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티넨탈 ’25> - 개막작
라두 주데/루마니아, 스위스, 룩셈부르크, 브라질, 영국/2025년/109분
오늘도 우리의 도시는 조용히 사람을 청소 중일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시켜? 당대 유럽 감독 중 세계 앞에 가장 격분한 인물일 라두 주데는 충격으로 일갈하는 새 풍자극을 통해 이 질문을 대신한다. 재개발이 한창인 루마니아의 도시 클루지, 법학자 오르솔야(에스터 톰파)는 실직 후 집행관으로 일한다. 그의 새 임무는 독일 부동산 기업이 사들여 콘티넨털이란 이름의 부티크 호텔로 재건축 예정인 낡은 아파트를 철거하는 것이다. 그곳 지하실에는 한 남성 노숙인이 산다. 오르솔야는 곧 자신이 퇴거시킨 이가 자살한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유로파 51>(1952, 아들의 자살 이후 자선 활동을 시작한 여성을 그렸다)을 비튼 <콘티넨탈 ’ 25>는 신자유주의적 횡포 앞에 공모자로 전락한 이가 펼치는 참회의 발라드다. 오르솔야가 다양한 투숏의 대화 상대 앞에서 속죄를 되풀이해도 구원은 요원해 보인다. 아이폰으로 영화를 촬영한 라두 주데는 주인공의 구차한 양심 고백 위로 열화된 미감을 양껏 입혔다. <배드 럭 뱅잉>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등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해 내러티브는 간결해졌고 절망의 순도는 높아졌다. <콘티넨탈 ’ 25>를 본다는 것은, 목구멍에 걸린 비극의 가시를 웃음소리로 토해내는 혼란스러운 체험이다. /김소미
<기계의 나라에서> - 폐막작
김옥영/한국/2025년/92분
이주노동자 130만 시대. 타지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온 이들에게 한국은 기회의 나라에서 ‘기계의 나라’로 서서히 탈바꿈한다. 40여년간 방송·영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김옥영 감독은 그 변태의 주기를 응시하는 방법으로 화면에 시를 새겼다. 네팔에서 교사, 은행원, 언론인으로 살던 딜립, 수닐, 지번이 한국 농장과 공장에서 일하는 와중에 쓴 시를. 그들은 시어를 고르고 고르며 인간 아닌 무엇이 된 듯했던 감각을 되살리고, 꿈이라는 주제 앞에 ‘어리석은’과 ‘이상한’이라는 표현을 붙여 오래전 품은 희망이 무색해져버린 나날을 박제한다. 동인을 꾸려 낭독 모임과 시집 출간도 겸해온 이들은 자신들의 글이 생존자의 증언이자 네팔 문학의 한 갈래로서 기록돼 다음 세대에 전해지길 원한다.
영화는 그전에 동시대 스크린 너머로 말을 건다. 한국인은 외국인을 기계처럼 다룬다는 토로에 한국인끼리도 서로를 기계처럼 여긴다고 응수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깊은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건조한 톤으로 되풀이되는 이주노동자 부고 소식은 관객조차 일터에서의 죽음에 익숙해져버린 게 아닌지 자문하게 한다. 분초를 다투며 업무에 매진해야 되는, 나와 동료들의 건강을 망가뜨리는, 나아가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는 이곳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먼발치에서 내린 분석이나 진단과는 비교할 수 없이 사무치는 시구들이 분노를 등에 업은 통찰을 들려줄 것이다. /남선우
<그래도, 사랑해.>
김준석/한국/2025년/95분/한국경쟁
연극배우 부부인 준석(김준석)과 소라(손소라)는 조용한 전쟁 중이다. 둘 다 어린 아들 하람(김하람)이 무척 소중하지만, 준석은 좋은 작품의 배역 제안을 놓치고 싶지 않고, 소라는 독박 육아에서 벗어나 얼른 무대에 다시 서고 싶다. 누구에게 안과 바깥의 노동을 맡길 것인가. 고심하던 부부는 둘만의 오디션을 열어 더 좋은 연기를 한 사람에게 배우의 기회를 주기로 한다. <그래도, 사랑해.>는 자기 일상을 재료로 삼는 김준석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다. 단편 <그래도, 화이팅!>과 <그래도, 행복해.>에서 낙담하지 않는 마음이 이번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지켜진다. 육아의 몫은 좀체 여자에게서 남자에게로 옮겨가지 않고, 고부갈등은 미묘하게 계속된다. 반성하고 달라지겠다는 감독의 태도 덕분에 세 가족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게 만든다. /이유채
<캐리어를 끄는 소녀>
윤심경/한국/2025년/110분/한국경쟁
양부모에게 버려진 15살 영선(최명빈)이 캐리어를 끌고 들어간 곳은 또래 수아(문승아)의 집이다. 영선은 그곳에서 수아의 테니스 훈련 파트너를 하며 숙식을 해결하려 한다. 잠시 머물 생각이었던 마음은 점차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갈망으로 바뀌고, 영선은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그런 영선의 애씀을 감지한 수아는 점점 그녀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캐리어를 끄는 소녀>는 소속과 연결을 바라는 한 소녀가 한 가족의 내부로 파고들기 위해 쏟아내는 안간힘을 따라간다. 영선의 감정을 받는 수아네 가족의 반응도 골고루 담아 입체적이고 정교한 구조로 완성된다. 최명빈, 문승아 배우의 얼굴도 이 영화의 놓칠 수 없는 포인트다. /이유채
<호루몽>
이일하/한국, 일본/2025년/99분/전주시네마프로젝트
재일교포 1세 이백란, 2세 케이코, 그리고 3세 신숙옥. 일본인이 남긴 부속 고기를 구워 먹던 조선인의 음식 문화를 제목 삼은 이 영화는 시작과 함께 여성 3대의 초상을 비춘다.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해온 그들 중 신숙옥은 활동가로서 방송 출연과 칼럼 기고를 지속하며 차별에 맞서왔다. 지진 피해를 입은 노토반도를 찾아가고, 오키나와 평화운동에 동참하는 등 타인의 고통에도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 행보는 극우 논객을 내세운 시사 프로그램에서 거짓 정보와 엮여 억측의 대상이 되고, “살기 위해 싸우고, 살아 있기 때문에 싸워온” 신숙옥은 방송국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시작한다. 대의와 일상을 부드럽게 잇는 화면에 꼿꼿한 진심을 새겨넣은 다큐멘터리. /남선우
<클리어>
심형준/한국/2025년/67분/코리안시네마
1부 다큐멘터리와 2부 픽션이 하나의 흐름으로 엮인 작품.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잇는 연결고리는 가수이자 배우인 김푸름이다. 호기심 많고 활달한 18살 아티스트는 국제 환경 감시선 레인보우워리어호에 올라 그린피스 활동가들의 일상을 경험하고, 이후 건너간 픽션 세계에서는 플라스틱을 먹고 사는 외계인들(이주영)을 만나 그들의 지구 여정을 인도한다. 그린피스 인터내셔널, 매거진 <오보이!>, 그리고 후지필름이 합작한 <클리어> 프로젝트는 제목처럼 명료하고 또렷하게 환경오염 문제를 조명한다. 쓰레기, 오염, 그리고 기후 위기라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문제가 필름 카메라 특유의 질감을 통해 새롭게 감각되는 경험이다. 플라스틱 시대를 살아가는 신인류를 위한 우화다. /남지우
<속초에서의 겨울>
코야 카무라/프랑스/2024년/106분/월드시네마
속초에서 게스트하우스 매니저로 일하는 25살 수하(벨라 킴)는 지금 삶에 안정을 느낀다. 어느 날 프랑스인 숙박객 케랑(로쉬디 젬)의 안내를 전담하면서 수하의 마음은 뒤숭숭해진다. <속초에서의 겨울>은 타인을 궁금해하는 과정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 여자에게 주목한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수하는, 케랑과의 만남을 통해 한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를 상상하고, 퍼즐처럼 느슨하게 흩어진 자신의 정체성을 조심스레 맞춰본다. 이 작품은 속마음을 시각화하려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흔한 자아 찾기 영화와는 결을 달리한다. 혼란스럽고 뒤엉킨 감정을 형식적으로 표현하려는 감독의 사력이 이야기의 밀도를 높인다. /이유채
<너와의 거리>
크리스토퍼 페팃, 에마 매슈스/핀란드/2025년/89분/마스터즈
영화감독 부부와 20대 아들이 함께 떠난 핀란드 기차 여행. 평범한 가족 여행처럼 보이는 여정에는 아들 루이스가 12살부터 겪어온 뇌전증의 흔적이 배어 있다. 공동 감독이자 부모인 크리스토퍼 페팃과 에마 매슈스는 루이스의 발작, 기억, 그리고 성장의 조각들을 고전영화와 흑백 애니메이션, 홈비디오의 이미지들과 뒤섞어 한편의 필름 에세이로 엮어낸다. 질병 자체에 서사나 인과를 부여하기보다는 감각의 층위로 그것을 느끼게 하겠다는 시도는 예술가의 것이다. 질병이라는 우연과 시스템이라는 필연 속에서 루이스는 삶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다. 감독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식이 잃어버린 시공간을 이미지로 꽉꽉 채워내는 것. 신경계를 충격하는 사랑의 언어다. /남지우
<브라질 대선의 기록>
산드라 코구트/브라질/2024년/106분/다시, 민주주의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오른 자국 영화 <계엄령의 기억>(전주영화제에서 한국 최초로 상영된다) 수상을 염원하며 거리 응원을 나온 브라질 사람들의 환희와 눈물을 기억한다. 축구가 그렇고 영화가 그렇듯 브라질에서는 정치 또한 그 무한한 열정의 무대가 된다. 산드라 코구트 감독은 2022년 10월 대선부터 2023년 1월 브라질리아 국회의사당 점거 사태까지 자신이 믿는 바를 세상에 관철시키기 위해 거리로 나선 유권자들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노동자당의 룰라와 자유당의 볼소나루, 전현직 대통령의 대결로 치러진 이 대선은, 우리가 경험한 최근의 선거들을 떠올리게 할 만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축적해온 내공을 믿고 따르자는 진보 진영과 선거 자체에 대한 막연한 반감 속에 종교적 신념과 결합해 움직이는 극우 진영이 이루는 평행 구도는 브라질과 한국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상일 뿐 아니라 전세계적 흐름의 일부임을 시사한다. 계엄과 탄핵의 시간을 지나 또 한번 대선을 앞두고 있는 한국 관객들을 위해, 전주영화제가 특별 섹션 ‘다시, 민주주의로’에서 선보이는 이 영화는 브라질 국가의 문구를 제목으로 빌려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를 믿지 않는 자들의 염원은 하늘로 향하고, 민주주의를 믿는 자들의 염원은 땅으로, 거리로 향한다. 그 간극은 우리가 광장에서 보내온 수많은 낮과 밤을, 정치적 긴장 속에서도 결코 놓지 않았던 축제의 본능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남지우
<폐허에서 파쿠르>
아리브 주아이테르/스웨덴,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팔레스타인/2024년/90분/프론트라인
파쿠르는 목숨을 걸어야만 할 수 있는 스포츠로 비친다. 고층 건물을 기어오르고, 옥상 사이를 뛰어다니고, 도로 위에서 공중제비를 도는 특유의 동작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과 염려를 동시에 자아낸다. 역설적이게도 가자 지구에는 이 위험한 기예를 이용해 생존을 도모하려는 청년들이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외국에서 열리는 대회에 초청받아 그곳에 정착한 사례를 동경하며 영상을 업로드해왔다. 2015년 그들의 영상을 접한 아리브는 파쿠르팀에 소속된 아흐메드와 연락하며 친구가 되고, 아리브는 아흐메드로 인해 팔레스타인과 어머니에 대한 향수 어린 기억을 떠올린다.
<폐허에서 파쿠르>는 미국 워싱턴 DC에 살고 있는 아리브 주아이테르 감독이 가자 지구와 스웨덴을 넘나드는 팔레스타인 청년 아흐메드와 우정을 맺으며 완성한 다큐멘터리다. 2015년에서 2023년에 이르기까지, 감독이 자신을 촬영한 컷들과 아흐메드가 보내온 컷들을 차분히 엮어낸 덕분에 영상 편지로 소통하는 현장을 목격하는 듯한 감상을 준다. 그 안에는 감독이 피하고 싶었던, 그러나 잊을 수 없었던 현실이 녹아 있고 영화 내부에 흐르는 번뇌는 관객에게도 스며든다. 추락해도 안전한 모래언덕에 반복적으로 몸을 던지는 소년들. 그 모습이 담긴 영상 재생이 끝난 뒤 검게 변한 노트북 모니터가 거울이 될 때, 눈 맞춤을 피하지 않는 카메라가 미덥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서도 상영되었다. /남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