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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진실을 위한 복잡함으로, <84제곱미터> 배우 서현우

비중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배우 서현우는 자신만의 색깔로 캐릭터를 완성해낸다. <84제곱미터>의 미스터리한 윗집 남자 진호도 예외는 아니다. 무섭게만 보였던 이웃은 뜻밖에 정 많은 조력자의 면모를 드러내더니 영화 후반부엔 우성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데 앞장선다. 진상과 동기가 특수한 인물을 끝까지 힘 있게 이끌고가는 서현우는 <84제곱미터>가 품은 심연이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우리영화> 속 멀끔한 영화 제작자의 이미지가 무색할 정도다. 서현우에게 예외적 초상을 특유의 성실함으로 돌파한 과정을 물었다.

- 우성의 윗집에 사는 진호는 처음엔 조력자였다가 후반엔 의외의 이력으로 관객을 놀라게 한다.

초반에 너무 드러내면 어떤 의도가 풍길 수 있고, 너무 숨기면 후반부에 설득되지 않을 수 있었다. 작품 전체의 구조를 의식하면서 배우로서 큰 그래프를 그려보는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진호가 아주 예외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찍었다. 스스로 내가 연기할 인물의 타당성부터 잡는다. 과격하고 폭력적인 면이 있지만, 배우로서 그가 가진 의지와 최초목표까지 부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 진호의 플롯에 집중하자니 관음의 욕망, 그리고 불의를 타도하는 자신에 취한 선민의식 같은 것도 엿볼 수 있었는데.

감독님이 캐릭터명에 의미를 숨겨뒀다. 진호의 성이 영씨다. 영진호, 즉 ‘영상으로 진실을 알린다’는 뜻이다. 진호가 무엇에 그토록 꽂혀 있는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사람 문제라고 결론내렸다.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권력형 비리와 자본주의적 범죄 말이다. 나는 이 인물의 동기를 특정 부류의 집단에 대한 복수심으로 읽었다. 아마도 이런 세태가 정확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도덕적이지 못한 인물에 대해서 나도 해석의 여지를 부여하며 연기한 게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으면 이 정도로 세고 극단적인 인물에게 공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 김태준 감독에게 많은 질문을 했을 것 같다.

정말 많이 했다. “이 방법이 잘못되지 않았나요? 더 현명하게 할 순 없나요?” 감독님은 진호가 악역도 빌런도 사이코패스도 아니라고 마법의 주문을 걸어주는 동시에 내가 어느 순간에 “진호가 좀 짠해요”라고 말하면 “그렇게까지는 들어가지 마요. 위험하니까” 하고 제동을 걸어주기도 했다.

- 열정적인 의도와 비도덕적 방법론이 공존하는 캐릭터다. 어떻게 몰입의 순간을 찾아나갔나.

몸의 문신들에 주목했다. 내 몸에 그것들이 새겨지는 과정에서 비로소 인물에 몰입이 이뤄졌다. 진호의 문신과 흉터는 패션이 아니다.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특정 집단에 속하기 위해 새긴 ‘전사의 흔적’ 정도로, 캐릭터의 전사를 잡았다. 어떤 문신은 상처를 가리기 위함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시간을 감수하며 살아온 이라면 일정 수준의 폭력성을 감수해야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몸에 문신이 여럿 있으면 어쩐지 이를 과시하고 더 세보이려는 동작을 취할 것만 같은데, 진호와는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자기 흉터를 과시하지 않는 것처럼 진호의 문신은 그저 그의 일부다. 최대한 힘을 빼고 몸의 움직임도 절제하려고 했다. 헤어스타일 역시 가장 무난하면서도 눈썹 아래 표정을 극대화할 수 있는 스타일을 찾았다. 진호는 알 듯 말 듯한 시선 처리가 가장 중요한 캐릭터라서 오히려 머리로 주의가 분산되지 않도록 하는 데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 일상 공간에서의 액션은 어땠나. 맨발에 실내복 차림으로 때리고 나뒹구는 인물들의 대단원이 생생하다.

특별한 장비도 유니폼도 없는 액션이라 보호대를 착용할 수 없으니 무술감독님이 애초에 다칠 여지가 적은 액션을 짜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진호가 패셔너블한 근육질의 소유자일 리 없고 실전의 시간들로 천천히 다져진 몸이어야 한다는 게 관건이었다. 별도의 도구 없이도 타격감을 주기 위해 유도, 복싱 등 여러 기술을 섭렵했다.

- <84제곱미터>는 아파트 내부를 실제에 가깝게 재현한 세트장에서 촬영됐다. 배우 서현우가 공간에서 받는 영감은.

현장은 언제나 내가 상상한 그대로의 공간이 아니다. 테이블과 의자 높이가 달라지면 배우의 자세도 달라진다. 그로부터 심상이 달라지고, 대사와 톤 앤드 매너도 다 달라진다. 그래서 현장에 가면 공간을 탐색한다. 내가 이런저런 이유나 디테일에 대해 물으면 미술팀은 언제나 아주 사소한 것까지 막힘 없이 이유를 말해준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촬영장에서 혼자만의 준비에 갇혀 계획대로 연기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게 됐다. 외부의 자극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그 무렵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아저씨>에 출연할 때 회사의 일원들이 볼펜 같은 사소한 소품들을 하나하나 자기 책상에 직접 세팅했던 경험도 생각난다. 촬영 동안 업무용으로 화면에 띄울 파일까지도 배우 스스로 정하곤 했다. 이후로는 곧잘 미리 세트장에 도착해서 내가 위치할 장소를 물어보고 적극 탐색한다. <84제곱미터> 중엔 진호가 사는 집의 모든 서랍을 열어보았다.

- 영화 <헤어질 결심>, 시리즈 <삼식이 삼촌>에 이어 <84제곱미터>에서 마초적 남성성의 일면을 대변하는 공통점도 보여주고 있다.

실제의 나는 섬세한 사람이다. (웃음) 이 예민함이 마초적인 남성을 연기할 때도 결국 도움이 된다. 배우는 많이 관찰한 만큼 캐릭터에 많은 것을 입힐 수 있다. 덧붙여, 내가 시도하고 싶은 건 의외성이다. 진짜 강함이란 어떤 모습일까? 1차원적인 남성성을 표현할 것이 아니라 장면 안에서 발생하는 기운과 뉘앙스를 주체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 <로기완>의 인정어린 삼촌과 <84제곱미터>의 차가운 이웃은 선악의 레이어가 공존하는 배우 특유의 눈매를 적소에 활용한 캐스팅 사례다.

예전에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한 감독님이 “각도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는 좋은 눈인데 지금은 스스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 잘 써야 한다”고 하셨다. 그땐 충격을 받았지만 무척 도움되는 조언으로 남았다. 이후 계속 연구하게 됐다. 원론적인 말이지만 인물이 생각하고 세계를 보는 관점에 충실하려고 한다. 그러면 눈에도 그것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