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짓는 행위만큼 재밌는 게 또 없다
- <어쩌면 해피엔딩>의 한국 초연 때만 해도 뉴욕의 직장인이었다고. 전업 작가로 살기로 결정할 때 어떤 마음이 뒤따랐나.
지금 생각하면 너무 일찍 퇴사하지 않았나 싶다. 좀더 다녔으면 지금 집이라도 한채 있었을 텐데. (웃음) 광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할 땐 나의 모든 감각을 업무에 소진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로서 언어를 다루는 감각과 디자이너로서 트렌드를 민감하게 좇는 감각은 기제가 다른데, 생업을 이어가려면 전자는 늘 집에 둔 채 출근해야 한다. 한데 일에 치일수록 작가가 필요로 하는 감각이 깎인다는 느낌을 받아 무서웠다. 또 전원이 미국인인 환경에서 그들이 오랫동안 체화해온 문화를 같은 속도로 따라잡지 못한다는 박탈감이 크던 차였다. 마침 <어쩌면 해피엔딩>의 초연이 성공해서 당장 근근이 방세는 낼 수 있었다. 그길로 회사를 그만뒀다.
- 뮤지컬 작가로서 대사를 쓰는 것과 넘버의 가사를 쓰는 일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른 노력을 요하나. 결국 넘버도 음악에 대사를 덧붙이는 일일 텐데.
미국으로 유학 가기 전 작사가로 활동했던 경력이 도움이 됐다. 이제 막 경력을 시작하는 젊은 극작가, 작사가라면 음악 공부를 하길 추천한다. 음악을 알면 음악적인 언어를 찾을 수 있다. 공연계에선 작가가 가사와 대본을 다 쓴 후에 작곡가가 음을 입히는 것이 관례인데, 가요의 경우 이미 완성된 곡에 가사를 쓰는 일이 많다 보니 그때 운과 율을 살려 음의 진행에 부합하는 말을 붙이는 훈련을 할 수 있었다. 그 분야가 어디든 말을 짓는 행위만큼 재밌는 게 또 없다. <번지점프를 하다>로 처음으로 뮤지컬 가사를 쓸 때 내건 목표가 있다. 불특정 다수가 라디오에서 이 작품의 넘버를 들었을 때, 말하자면 콘텍스트 바깥에서 노래를 접한다 해도 어색함 없이 가요처럼 들리길 바랐다.
- 며칠 전 이재명 대통령과 만나 공연 창작자들의 다자간 협업이나 네트워크 구축을 진흥하기 위해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 긴요함을 강조했다.
개인이 활로를 뚫자니 한계가 존재한다. 네트워킹엔 힘이 필요한데 대한민국의 문화자본이면 지원이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이 연한을 두고 미국의 극장과 협력한다면 어떨까. 양국에서 공연을 개발해 무대에 올리는 프로세스가 마련된다면 국내 창작자의 해외 진출 기회가 자연스럽게 창출될 것이다. 공연은 영화처럼 만든 후에 수출할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니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거둔 성과가 한국에서 작품을 잘 만들어 수출한 사례로 비칠까 우려된다. 지금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 <어쩌면 해피엔딩>은 윌과 내가 미국의 작가 사이에서 통용되는 방식으로 작품을 집필한 결과다. 현장성이 중요한 예술일수록 현지의 인력, 현지의 작업 풍토 등 현지의 협력 조달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현장에서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이 체제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다음 사례가 탄생하기 어렵다.
- 늘 창작의 영감을 묻는 질문에 작가 개인의 감정적 경험을 언급해왔다. 구체적 감정을 동력 삼아 이야기의 원형을 찾는 일의 효용은 무엇인가.
자기 탐구를 거치지 않는 작가가 있을까. 창작이 건강하지 못한 노동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글은 쓸수록 외롭고 슬퍼지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작가가 같은 감정을 거칠 거란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가령 <일 테노레>는 미국에서 외국어(한글)로 작품을 만들 때 느낀 고독으로부터 탄생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영어로 이야기하는 카페에서 홀로 한국어로 가사를 쓰자면 고아가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작가 서너명이 한 카페에서 각자 글을 쓰더라도 나 혼자 한국어로 대본을 쓰면 미국인들이 신기하게 쳐다본다. 그 속에서 꿈을 좇는 게 무슨 의미일지 고민하다가 <일 테노레>가 나왔다.
- 여러 차례 윌 애런슨과 함께 단편영화를 찍고 싶다고 밝혔다. 대체 언제 볼 수 있나.
이러다 못 만들까 걱정이 된다. 애초에 윌과 서로 좋아하는 영화를 공유하다 친해졌다. 윌과 나 모두 영화감독을 꿈꿨다. 윌은 고등학생 때 전교생을 동원해 영화를 찍었고, 나는 친구 두세명과 캠코더를 가지고 왕가위의 스텝프린팅을 흉내낸 영상물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어쩌면 해피엔딩>의 초연을 올린 후 장편 2개, 단편 1개의 트리트먼트를 구상했다. 사실 <패스트 라이브즈>가 나왔을 때 당황했다. 내가 꿈꾸던 단편 내용이 딱 뉴욕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한국인 커플의 이야기였거든. 두 남녀의 나이대는 70대이고, 오래전 남자가 결혼을 전제로 미국행 이민을 제안했지만 여자는 새 삶이 두려워 결혼을 포기했다. 이후 노인이 되어 뉴욕에서 조우한 두 남녀의 하루를 다룬 영화다. 심지어 호텔 1층 라운지 바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도 생각했는데 그것도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웃음) 빨리 만들 걸 그랬다.
- 미란다 줄라이와 마이크 밀스의 영화를 사랑한다고 들었다.
고유 감각을 주류의 가치에 재단하지 않고도 근사한 결과를 만드는 예술가를 존경한다.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추종할 수밖에 없다. 마이크 밀스가 디자인스쿨에서 미술을 전공해 미술 작가로 활동하다 지금은 글이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지 않나. 나의 경우 미술 학교에 다닐 때 유독 텍스트 위주인 작품을 자주 만들었는데 그때 마이크 밀스의 영화를 알게 됐다. 영화와 이야기를 향한 갈망이 늘 있어서일까. 아니면 닮고 싶은 궤적을 이미 걷는 감독을 만나서일까. 그의 세계에 절로 반했다.
- 두 감독 모두 예술가 내부에 자리한 고독과 권태를 곱씹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 점으로 인해 남모를 고통을 지나치게 낭만화하는, 자의식에 함몰된 작가주의가 아니냐는 비판도 받는데.
하지만 예술가가 자신의 천성을 꾸며내지 않아서 좋다. 천성을 작품으로 바꿔내는 것도 예술가의 능력이니 말이다. 안 그래도 미란다 줄라이가 쓴 소설 <All Fours>를 읽는 중이다. 책을 읽는 내내 줄라이가 지금 나이에 이르러 전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쓸 뿐, 예술가로서 전하려는 말은 초기작 <미 앤 유 앤 에브리원>(2005)으로부터 변치 않았다 싶었다. 예술가가 유지해야 할 심지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 그렇다면 작가 박천휴의 다음을 묻겠다. ‘토니 위너’의 타이틀이 예술가 박천휴가 세상을 응시하는 시선을 바꾸진 않겠지만, 기회의 폭은 드넓힐 수 있다. 여러 제안 속에 최선책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올 텐데 그럴 때마다 잃지 않으려는 심지가 있을까.
지금껏 누군가의 제안에 의해 작업에 착수한 적은 없다. <번지점프를 하다>를 제외하면 다 내 안에서 힘이 발동해 영감으로 이어지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다만 꿈이 있다면 나와 윌이 만든 이야기가 작가를 넘어 관객에게도 의미가 싹텄으면 한다. 그러려면 감각을 계속해 벼리고 훈련해야겠지. 근래 바쁘다는 이유로 미술 전시나 영화 관람을 놓친 지 오래라 자책도 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렇지 않나. 플랫폼이 만들어내는 알고리즘으로 인해 수용자가 지배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정보에 침범당하지 않으려 애쓴다. 감각의 주도권을 쥔 채 데이터기술에 구애받지 않고, 무얼 보고 들을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박천휴 작가를 향한 애정의 말들
배우 박진주 - <어쩌면 해피엔딩> <고스트 베이커리> 출연.
“휴(나는 박천휴 작가를 ‘휴’라고 부른다)의 가사와 대본을 처음 읽으면 따뜻하고 유쾌하다. 인물들도 사랑스럽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 안에 숨어 있는 외로움이나 결핍, 사랑에 대한 시선이 보인다. 애써 괜찮은 척하면서도 사실 무언가를 깊이 바라는 마음들. 그걸 마주하는 순간 마음이 강하게 짓눌린다. 시냇물처럼 잔잔하게 시작한 이야기가 어느 순간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휴는 배우도, 관객도 마음껏 웃고 울고 사랑하며 슬퍼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에 빠뜨려놓고, 모든 것엔 끝이 있다는 걸 정확히 알려준다. 슬프지만 끝이 있다는 걸 알기에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선물처럼 느껴진다. 그 선물을 받고 싶어 박천휴 작가의 작품을 거듭 찾게 된다. 휴는 반딧불이 같다. 스스로 빛을 내고 그 빛으로 주변을 따뜻하게 밝힌다. 반딧불이가 청정한 지역에서만 살 수 있다고 들었는데, 휴와 함께라면 어느 순간 나까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휴의 사랑이 전세계에 퍼졌다. 한번 더, 진심을 담아 축하를 보낸다. 휴 자신이 세상에 먼저 꺼내 보인 사랑을 당연한 듯 돌려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연약하지만 정말 강한 휴가 앞으로 더 멀리, 깊이 나아가길 응원한다.”
배우 강승호 <사운드 인사이드> 출연.
“<사운드 인사이드>에 출연하기 전 <어쩌면 해피엔딩>과 <일 테노레>를 본 적 있다. 뮤지컬의 형식을 띠지만 연극의 본질을 갖춘 작품을 쓰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연습실에 가면 연출님이 배우들에게 눈치 게임을 시켰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시간을 준비했다. 그렇게 긴장을 풀며 대사를 넘어 배우끼리 소통할 수 있는 공기를 형성했다. 그 공기 속에서 섬세하게 감각을 일깨워가던 순간을 기억한다. 박천휴 작가는 텍스트로 드러나는 언어 이면에 자리한 인간의 진심 그리고 인류애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이번 수상, 축하드린다. 정말 큰일 하셨다.”
Stage Credits
뮤지컬2012 <번지점프를 하다> 작사
2013 <카르멘> 가사 번역
2016 <어쩌면 해피엔딩> 극작, 작사
2022 <물랑루즈> 연출 통역
2023 <오페라의 유령> 가사 번역
2023 <일 테노레> 극작, 작사
2024 브로드웨이 <어쩌면 해피엔딩> 극작, 작사
2024 <고스트 베이커리> 극작, 작사
연극2024 <사운드 인사이드> 연출, 윤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