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민트>가 품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기 속에서 유독 더 차갑고 무자비해 보이는 인물이 한명 있었다. 바로 북한 총영사 황치성(박해준)의 오른팔 금태(이신기)다. 사사건건 박건(박정민)과 대적하며 끝내 지독한 카 체이싱 액션까지 펼치던 이다. 그 잔인한 얼굴을 이전에도 본 적 있다면, 지난해의 인기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 부장>) 속 도진우 부장(이신기)일 확률이 높다. 사회생활의 하이퍼리얼리즘을 보여주며 전국의 모든 직장인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그 도 부장이다. 2018년 연기를 시작해 최근 극장가와 안방에 그 얼굴을 또렷이 각인 중인 이신기 배우를 만났다.
- <최악의 악> 서 부장부터 <김 부장>의 도 부장, <휴민트>의 금태까지 그간 맡았던 주요 배역이 악역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아무래도 외적인 이미지가 큰 이유지 않을까. (웃음) 하지만 서 부장, 도 부장, 금태가 명확한 악역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저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주인공의 경로를 방해하는 인물들이기에 시청자와 관객들에게는 악역처럼 보였지만, 그들도 나름의 사정과 야망을 지닌 이들이라고 여겼다.
- 그래서인지 도 부장은 극적인 설정이 더 가미된 김낙수 부장(류승룡)보다 더 현실적이고 소시민적인 인물로 느껴졌다. 어찌 보면 금태도 비슷하지 않을까. 상사의 명령에 불복종하면 언제든 처벌받거나 가족의 목숨을 위협받는 사람일 뿐이니.
맞다. 금태도 사람이다. 야망이 아주 뚜렷해서 언젠가는 황치성의 자리를 뺏을 정도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북한 체제 내에서 정말 치열한 공부와 훈련, 경쟁을 거쳤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얻은 야망이 클수록 다른 인물을 위태롭게 만들게 됐을 뿐이다. 금태의 최후 장면을 찍을 때 류승완 감독님이 무언가를 말하는 느낌이 나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 어떤 말을 꺼낼지 막 고민하다가 음식 이름들을 뱉었다. 쌀밥…, 김치…. 결국 이 친구도 우리랑 똑같이 집에서 가족들과 따뜻한 밥을 함께 먹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 그래서일까. 분노하는 박건에게 “각자 자기 일을 하자”라고 응수하는 금태의 대사가 빈정거린다기보다는 정말 자신의 일과 일상의 영역을 지키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다.
연기할 때마다 그런 시선으로 인물을 봐주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 대입해서, 특정한 상황에 처한 한명의 사람이라고 느껴주시기를 바란다. 연기할 때 무언가를 애써 많이 표현하기보다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쪽을 추구하는 이유다.
-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연기를 위한 구체적 방법론이 있다면.
우선 각본 전체를 드라이하게 여러 번 읽는다. 다음에는 이야기의 장, 단락별로 몇번씩 나눠 읽는다. 이야기 전반이 머릿속에 떠다니면 맡은 인물의 목표를 확고하게 정해서 다시 읽는다. 연기 용어로 ‘초목표’라고도 하는데, 이 인물의 목적이 시나리오 전체를 어떻게 관통하는지, 모든 행동이 목적에 부합하는지 따지는 거다. 이때 일기 형식으로 인물의 서사와 전사를 쭉 쓰면서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성을 추적해본다. 나와 만나는 사람이 나를 얼마만큼 아는지, 반대로 나는 이 인물이 나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는지 등을 모두 정리한 뒤에 촬영에 들어간다. 과정이 꽤 고통스럽고 오래 걸리는 데다가 막상 촬영장에 가면 상세한 부분까지 다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대사 숙지가 빨라지고 현장에서의 자율성이 높아지면서 특별한 장치 없이도 캐릭터가 연기에 배어 나오게 되더라. 배우의 자율성이란 촬영지에서 다른 배우, 제작진과 얼마나 원활하게 소통하는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장에 가면 대체로 분장, 의상 스태프들과 가장 먼저 만나는데, 그때 최대한 외향적으로 변해서 그분들과 친해지려 한다. 그렇게 차근차근 다른 제작진, 감독님과 가까워지고 나를 응원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수록 연기도 자유로워진다.
- 무섭다. 그렇게까지 모든 걸 계산하다니, 꼭 도 부장 같다. 지금껏 보여준 캐릭터 외에도 더 다양한 연기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이겠다.
악역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 아니냐는 주변의 우려가 있더라. 하지만 상황, 의상, 상대 인물 등 다양한 환경에 대한 준비를 마치고 나면 웬만한 역할은 다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만약 보는 분들이 내 연기에 이질감을 느낀다면 그건 이미지나 배역 때문이 아니라 연기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서 ‘그래서 나도 멜로 연기를 해보고 싶다’라고 하면 친구들이 나서서 말린다. (웃음) 왜? 도 부장이나 금태도 충분히 멜로에 빠질 수 있다.
생생히 기억나는 내 캐릭터의 대사
상영본에는 편집됐는데, 금태가 박건에게 “각자 자기 일을 하는 거디요. 당당하게”라고 던지는 대사가 있다. 금태에게 잘 어울리고 장난스러운 면도 있어서 촬영 때 제작진과 감독님이 막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다음부터 라트비아 로케이션 현장에서 유행어처럼 떠돌기도 했다. 어떤 말이든 “당당하게!”를 붙이면서 긍정적으로 일하는 거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지만, 촬영장 분위기를 띄워줬던 대사라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