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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형태로부터의 연기, <스포일리아> <극장의 시간들>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 배우 장요훈

근래의 국내 독립·단편영화제를 찾은 관객이라면 장요훈 배우의 얼굴을 한번쯤은 마주쳤을 것이다. 제21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기담’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받는 등 2025년 화제의 단편영화로 호명된 <스포일리아>부터, <시지푸스의 공전주기> <블랙홀을 여행하는 메탈 밴드를 위한 안내서> 등 다양한 독립·단편영화에서 그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었다. 활동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있다. <파반느>에서는 경록(문상민)과 미정(고아성)을 살짝 괴롭히는 백화점 직원 동환 역을, 3월18일 개봉하는 앤솔러지 영화 <극장의 시간들> 중 이종필 감독의 <침팬지>에선 작품의 가장 주요한 이미지인 침팬지 역을 소화했다. 가수 십센치의 <5.0> 뮤직비디오 등에서 꾸준히 협업해온 박세영 감독의 신작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에서도 모습을 비춘다. 몇달 사이 관객의 호응을 이끈 화제의 단편, 독립, 상업영화 어디에서나 강렬한 신스틸러로 등장해온 것이다.

그가 아주 반짝하고 나타난 것은 아니다. 국립극단, 더줌아트센터 등의 다양한 연극무대에서 꾸준히 경력을 쌓고 <탈주> <하얼빈> 등에 인상적인 단역으로 등장하면서 눈 밝은 연출자와 제작자들에게 일찍이 이름을 알리고 있는 중이다. <하얼빈>의 초반부 신아산 전투에서 먼 곳을 응시하며 죽어가는 팔을 휘젓던 의병이 바로 장요훈 배우다. 이처럼 그의 특출난 장기 중 하나는 유려한 곡선미로 대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몸짓이다. “아무래도 몸에 비해 팔이 긴 편이라 움직임이 더 눈에 띄는 것 같다”라고 팔을 무릎까지 내려 실연하던 그는 “원래도 몸 쓰는 연기를 좋아했다. 언어로 하는 연기에 슬럼프를 겪던 무렵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를 부전공하며 극복”했던 이력을 밝히기도 했다.

장요훈 배우가 보여준 독특한 캐릭터와 능숙한 몸짓의 기원은 그가 평소 존경하는 배우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주성치, 짐 캐리, 로빈 윌리엄스, 드니 라방”을 특히 좋아하며 “<퐁네프의 연인들> 같은 영화를 꼭 한번 찍어보고 싶다”라는 소망을 지니고 있다. 그가 캐릭터를 상상하는 중심축도 움직임이나 형태에 있다. “어떤 배우는 맡은 배역의 정서부터 생각하고 어떤 배우는 배역의 전사에 숨어 있는 이야기부터 정리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어떤 형태부터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캐릭터의 외형적인 특징, 전반적인 모양, 걸음걸이, 제스처를 상상하고 연기하는 장면의 의상도 중요하게 따진다. 널널한 옷을 입느냐 정장을 입느냐에 따라 보폭과 액션이 모두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주복을 입었던 <스포일리아>의 김이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김은 500년이나 생명을 유지하며 말투든 행동이든 건조한 휴머노이드처럼 변해버린 인물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장난스럽고 사소한 무용의 리듬으로 극의 경쾌함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김의 자연스러운 언행이 장요훈 배우의 풍부하고 구체적인 상상력에서 구현됐던 것이다.

움직임에 관한 장요훈 배우의 천착은 사람 역에 국한하지 않는다. 그는 <침팬지>의 침팬지 연기에 대해 “다른 작품에서는 원숭이탈을 쓰고 연기한 적이 있는데, 원숭이와 침팬지는 걷는 방식이 아예 다르다. 침팬지는 너클 보행이라고 해서 손가락 마디를 구부려 땅을 짚으며 걷는다”라며 원숭이와 침팬지의 움직임 차이를 손으로 조금씩 알려주었다. 더불어 “다리랑 팔의 길이가 거의 비슷한 침팬지의 움직임을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다가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렸다. 보행 보조기를 팔에 끼운 채로 움직여 더 침팬지스러운 형태를 완성”했다며 캐릭터 분석의 깊이를 증명했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캐릭터를 소화하며 차근차근 나아가는 그에게 연기의 지향점은 뚜렷하다. “드니 라방이 한국에서 한 인터뷰에서 ‘시대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는 작품이 매력적’이라고 말한 적 있다. 나도 시대와 함께 가는, 적어도 시대를 역행하지 않는 캐릭터에 몸을 담고 싶다”라고 목표를 밝혔다. “조금 거창해져서 부끄럽긴 하지만, 세상에 필요한 작품들에서 연기하며 소모되지 않는 가치를 찾고 싶다.”

생생히 기억나는 내 캐릭터의 대사

<스포일리아>에서 김과 박이 입술 괴물에게 아주 긴 혼돈의 대사를 내뱉는다. 김은 “사회주의가 실패하는 은행이 채권 발행하는 지문이 개별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이 조롱받는 노동자가 농성하는 K팝이 성행하는 거짓말쟁이가 참회하는 부자들을 존경하는 이웃을 생중계하는 낭만주의가 한물간 경쟁을 맹신하는, GDP가 중립적인”(장요훈 배우는 이 긴 대사를 인터뷰 현장에서 다시 읊어줬다)이라고 말하다가 마지막에 “내가 인기가 없는!”이라고 끝을 낸다. “다소 장난스럽게 넣은 대사다. 아무리 거대한 담론이어도 결국엔 개인의 욕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인기가 없는!’은 김의 욕망이기도 하면서 배우 장요훈의 욕망이기도 하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