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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잘 알고 잘 다룰 수 있는 소재로부터, <어쩌면 해피엔딩> 작가 박천휴 ➀

- 데뷔작인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경우 별개의 작가가 있어 작사가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작가이자 작사가로서 실질적으로 이야기를 쓴 것은 <어쩌면 해피엔딩>부터인데.

이제는 밝힐 수 있다. 사실 <번지점프를 하다>는 윌 애런슨과 내가 초고를 매만졌다. 작가 크레딧으로 기재된 각본가는 제작 극 초반에만 참여했고, 우리와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이후 제작사가 윤색을 맡기며 신인인 우리에게 작가 크레딧은 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내겐 직함이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영화 원작이 존재하는 작품이었지만 초연, 재연에 한해선 윌과 내가 대본을 고쳤다.

- <어쩌면 해피엔딩> 창작 당시 한국 공연과 미국 공연을 모두 염두에 두며 작품을 썼다고. 2016년 여름 미국에서 선보인 리딩 공연의 대본은 지금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 <어쩌면 해피엔딩>과 얼마나 달랐나.

한국 초연의 영어 번역 정도다. 이후 미국 무대에 올리기 위한 여러 피드백을 거치며 넘버의 생략, 스토리의 보강 등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했다. 애초에 <어쩌면 해피엔딩>의 초안을 영어로 썼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공동 작가인 윌이 한국어를 꽤 구사하지만 이를 대본화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라 윌과 함께한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늘 영어다. 영어로 이야기를 쓴 다음 한국 극장을 위한 한국어 가사를 쓰면 언어에 맞춰 대본을 조금씩 정돈한다. 지역성이 중요한 대사나 가사는 미리 한국어가 들어갈 공간을 염두에 둔 채 비워두기도 한다. 미국 리딩 공연 직후 브로드웨이 <어쩌면 해피엔딩>의 프로듀서인 제프리 리처즈를 만났다.

잘 알고 잘 다룰 수 있는 소재로부터

- 2017년 1월 제프리 리처즈와 계약한 이후 2020년 애틀랜타 트라이아웃 공연을 거쳐 2024년 10월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다. 10년이 채 안되는 시간 동안 아시안 창작자의 예술 내 아시안 재현 문제가 보다 가시화되지 않았나. 그래서인지 브로드웨이 버전의 <어쩌면 해피엔딩>이 근미래 한국배경과 한국인 주인 설정을 유지하고, 반려식물의 이름이 그대로 ‘화분’(HwaBoon)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데.

이를 관철하고자 제프리 리처즈를 설득할 필요가 없어 다행이었다. 의도적으로 한국을 배경으로 설정하지는 않았다. 초보 작가는 잘 알고 잘 다룰 수 있는 소재로부터 작품을 만들어나가야 잘 쓸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나. 뉴욕에 오래 살았지만 아무래도 한국과 서울이 이야기의 배경일 때 마음이 편안하다. 예컨대 올리버와 클레어의 아파트는 처음부터 신축 아파트가 아닌 복도식아파트를 상상했다. 두 캐릭터가 살아가는 옆집이 꼭 붙어 있기 위해선 복도식아파트여야 했고, 이는 지극히 한국적인 공간 이다.

- <어쩌면 해피엔딩>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지만 무대를 채우는 요소는 자못 복고적이다. 무성영화 극장처럼 밴드가 무대 위에서 재즈풍의 넘버를 연주하고, 올리버는 바이닐 수집이나 종이 월간지 구독 등 아날로그의 낭만을 수호한다. 이웃해 사는 두 남녀가 승강이를 벌이다 서로에게 스미는 설정도 1930, 40년대 할리우드에서 유행한 스크루볼코미디 구성과 닮았다.

취향의 반영이다. 윌과 내가 할리우드 고전기의 영화를 애정한다. 이를테면 <어쩌면 해피엔딩>을 보고 연상할 법한 빌리 와일더의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는 가장 완벽한 각본을 갖춘 영화다. 당대 할리우드 영화의 정서는 작품 곳곳에 그득하다. 올리버를 연기하는 배우들에겐 로봇이라고 하여 팔다리를 직각으로 운용하기보다는 무성영화 속 찰리 채플린이 보이는 슬랩스틱의 질감을 만들어달라고 주지한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속 잭 레먼의 표정연기도 레퍼런스로 제공한 적 있다.

- 아무래도 <씨네21>의 독자들은 토니상에 비해 오스카상을 익숙하게 여길 테니 오스카에 비견해 토니상 전반을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토니상도 오스카처럼 수상을 하기까지 소위 캠페인이라고 불리는, 프로모션 일색의 시상식 레이스가 존재하나.

토니도 똑같다. 오스카를 노리는 작품들이 프리미어 상영을 통해 입소문을 낼 영화제를 정하는 것부터 캠페인을 시작하듯, 토니도 상을 받기 위한 전략이 중요하다. 또한 토니 직전에 뉴욕비평가협회상, 드라마리그어워즈 등의 비평가상이 있고 골든글로브처럼 기자, 출판 관계자로 심사위원단이 구성된 드라마데스크어워즈가 있어서 이 시상식의 결과를 지표로 호사가들이 토니의 향방을 예측한다. <어쩌면 해피엔딩>도 지난 2월부터 6월까지 토니 레이스를 달렸다. 비평가 시상식 사이마다 무수히 많은 만찬 행사를 다니며 수많은 이들과 악수했다.

- 한국엔 유사한 사례가 없어 더욱 낯설었겠다. 하나의 시상식을 향해 1년의 1/4을 달려나가는 일이니까.

예술은 절대적 준거를 들어 순위를 매길 순 없지 않나. 처음엔 순진한 마음으로 레이스에 접근했다. 캠페인 기간 중 가장 놀랐던 때가 후보작 프레스 데이다. 이미 토니를 받은 경력이 있는 연출가 마이클 아든이 프레스 데이 전날, 내일 입고 올 옷을 정했냐고 묻더라. 평소처럼 입겠다고 답했더니 그건 안된다는 답이 돌아와 급한 대로 심야에 영업하는 GAP 매장에 가서 면바지를 샀다. 그런데 우리를 제외한 다른 후보들은 스타일리스트에 퍼블리시스트까지 대동해 갖춰 입고 사진을 찍더라. 스스로가 초라해 그날 집에 돌아와 울었다. 나름 모범생 타입이라 주어진 숙제는 최선을 다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좋은 기회를 바보같이 놓쳤다는 생각에 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매체들이 화려하게 꾸민 후보들만 조명해주더라. 다음날부터 새옷을 사기 시작했다. 어워드 캠페인이 체질에 안 맞더라도 작품을 위해선 책임을 다해야 했다. 내가 후보에 오른 부문은 수상을 못하더라도 작품상을 못 받으면 공연 전체에 폐를 끼친다는 생각에 뭐든 열심히 했다.

- 그렇게 달려온 토니상에서 결국 <어쩌면 해피엔딩>이 6관왕을 했다. 모든 축하와 파티가 지나간 다음날 아침은 어떻게 맞았나.

미국 극장도 월요일은 쉰다. 일요일에 시상식 이 끝난 후 애프터파티와 <어쩌면 해피엔딩> 파티까지 마치니 새벽 네시 반이었다. 아침에 겨우 일어나 밥을 먹으려는데 당장 토니 트로피 두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우선 식탁 위에 트로피를 올려뒀다. 평소와 같은 일상에 토니상 두개가 덩그러니 올라와 있는 게 웃겨서 사진을 찍어뒀다. 정말 이상한 풍경이었다.

- 브로드웨이에서 여전히 <어쩌면 해피엔딩>이 공연 중이고, 올해 한국에서도 <어쩌면 해피엔딩>의 10주년 기념 공연이 오른다.

이번 <어쩌면 해피엔딩>은 보다 큰 규모의 극장으로 옮기며 공연의 비주얼 전반이 새로워질 예정이다. 대본과 음악은 그대로지만 배우들이 잡아갈 디테일도 달라질 것이다. 새롭되 기존의 <어쩌면 해피엔딩>을 사랑하던 팬들도 낯설게 느끼지 않을 공연을 올리는 게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