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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빛과 실>

한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5박6일 일정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오는 짐을 싸면서 한강의 <빛과 실>을 넣었다. 150여쪽에 불과한 이 책을 읽는 데 5박6일은 너무 짧았다. <빛과 실>은 머릿속에 있는 한강의 모든 소설과 함께 읽어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일년, 길게는 칠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 작업은 한강의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좋았다”고 한강은 쓴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의 아름다움.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는 일. (대답을 찾아내서가 아니라) 질문들의 끝에 이르러서야, 소설을 완성할 수 있음을 인식하기. 소설을 시작하던 때와 같은 사람일 수 없는 누군가가 되기. 질문을 포개고, 책을 쌓아가기. <빛과 실>에는 그러한 소설 쓰기에 대한 경험이 차례로 언급된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안에 있다”. <바람이 분다, 가라>의 질문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희랍어 시간>으로는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라고 묻는다. 빛과 따스함의 세계로 나아가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그때, 그런 소설을 쓸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를 인식한다. 5월 광주에 대한 기록사진을 본 일이 기억에 틈입한 것이다. “오래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소년이 온다>를 읽은 독자라면 이 질문에서 이미 마음이 무너지는, 쓰러지는,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을 믿을 수 있음을, 그 깨달음이 주는 깊은 슬픔에 목 안에 울음이 맺힐 것이다. <빛과 실>의 서두에 실린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의 내용이다.

“울면서 쓴다.” 그럼에도 “어떤 트랜스 상태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매 순간 분명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고통을 명료한 정신으로 견디면서, 조금도 미치지 않은 상태로 책상 앞에 앉는다. 정원의 여린 이파리들을 돌보고 매일 다르게 봉오리 가 맺고 피어나는 불두화의 상황을 일기에 기록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한강은, 글쓰기를 빼면 재미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참 좋다는 생각을 하며, <빛과 실>을 읽어간다.

생명을 말하는 것들을, 생명을 가진 동안 써야 하는 것 아닐까? 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