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근사한 제목이 또 있을까?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은 관람 전 일단 제목에 반하고 보는 영화다. 그리고 관람 후에는 이 제목이 성립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찬찬히 되짚어보게 만드는 영화다. ‘우리’를 위해선 다수의 주인공이, ‘빛’을 위해선 어둠이 그리고 ‘상상’을 위해선 현실이 필요하다. 인도 뭄바이의 병원에서 근무하는 세 간호사 프라바(카니 쿠스루티), 아누(디브야 프라바), 파르바티(차야 카담)가 영화의 주인공이니 ‘우리’는 손쉽게 찾을 수 있다. 그다음 단계는 빛과 어둠, 상상(픽션)과 현실(논픽션)이 어떻게 영화 속에서 움트고 흐르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이 두 대립항은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뿐 아니라 영화를 쓰고 연출한 감독 파얄 카파디아의 세계를 여닫는 열쇠가 된다.
햇빛 아래 꿈을 꾸다
빛을 낮으로, 어둠을 밤으로 치환한다면 파얄 카파디아의 영화 속 낮은 꿈을 위해, 밤은 시를 위해 마련된 시간이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속 세 여성은 뭄바이 출신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인도 내 꿈의 도시인 뭄바이로 이주해왔고, 낮은 세 사람이 꿈을 이루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을 해야만 하는 시간이다. 한 직장에서 일하지만 이들 각자는 서로 다른 골머리를 앓고 있다. 프라바는 독일로 간 이후 연락이 두절된 남편이 그리운 동시에 룸메이트인 아누가 어쩐지 못마땅하고 동료 파르바티가 처한 문제를 도우려 애쓴다. 프라바보다 어린 아누는 힌두교에서 금하는 무슬림 남성 시아즈(흐리두 하룬)와 공공연히 연애할 수 없다. 프라바의 인생 선배인 파르바티는 20년 넘게 산 아파트의 실거주를 입증할 서류와 소유주인 남편이 세상에 없다는 이유로 강제퇴거 위기에 놓인다. 꿈의 도시는 자본, 계급, 심지어 (사랑할) 자유 중 어느 하나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들은 “덧없음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영화 초반 어느 뭄바이 시민의 내레이션처럼 무상함을 체화한 채 살아갈 뿐이다. 인도 사회를 지배하는 남성 우위의 정상 이데올로기 또한 이들의 꿈을 무력하게 한다. 아내는 소식이 끊긴 남편을 불만 없이 기다려야 정상이고, 젊은 여성이 집안끼리 점지한 남성이 아닌 자와 데이트하는 건 비정상이다. 남편이 죽으면 여성의 주거권이 사라지고, 남자 친구가 사는 동네에선 신념과 성정 모두에 맞지 않는 부르카로 얼굴을 가려야 안전하다. 꿈을 꿀 새 없던 세 여성의 낮은 뭄바이를 벗어나 파르바티의 고향인 바닷마을 라트나기리로 향하는 영화의 3부에 이르러 몽상의 시간을 갖는다. 꿈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꿈을 꾸는 듯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선 파르바티에겐 살 곳과 새 직장이 주어지고, 아들보다 살가운 프라바와 아누의 도움이 제공된다. 프라바는 직업 정신을 발휘해 낯선 남자를 바다에서 구조하는데, 후에 이 남자의 육체를 경유해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아누는 몰래 함께 온 시아즈와 자유롭게 몸과 맘을 섞을 수 있다. 러닝타임 1시간을 차지하는 뭄바이 속 세 여자의 낮과 밤은 5일에 걸쳐 균등하게 전개된 반면, 그다음 1시간에 달하는 라트나기리의 하루는 낮이 압도적으로 길고 밤이 짧다. 꿈을 이루려 방문한 도시의 빛은 이들을 재촉하기에 급급하지만 그곳을 벗어나면 꿈만 같은 단 하루의 빛이 세 여성의 낮을 평화롭게 수놓는다.
파얄 카파디아의 낮은 언제나 여성들의 백일몽을 위한 시간이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속 몽환적인 시간이 프라바와 아누의 낮잠 이후 이어진다는 걸 생각하면 카파디아의 세계는 이룰 수 없는 일의 대리 충족이 꿈을 통해 비로소 실현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단편 <오후의 구름들>(2017)의 노인 카티와 그의 요양보호사 마티는 창문 사이로 햇빛이 스미는 한낮에 함께 잠이 든다. 카니는 꿈에서 죽은 남편을 만나고, 마티는 배를 타러 떠난 고향의 연인을 만난다. 단편 다큐멘터리 <그리고 여름이 말하는 것>(2018) 속 노파는 꿈에서 결혼하는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며 흐뭇해하고 <장맛비 내리기 전 마지막 망고>(2015) 속 여성은 자신을 떠난 남편이 꿈에 등장하자 대뜸 요리해 달라고 부탁한다. 볕이 쏟아지는 한낮의 잠. 그 찰나가 선사하는 혼곤한 꿈결이 카파디아의 빛을 이루는 주요 테마다. 카파디아는 자신의 연출작에 꿈의 모티프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로 가족을 꼽는다. 그는 정신분석학자인 아버지와 유년기부터 꿈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고, 영화학도 시절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고인이 된 할아버지가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오는 꿈을 꾸는 데에서 꿈의 영화적 구현 가능성을 포착했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에도 노년의 여성 환자가 프라바에게 남편에 대한 악몽을 털어놓는 장면이 등장한다. 당연히 그 환자의 고백은 낮에 이루어진다.
달빛 아래 언어를 만지다
파얄 카파디아의 밤은 불안의 총체다. 카파디아의 분신들은 그 밤을 시와 이야기로 지샌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속 프라바는 한밤중 독일에서 온 전기밥솥을 끌어안고 남편을 향한 분노와 그리움을 표출하며 고독을 달랜다. 아누와 시아즈는 밤새 거리를 헤매며 세간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눌 으슥한 곳을 찾지만 대도시는(또는 인도 사회는) 결혼하지 않은 두 남녀가 동침할 공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매일 비바람이 들이쳐 숙면조차 할 수 없는 밤, 프라바는 어둠 속에서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가 자신을 위해 써준 시집을 들춘다. “난 그 빛을 보며 밤에도 온기를 느껴요”라는 뭄바이 의사 마노지(아지스 네두망가드)의 시는 남편의 영혼이 빙의된 라트나가리의 남자의 “어둠 속에선 빛을 상상하려고 해도 잘 안되거든요. 그래서 당신을 생각했어요”라는 시적인 고백과 맞물려 프라바의 심란을 가중한다. 아누와 시아즈는 밤이 되면 활력을 찾는 군중 사이에서 끝없는 대화를 나누기를 택한다. 밤마다 반복되는 두 연인의 배회는 영화 전체에서 다섯 차례 반복되는 ‘뭄바이의 밤’의 각운을 맞춘다. 이들은 밤마다 사랑에 실패하고, 그럼에도 다음날 밤 CCTV를 피해 손을 잡을지언정 사랑하길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름이 말하는 것>의 밤은 불길하다. 칠흑 같은 어둠 위로 형체가 없는 여성이 시골 마을에 얽힌 신과 인간에 관한 민담을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펼친다. 이어 형체는 있지만 목소리는 없는 한 남자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숲의 전설을 자막(텍스트)으로 풀어놓는다. 음성과 문자로 양분돼 전해지는 이야기는 자연 아래 살아가려는 인간을 보호하고 위무한다. 카파디아의 전작인 다큐멘터리 <무지의 밤>이 불온한 인도 내 시위 풍경을 틈타 전하는 이야기는 영상 이론이다. 쿨레쇼프와 푸돕킨, 에이젠슈테인 등 소비에트 몽타주 실험가들의 이론을 뉴스와 신문 몽타주 시퀀스에 덧입힌 영화는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같은 사상을 공유하는 이들이 연대하여 영화를 만드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되묻는다.
한편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의 인물들이 밤마다 뭄바이에서 느끼는 인물들의 근원적 고독은 시와 이야기의 질료인 언어를 통해서도 형상화된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밤과 새벽 사이의 시간. 뭄바이의 이주민들은 벵골어, 구자라트어, 말라얄람어 등 다양한 언어로 끝내 완전히 포용될 수 없는 도시 뭄바이를 향한 애증을 표현한다. 마노지는 힌디어를 배워 프라바와 뭄바이의 환자들에게 가닿고자 하지만 그는 양자 모두에 실패해 뭄바이를 떠난다. 하지만 함께 빛의 꿈을 꾸는 자들은 서로의 의중을 통감한다. 영어를 혼합해 사용하는 프라바의 말을 아누와 파르바티는 깊이 이해하고, 아누는 말라얄람어에 능통한 시아즈의 말을 듣고 감동한다. 반복하자면 파얄 카파디아의 하루는 꿈과 시로 채워진다. 카파디아는 2017년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매혹하는 소재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감을 위해 무언가를 멀리 볼 필요는 없다. 우리의 삶은 꿈과 기억을 포함한 시적인 가능성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상상과 현실 사이를 꿰매다
파얄 카파디아의 영화는 종종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미지가 연속 나열돼 별개의 맥락을 만들거나 내화면과 무관한 사운드를 의도적으로 중첩한다. 이중 후자는 픽션을 논픽션으로, 논픽션을 픽션으로 혼동하게끔 유도하는 카파디아의 고유 기술이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엔 뭄바이에 사는 다양한 이주민들의 목소리가 담기고, 화면은 다큐멘터리처럼 뭄바이의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담는다. 뭄바이와 라트나기리에서 벌어지는 픽션(세 여성의 이야기)으로 진입하기 전 뭄바이의 현실을 다루는 이 다큐멘터리 시퀀스는 허구와 실재를 혼합한 결과물이다. 푸티지는 실제 뭄바이의 일상을 담은 반면,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카파디아가 시민들의 취재를 토대로 배우를 고용해 재구성한 ‘대사’이기 때문이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자연스럽게 잇는 이음매마저 픽션과 논픽션을 혼재해 구성한 결과다. 이는 <무지의 밤>에서 활용된 바 있는 방법론이다. 인도의 영화 학교에서 학생들이 벌이는 동맹휴학과 반정부 시위의 푸티지를 담은 <무지의 밤>은 투쟁의 현장을 소리로 들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언어와 소리는 감독이 직접 창작한 영화학도 L의 러브레터로 채워졌다.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가 공교육과 사회에 미친 여러 악습과 이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투쟁을 다룬 공적 다큐멘터리가 지극히 사적인 1인의 내밀한 기억으로 치환돼 픽션이 되고, 시각과 청각 사이에 의도적인 이격을 두며 전혀 다른 의미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카파디아는 “영화의 사운드는 묘사적(illustrative)이기보단 환기적(evocative)일 때 더욱 흥미롭다”고 말한다. 이미지와 사운드가 실재와 허구, 단절과 연결을 오갈 때 관객이 머릿속에서 새로운 몽타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한편 카파디아는 자신에게 창작적 자유를 선사한 영화로 크리스 마르케의 다큐멘터리 <태양 없이>(1983)를 언급했다. 카파디아의 영화과 졸업 논문에 연구 제재로 활용된 다큐멘터리 두편은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의 <정오의 낯선 물체>(2000)와 미겔 고메스의 <친애하는 8월>(2008)이다. 세 영화 모두 사실의 기록이라는 다큐멘터리의 명제에 반기를 드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억과 망각과 역사에 관한 시네아스트 개인의 주관적 사유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카파디아의 세계와 무척 닮았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의 국적은?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인도, 프랑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이탈리아 공동제작 영화다. 한데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까지 받아 오스카 국제영화상까지 노려봄 직한 이 영화를 어느 국가도 오스카 후보작으로 출품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에밀리아 페레즈>를,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는 각 국가의 인물이 주인공인 영화를, 룩셈부르크는 아예 후보작 리스트를 선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도는 왜? 인도는 올해 국제영화상 후보작으로 키란 라오의 <뒤바뀐 신부들>을 선정했다. 인도영화연맹(FFI) 회장인 라비 코타카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인도영화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심사위원들은 <뒤바뀐 신부들>이야말로 인도 여성들의 현실을 대변한다고 확신했다”고 밝혔다. <뒤바뀐 신부들>은 오스카 국제영화상 최종 후보에 안착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