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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반듯한 얼굴로 극한을 향할 때, <84제곱미터> 배우 강하늘

금리는 치솟고 집값은 떨어져 고통받는 직장인 우성(강하늘). 빚 갚는 것만도 괴로운데 정체불명의 층간소음에 시달리자 신경쇠약까지 뒤따른다. 배우 강하늘은 무너져가는 인물의 위태로운 감정선을 사실적인 터치와 기이한 만화적 감수성을 오가는 연기로 구현해냈다. 의심 없이 요약하고 싶다. <84제곱미터>에서 강하늘의 연기는, 그 자체로 보는 재미가 있다고. 올해 영화 <야당> <스트리밍>, 드라마 <당신의 맛>,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즌3까지 상반기 내내 신작으로 연이어 인사했고 개봉예정 영화 <퍼스트 라이드>까지 앞두고 있는 상황. 부지런한 그에겐 요즘 ‘월간 강하늘’이란 별명이 따라다닌다. <84제곱미터>는 그 가운데 강하늘의 끓는점을 볼 수 있는 영화다. 숨 고르기의 미덕을 아는 이 배우는 이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집을 가리킨다. “아무도 들이지 않고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잠깐이나마 온전히 집을 누리는 시간을 갖겠다. 오늘은 소파, 내일은 침대, 그다음날은 텔레비전 앞에서.”

- 주인공을 미화하지 않는 극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배우가 망가져줘야 하고 풍자적 성격이 강한 작품인데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본이 재미있으면 내가 어떤 역할이든 상관없다. 연기자의 역할은 자신이 재미있게 읽은 대본을 사람들한테 재미있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성이 얼마나 망가지든 얼마나 예쁘게 나오든 전혀 상관없었다.

- 동세대로서 이 남자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안타까웠다. 내가 연기자가 아니라 직장인이었다고 해도 우성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코 돈 문제가 아니다. 나는 승부사도 아니고 독한 향상심도 부족하다. 말하자면 주어진 대로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우성을 보면서 나를 돌아보기도 하고 짠한 마음도 들었는데, 매사 절박해서 어리석은 짓까지 마다 않는 이 청년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 많은 관객들이 공감해줄 것도 같았다.

- 한정된 실내극의 조건 속에서 고조되는 감정선을 단계적으로 표현하는 데 고심한 지점이 있다면.

기술적으로 접근했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매우 뚜렷한데 감정의 높낮이는 계속 선명하게 바뀌어야 했다. 기술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오직 감정의 진실성에만 기대어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럴 때 나는 영화 속 우성을 바라볼 관객을 상정하고 그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연기한다. 결국 관객에게 ‘보여야’ 한다. 조금씩 극한으로 향해가는 우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언젠가 내가 경험했던 감정과 순간들, 그리고 평소 관찰한 것들을 활용했다.

- 우성은 거실 맨바닥에 엎어져 자고 쓰레기더미 사이에서 늘 구부정하게 앉아 있어 자세로 기억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한다. 내가 관객일 때도 마찬가지인데, 시간이 흘러 이야기의 세부는 잊더라도 인물의 형태만큼은 사진처럼 기억한다. 갑자기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가 벤치에 앉아 있는 특유의 자세가 떠오른다. 머릿속에 새우밖에 없는 버바와 바닥 청소를 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이 취한 몸의 ‘태’ 같은 것도 좋아한다. 몸의 자세로 전달되는 감정과 기 억을 표현하고 싶다.

- 같은 맥락에서 억울하게 경찰서에 잡혀간 우성이 그 와중에 코인 매도 타이밍을 잡기 위해 벌이는 소동극을 언급할 수 있겠다. 희비극 사이의 균형감각이 돋보였다.

감독님과 굉장히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고심했던 장면이다. 마냥 웃기면 안된다. 웃긴 장면이 아니다. 우성 입장에선 전 재산이 걸린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절박하게 표현하면 관객들이 달아날 것 같더라. 가족이 죽기 직전이라든가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당한다든가 하는 비극과는 비교할 수 없지 않나. 인물이 혼자 웃거나 혼자 처절할 때 관객은 오히려 허리를 의자에 기대고 뒤로 빠지게 된다.

- 외향은 어떻게 만들어갔나. 철저한 맨얼굴에 평소보다 체중도 불린 것처럼 보인다.

일체의 메이크업 없이 현장 가서 옷 갈아입고 바로 촬영 들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감독님은 예민함이 극도에 달한 우성의 모습을 위해 체중 감량을 원했다. 그런데 내가 체중이 불어나는 게 맞겠다고 고집했다. 컴퓨터 앞에서 컵라면 같은 인스턴트 음식만 먹고 소위 ‘개판 5분 전’으로 사는 남자다. 그런데 깡마른 몸을 연출하면 영화적으로 스타일리시한 캐릭터처럼 보일 것 같더라. 과자 부스러기, 소주병, 족발 뼈다귀와 함께 뒹구는 남자다운 리얼리티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 <84제곱미터>는 그야말로 난장의 미장센을 보여준다. 우성과 달리 실제 강하늘은 청소에 능한 깔끔한 성향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맞다. 청소 이야기를 하니 추천할 아이템이 생각난다. 걸어다니기만 해도 먼지나 머리카락이 싹 모이는 청소용 슬리퍼다. 하루 종일 신고다니다가 자기 전에 슬리퍼 뒷면만 깔끔히 정리해주면 된다. 요새 그 낙으로 산다. 그렇다고 각 맞추고 배열이 중요한 타입은 아니다. 물리적 깨끗함보다는 화학적 깨끗함을 추구하는 쪽인 것 같다.

- 10대 시절에 일찍이 부산에서 서울로 배우 생활을 위해 이주했다. 강하늘에게 보금자리가 갖는 의미는.

10대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완전 집돌이다. 내성적인 탓도 있겠다. MBTI 검사를 하면 극단적인 I가 나온다. 집에 있을 때만이 휴식이고 집에 있어야만 편안하다. 집은 나만의 동굴이다. 자주 연락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실제로 촬영 끝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친구들에게 ‘동굴 들어간다’고 표현한다. 잠시 연락이 안될 거라는 전언이기도 하다. 크고 좋은 공간은 아니지만 내게는 이보다 더 안락할 수 없는 철저한 쉼터다.

- 단시간에 응축된 에너지를 밖에서 발산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온 이후의 배우는 어떤 모습인가.

내가 일을 하는 가치관으로 볼 때 전제부터가 조금 다르다. 연기할 때 매 순간 완전한 메소드로 몰입해 나 자신을 다 소진할 정도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식은 지양한다. 대본의 의도를 충실히 전하기 위한 표현법을 고민하는 편에 가깝다.

- 처음부터 그랬나. 아니면 어느 시점에 정립한 직업인으로서의 태도일까.

연기를 처음 배울 땐 나의 모든 영혼과 감성, 감정, 정서를 다 쏟아넣어서 한마디 한마디를 해내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필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게 내 방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행복하지가 않더라. 내 일을 내가 즐기면서, 동시에 부끄럽지 않은 책임감을 갖고서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연기를 위대한 예술로 놓고 큰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스스로 너무 무거워진다. 하지만 이게 나의 ‘일’이 되면 재미를 누릴 수 있다. 기자님이 주간 마감하듯이 나도 이 일을 계속 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