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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우아한 기득권층의 단호함, <84제곱미터> 배우 염혜란

“전도 돈, 은도 돈, 화도 돈을 뜻한다”는 은화의 이름처럼 그는 명예보다 부와 권력을 좇으며 살아왔다. 전직 검사 출신으로 현재는 아파트 입주민 대표직을 맡고 있는데, 가장 위층에 거주하면서도 우성(강하늘)이 제기한 층간소음 문제에 휘말린다. 주민간 갈등을 최소화하려던 은화에게서도 점점 아파트와 관련된 비리가 드러난다. <폭싹 속았수다>의 광례 이후 배우 염혜란이 다시 서늘한 얼굴로 돌아왔다. “감독님들이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캐릭터를 내게 자주 맡겨주신다”며 참여한 배우의 시선으로, 때로는 은화의 시선으로 염혜란은 은화와 <84제곱미터>에 관해 들려주었다.

-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감상이 어땠나.

시의성, 현실성이 있는 소재라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감독님의 전작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처럼 현실과 밀착된 공포 스릴러란 점도 매력적이었다. 처음엔 은화라는 인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난 속으로 생각하는 게 겉으로 잘 드러나는데 은화는 종잡을 수가 없더라. 게다가 동 대표도 부녀자 대표도 아닌 입주민 대표가 어떤 힘을 지녔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여러모로 도전해볼 만하겠다 싶었다.

- 은화의 속내를 들여다보니 어떻던가.

자본주의 체제를 정말 잘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다. 검사 시절 습득한 법적 지식을 활용해 법망을 피해가며 부를 축적한다. 하지만 권력을 위해 부를 축적할 뿐 과시의 수단으로 활용하진 않는다. 감독님도 은화가 평범한 부자처럼 보이지 않길 바라셔서 스타일링에 신경을 많이 썼다.

- 영화에선 무채색 계열의 단정한 의상을 주로 착용했는데.

처음에 더 화려한 스타일링을 생각했다. 색채를 줄 사람이 은화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독님이 전직 검사의 느낌이 났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무채색의 옷을 입기로 결정했다. 잠옷과 가운도 여러 벌 걸쳐봤고 시계, 팔찌 등 액세서리도 어떤 디자인을 어떻게 착용할지 고민했다.

- 우아하면서도 강단 있는 은화의 말투는 어떻게 잡아갔나.

저런 권력자가 내 편이라면 든든하지 않을까, 이런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래야 우성이 은화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를 잘 따르는 게 설득이 될 것 같았다. 극 초반에는 은화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반면에 본인은 상대를 전부 꿰뚫어보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감독님과 대화를 나눴다.

- 은화는 마음을 주기 쉽지 않은 인물인데 어떻게 접근했는지 들려준다면.

아무래도 나와 비슷한 결의 인물에게 마음이 가지만 상반된 캐릭터를 할 때의 기쁨도 있다. 나쁜 놈일수록 감정의 찌꺼기가 없고, 은화도 그렇다. 구질구질함이 없다. 가차 없이 끊어내는 게 나와 달라서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해볼 수 없는 일들이니까. 인물에게 마음이 가는 것과 연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 은화에게 아래층 사람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계약자와 피계약자라는 서류상의 관계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GTX 개통 소식을 앞두고 사람들이 난리가 나서 진정시키려다가 사건에 휘말린 거지 처음부터 이들과의 소통을 고려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 남들은 우성을 의도적으로 층간소음을 유발한 범인이라고 여기지만 그럼에도 은화는 우성을 믿는 것처럼 행동한다. 실제로도 그랬을까.

단 한번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쉽게 마음을 내줄 사람도 아니고 사람간의 관계에서 자신의 말을 잘 듣고 도움이 될 사람인가가 중요하지 기본적인 신뢰가 바탕이 될 사람은 아니다.

- 은화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도 신기하다.

감독님에게도 물었다. “과연 남편이랑 한 침대를 썼을까요?” 아이가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는데 어쩌면 그래서 더 돈에 욕심을 냈는지도 모른다. 남편의 직업이 본인의 일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모두가 열정적인 사랑을 꿈꾸는 건 아니니까 자신을 존중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따박따박 해줄 남자에게 끌렸던 게 아닐까.

- 진호(서현우), 우성이 은화의 집에서 난동을 부리는 신은 동선이 복잡해 공을 들였겠다.

마지막 신이 워낙 중요하고 은화의 집에 공간이 많다 보니 침실에서 하루, 복도에서 하루, 거실에서 하루 찍는 식으로 오래 촬영했다. 폐쇄된 세트장이라 배우들끼린 중간에 나가고 싶겠다고 농담하며 각오도 다졌는데 한창 더울 때 촬영하다보니 오히려 이 안이 최고라고 마음이 바뀌더라. 내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에 관해 감독님에게 여러 차례 질문했다. 은화집의 비밀의 방의 존재와 장부의 위치, 남편을 이용하는 방식, 우성과 진호에게 과격하게 대응하는 것이 맞는가에 관해서도. 은화가 욕을 할 때도 ‘좀더 배운 여자의 욕이라면 어떻겠나, 욕을 해본 적 없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욕이 무엇일까’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 이번 작품을 찍고 난 뒤 생각이 변화한 지점이 있다면.

<84제곱미터>는 남들이 으레 건네는 ‘아파트 한채 사둬야 하지 않겠냐’는 말의 의미에 관해 생각해보게 되는 작품이다. 나는 성인이 된 뒤로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다. 워낙 밀집된 공간이라 한 단지에 몇 세대가 사는지만 들어도 숨이 막힌다. 게다가 아파트는 단순히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선시공, 후시공, 분양을 비롯한 여러 문제와 욕망이 얽혀 있다.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인물들을 접하다보니 우성의 서사가 더 가슴 아팠다. 극 중 우성의 등본엔 지금까지 그가 거쳐온 고시텔, 고시원이 숱하게 기록돼 있다.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등본을 뗀 적이 있는데 학교 다니던 5년 사이에 집을 10번 옮겼었다. 그때도 이 많은 집 중에 내 집 하나 없나 싶었는데, 우성이도 마찬가지였다. 스릴러로 시작해 엔딩의 울림이 큰 영화다. 아는 영어 선생님에게 ‘층간소음’을 완벽하게 대체할 영단어가 없다는 얘길 들었다. 그만큼 한국적이고 복잡한 요소가 얽힌 아파트의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가닿을까 기대가 된다. 해외 시청자들의 평도 무척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