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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

이게 사랑일까? 처음 사랑을 느낀 상대는 엄마도 아빠도 아닌 여자 친구였다. 여자애들은 자라면서 여자 친구에게만 속삭인다. 꼭 너에게만 할 수 있는 비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아무도 몰라줬던 내 속마음은 꼭 그 애에게만 수신되었으니까. 내가 입을 열어 단어를 꺼내기만 해도 뒤이어질 다음 말을 잡아채서 겹치는 목소리로 “이 말 하려고 그랬지?”라고 대화의 바통을 낚아채던 여자 친구들. 그게 뭐 그리 웃긴지 끅끅대며 허리를 접고 웃어댔던 수다. 10대 소녀들이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다는 건 낭설이다. 낙엽이 굴러간다는 사실보다 소녀와 소녀가 함께란 사실이 앞선다. 이건 여자들만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교환일기를 가슴속에 방탄조끼처럼 품고 다른 반을 기웃대던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으니까.

릴리 댄시거의 우정에 관한 에세이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는 그의 여자 친구들, 그리고 자매애에 관한 책이다. 릴리는 언제나 여자 친구들에게 보호본능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불어 보호받았다고 쓴다. 왜 아니겠는가. 여자들은 어딘가의 신호를 살피며 나쁜 분위기를 감지하면 서로를 구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그 구조 신호를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멀리 사는 동안 릴리는 가장 사랑했던 사촌 동생 사비나를 잃는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내 행복만큼이나 온 힘을 다해 바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려준 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이 세상 그 무엇보다 짜릿한 감정”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사비나는 갓 스무살이 됐을 때 집 앞에서 낯선 남자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 책에는 사비나를 비롯해 브리트니, 셜리, 헤일리와 헤더, 리아와 리즈 등 릴리의 수많은 여자 친구들이 등장한다. 10대 시절부터 릴리를 자라게 한 여자들. 실연을 당하거나 약에 취하거나 가족이 죽어 삶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고 가슴팍까지 이불을 덮어주던 여자 친구들. 릴리가 친구들과 느꼈던 그 무수한 감정, 영혼의 결합을 보았던 충만한 시간을 여자 독자라면 다 제 것인 것처럼 읽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첫사랑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책은 우정에 대한 대서사시임과 동시에 너와 나의 사랑 이야기다.

낭만적 사랑에는 한번에 하나의 사랑만 한다는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자매애는 다수를, 겹침을, 맞물림을 허용한다. 사랑의 기준이 되는 첫사랑은 그 뒤를 따르는 모든 다른 사랑들 곁에서 계속된다. 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