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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엔지 없는 청춘, 레디 액션! - 2025 대학 연기 배틀 현장을 가다

뜨거운 여름마다 막을 올리는 ‘대학 연기 배틀’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지난 7월25일 숭실대학교 학생회관 1층 블루큐브에서 개최된 ‘2025 대학 연기 배틀’은 숭실대학교 영화예술전공과 국민대학교 연극전공이 맞붙었다. 숭실대학교 영화예술전공의 최익환 교수가 신설 학과로서의 어려움을 뚫고 학생들을 업계와 연결할 방법을 찾은 데서 출발해 올해로 6회째를 맞았으며 “캐릭터에 적합한 배우를 고르는 자리를 넘어 그 사람 자체를 봐줄 수 있는”(최익환) 오디션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대학별로 30명이 출전하며 1라운드에서 같은 학교 학생들이 준비한 2인극을 선보이고, 2라운드에서는 학교별로 한명씩 나와 3분간 즉흥연기를 함께 펼친다. 수많은 인재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매해 업계 관계자들의 참석률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올해는 눈컴퍼니, 사람엔터테인먼트, 프레인TPC 등 매니지먼트사와 유수민·오정민·김희진 감독, 배우 김옥빈이설, 다수의 제작자 등이 심사위원석을 메웠다. 열기로 가득했던 현장을 <씨네21>이 카메라에 담았다.

똑같은 눈썹을 한 두 남자.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사이비 종교 교주가 후계자로 점찍은 신도에게 죽은 동생들이 보이지 않느냐고 외친다. 신도는 감격하지만 그런 척하는 것일 뿐. 사실 그는 3개월째 잠입 수사 중인 경찰이다. 상황을 받자마자 19번 한기정이 바닥에 엎드리고 6번 석찬이 그에게 손을 뻗으면서 교주와 신도의 관계가 형성됐다. 마치 맞춰본 듯한 빠른 호흡에 객석에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이들의 신들린 티키타카는 마지막까지 이어지며 최고의 콤비가 탄생했다.

눈빛으로 모든 걸 말한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자신을 몰라보고 연락처를 물어보는 옛 애인의 해맑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여자가 분노와 슬픔에 찬다. 눈시울이 붉어진 40번 서혜인이 정적을 깨고 마침내 “너 나 놀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을 때, 헤어진 연인의 복잡한 역사가 한꺼번에 덮쳐왔다. 심사위원도 학생들도 스크린에 크게 잡힌 그의 얼굴과 실제 얼굴을 번갈아보며 숨을 삼켰다.

“마지막, 마지막, 마지막!” 45번 최녕환이 36번 이정민을 다급히 부르자 둘은 어느새 스티커 사진기 앞에서 마지막 기회만 남은 연인이 되어 있었다. 적절히 잡은 위아래 위치며 능청스러운 브이 포즈와 귀여운 표정까지. 누가 봐도 인생네컷 좀 찍어본 고수들이다.

두 남자가 몸싸움까지 간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장소는 편의점. 좀비에게 물린 8번 김태훈이 해독제인 맥반석 달걀 30개를 먹어치우려 하고 아르바이트생 9번 오민욱은 계산도 안 한 채 상품에 손대는 손님을 막아야 한다. 달걀을 까먹는 연기를 하며 김태훈이 손바닥을 바닥에 내리치고 앞뒤로 움직일 때면 정말 손에 달걀이 있는 것처럼 실감이 났다. 상황 종료 30초 전,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손님에게 오민욱이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암바를 걸며 하이라이트 장면을 만들어냈다.

카키색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남학생의 역할은 무엇일까. 52번 황윤태에게 사람이 된 모기 배역이 주어지자 객석에서는 반전에 놀라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25번 한정우가 황당한 표정을 한 건 모기를 잡고 나니 웬 남자가 눈앞에 나타난 자취생 역할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쫓아내려는 자와 절대 나가지 않으려는 자가 무대를 활보하며 톰과 제리처럼 아웅다웅할수록 박수가 쏟아졌다.

환상의 호흡으로 신당을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으로 키워낸 박수무당과 동자 귀신. 동자 귀신의 짝사랑 고백이 이들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까. 즉각 박수무당이 된 55번 김한울이 눈을 감고 바닥에 앉더니 목청 좋게 주문을 외운다. 그 옆에 가만히 자리를 튼 18번 남궁도원이 8살 동자 귀신이 되기 위해 벗은 신발에 모래를 넣으며 놀이를 시작한다. 이렇게 공간과 캐릭터 설정은 단숨에 완료. 이제 어떻게 좋아한다는 말을 꺼낼 것인지 호기심이 드는 가운데 남궁도원이 천천히 입을 뗀다. “인간들이 하는 사랑이 뭐야? 롤리팝을 나눠 먹는 건가?” 첫 제시 대사였던 “롤리팝 좋아해”를 변주한 창의력에 ‘오~’ 하는 환호가 터지며 좌중의 시선이 단숨에 그에게로 쏠렸다. 주어진 것을 최대한 써먹을 줄 아는 활용력 귀재의 발견이다.

하얀 셔츠를 입은 12번 장환석은 지금 ‘3년 전의 나’와 대화 중이다. 29번 김도훈의 3년 뒤 모습인 그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인생이 원망스러워 과거의 자신을 찾아왔다. 캐릭터 ‘김도훈’을 현실과 같은 연기전공 대학생으로 설정하면서 두 인물의 대화는 짠하게 흘러갔고 동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도 네가 형이니까 나한테 방법 좀 알려줘. 교수님들이 다 내 연기 구리대!”(김도훈) “너만 그런 줄 알아? 나도 그래!”(장환석) 처음 등장했을 때 똑같이 큰 키라 어쩐지 비슷해 보이던 두 배우는 화를 내고 부둥켜안기를 반복하는 사이 어느새 얼굴마저 닮아 보였다.

집게 핀을 한 54번 이세아와 갈색 머리의 60번 최란형은 지금 막장 드라마 속에 들어와 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상윤이라는 남자의 현재 여자 친구라고 주장 중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해줄 상윤은 응급실에 실려와 말이 없다. 앞서 심사위원이 던진 “한번 끝까지 가봐달라”는 제안에 따라 둘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온몸을 내던지며 장내를 뜨겁게 달궜다. 통속극으로 끝날 것 같던 상황은 사실 최란형이 상윤의 돈을 노리고 일부러 그를 다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한번의 트위스트로 미스터리극으로까지 번졌다. 연기를 마친 두 배우는 산발한 머리에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겉보기엔 엉망일지 몰라도 모든 걸 다 쏟아낸 이들에게서만 나는 맑은 빛이 이들을 감쌌다.

대미를 장식하는 무대는 지하철이다. 한방 먹였는데도 좀비처럼 쫓아오는 스토커를 피해 지하철 끝 칸까지 달려온 여자는 유일한 남자 승객에게 도움을 청한다. 여자 역의 57번 심해인이 승객 역의 20번 이주원 앞에 손잡이를 잡은 자세로 서자 이곳은 곧 덜커덩 소리가 울리는 열차 안으로 바뀐다. 스토커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만드는 건 심해인의 자꾸 뒤를 돌아보는 행동과 초조한 눈빛, 누가 들을세라 한껏 낮춘 목소리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두가 집중하는 가운데 그가 또 다른 상황을 이어 붙인다. 이주원에게 “우리 뭐 먹으러 갈까?” 다정하게 말을 건네며 애인이 있는 척 능청스럽게 구는 순간,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다음 챕터로 넘어간다. 상황 종료 뒤, 심해인은 어려웠다는 후기를 전했지만 3분 동안 우리가 본 건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던 그의 침착한 얼굴이었다.

처음 온 심사위원으로 이설 배우가 불리자 학생들이 술렁였다. 무대 중앙으로 가볍게 뛰어나온 그가 “다 같은 배우”라며 인사를 건네자 학생들이 감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닮고 싶은 배우를 기준으로 인상적이었던 3인을 꼽은 이설이 연출도 겸하는 21번 권순형을 호명하며 몸을 그쪽으로 돌렸다. “연출과 연기를 동시에 해내는 모습이 정말 부럽습니다. 연출할 때 저를 기억해주세요”라며 허리를 굽히자 여기저기서 부러움과 감탄이 섞인 탄성이 터졌다.

대학 연기 배틀의 터줏대감 심사위원, 성현수 눈컴퍼니 대표도 마이크를 들었다.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좋은 배우를 찾겠다는 의지로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매해 이 자리에 오게 되는 것 같다. 좋은 연기를 많이 보다 보면 이 배우들을 다 품고 싶다는 욕심이 막 생긴다. 오늘 이 시간이 좋은 배우로 나아가는 동력으로 남길 바라며 여러분의 앞날이 더 밝을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을 쏟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