 했고 초반, 후반의 춤 신 대비가 명확해 춤을 식상하지 않게 연출하고자 했다.

- “난 이승 친구보다 저승 친구가 더 많아” 등 영순의 자조적이고 솔직한 대사가 눈에 띈다.

관객들이 내 나이가 훨씬 많은 줄 알았다며 “어떻게 그렇게 노인 같은 대사를 쓰냐”고 말씀하시더라. (웃음) 영순의 대사를 많이들 좋아해주셔서 기뻤다. 영화를 준비하던 초반에 촬영감독, 스태프들과 카바레 답사를 자주 갔다. 실제로 다 같이 술도 마시고, 한 할아버지와 춤도 추면서 영순과 학수의 사랑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았다. 내면에 정말 많은 슬픔과 사랑이 자리함에도 노인들은 사회적 시선으로 인해 이를 절절히 표현하지 못한다. 또 생의 황혼기에서 ‘나도 죽고 곧 너도 죽을 건데’와 같이 해학적인 표현을 자주 하면서도 생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는다. 그 복잡한 감정들을 대사에 녹여내려고 했다.

-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목표를 갖게 된 계기는.

어릴 때 활발하고 줄곧 반장을 도맡는 아이였는데도 스스로 사회와 동떨어진 아웃사이더라는 감각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시기에 외로움을 방출하는 창구가 글과 영상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영화를 하고 싶다는 꿈을 꿨다. 부모님과 진로에 관해 타협해 경영학과에 진학했지만 나중에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대학 때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며 창작과 먼 삶을 살아왔는데 마음 한편에 계속 영화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학교 연극부 친구들과 7분 분량의 단편을 찍어 한국영화아카데미에 포토폴리오로 제출했고 입학한 뒤 본격적으로 영화를 배웠다. 영화를 만들고 내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해방감이 든다. 세상과 다시 연결된 듯한 이 따뜻함이 너무 좋아서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만들고 싶다.

- 차기작에서도 여성 서사를 다룰 생각인가.

현재로선 그렇다. 여성 서사에 대한 허기가 내 안에 있다. 50대 여성 베이시스트, 불법 피임약을 유통하는 한 학생에 관한 아이템을 준비 중이다. 차차 주제와 대상을 넓혀가겠지만 사회적 소수자의 삶과 가까운 이야기를 다루는 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