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의 레이디 페이 주를 연기한 이후 할리우드의 주목이 쏟아진 배우 리 준 리에게 어느 날 단 두장의 대본이 주어졌다. 그 속에 적힌 배역에 관한 정보라고는 ‘미국 남부 억양이 짙은 중국계 미국인’이라는 설명뿐. 연기 학교에서 배운 다양한 억양을 비로소 쓸 기회라 생각해 오디션에 임한 리 준 리는 일주일 후 이 작품이 라이언 쿠글러의 새 프로젝트라는 걸 알게 됐고, 한달 후 식료품 가게 주인 그레이스로 <씨너스: 죄인들>에 합류했다. “1930년대 중국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작품에서 잊을 수 없는 얼굴을 새긴 배우 리 준 리를 만났다.
- 돌리 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알려지지 않은 미국 남부의 중국계 미국인 이야기>(2017)를 참고했다고.
당시 중국계 미국인들은 노예제 폐지 이후 흑인 다음으로 목화밭에서 일해야 하는 노동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목화 노동을 원치 않아 자발적으로 식료품 가게를 열었다. 이들은 당시 흑인 커뮤니티에 생필품을 제공하며 지역 경제에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아시아인은 백인도 흑인도 아니라 양쪽 커뮤니티 모두를 위한 식료품점을 운영할 수 있었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중국계 미국인들은 연중무휴로 식료품점을 운영했기 때문에 놀 기회가 거의 없었다. 아마 스모크(마이클 B. 조던)가 마을로 돌아와 파티를 열자고 했을 때 그레이스와 보 부부는 일생일대의 이벤트로 여겼을 것이다. 모두가 섞여 놀 수 있는 첫 번째 순간이었을 테니 말이다.
- 어떤 카리스마와 수완으로 커뮤니티에 뿌리내렸는지 첫 등장부터 알 수 있다.
강인하면서도 복잡하고, 또 여러 면에서 결함이 있는 인물을 표현하고 싶었다. 작품 초반 스모크가 한 소녀와 흥정하지 않나. 이 장면은 스모크와 그레이스가 어린 시절 쌓은 우정을 은유한다. 스모크는 그 생존 방식을 소녀에게도 가르친 것이다.
- 최후의 결투 이전 그레이스의 행동에 관해 미국 관객들 사이에 설전이 일었다. 배우로서 이어지는 설왕설래를 바라볼 때 어땠나.
솔직히 말해 공개 초반엔 관객들의 반응에 약간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동시에 배우로서 분분한 논의를 낳는 작품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기뻤다. 나 또한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그레이스의 선택에 의문을 가졌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45분간 공들여 구축한 개별 캐릭터의 서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관객이 그 책임을 가장 쉽게 전가할 수 있는 대상이 그레이스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한데 내 논리는 적어도 이렇다. 만약 일출까지 10분 남았다고 치자. 뱀파이어들이 동이 틀 때까지 클럽 밖에서 얌전히 기다릴까? 아니다. 그들은 마을 속에 숨으려 들 테고, 주크 조인트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뱀파이어가 된 가족 구성원을 집 안에 들일 것이다. 나는 그레이스가 친구들의 생명은 위태롭게 했을지라도 결과적으로 마을은 구했다고 생각한다. 배우는 이야기를 전하는 통로다. 이야기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은 이야기 밖 관객의 판단과는 달리 흑백논리에 좌우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