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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사유의 인덱스에서 여백의 감각으로 -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와 호나스 트루에바의 세계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어떤 영화가 이론과 담론의 언어를 전면에 내세울 때 감상과 해석에도 해당 언어를 그대로 가져오는 일은 피해야만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호나스 트루에바 감독의 영화는 사유의 이론적 표식을 언어로 전달하더라도 그 지표만을 따르는 시도는 오히려 그의 영화 세계에서 더 멀어질 수 있다. 이는 영화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영화의 감각이 바깥을 향해 열릴 때 그 여백에서 트루에바의 세계를 받아들일 가능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호나스 트루에바의 영화는 만드는 이의 축적된 경험과 통찰, 영감과 직관으로 짜여진 영화다. 영화적 우연을 허용하는 트루에바의 일상성은 그의 영화가 상기시키는 다른 영화들과도 유사점을 공유하지만 트루에바의 영화는 일상과 우연이 기억의 풍경을 직조해낸다는 점에서 독자적이다. 따라서 그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의미의 수집과 해체 후 다시 조립하는 방식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렵다. 호나스 트루에바의 영화를 제한된 화면에서 벗어나 그 화면 바깥의 궤적 사이를 떠돌다보면 어느새 여백에서 구성된 사유를 마주하게 된다. 한 영화에서 다른 영화로 건너가며 이어지는 그 영화의 흐름은 기억 속 지금의 풍경을 더듬어 탐색하다(<어거스트 버진>), 세계로 다가가 감각을 열고(<와서 직접 봐봐>), 마침내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에서 프레임에서 벗어나 있는 보편 기억의 흔적을 환기한다. 호나스 트루에바 영화의 본질은 세계와 기억을 향해 감각을 열어젖히는 접근에 있다.

세계와 기억을 어루만지며 산책하는 사람들

<와서 직접 봐봐>

지난 일을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은 호나스 트루에바가 고정된 화면 안에 붙들어놓은 기억을 떠올리는 공통의 얼굴이다. <어거스트 버진> 의 에바는 피서를 떠난 사람들로 텅 빈 것이나 다름없는 마드리드에 남는다. 짧은 여행을 제외하곤 마드리드를 떠난 적 없는 그는 이 도시를 처음 탐색하듯 산책한다. 물질세계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거리를 걷는 산책처럼 에바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스치듯이 옮겨간다.

에바의 산책은 목적 없이 떠돌다 도심이 남긴 흔적들을 되짚는 느긋한 여로처럼 그려진다. 여기서 시간은 성실하게 날짜를 기록한다. 낮에서 다음날 낮으로의 이동은 크게 점프하더라도 밤에 깨어 있는 에바의 자정은 반드시 가름된다. 낮보다 밤의 시간이 인식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정처 없는 발길에 어떤 이를 향한 그리움이 있어서일 테다. 우연히 전 연인과 영화관에서 마주친 이후 에바는 그날을 일기에 기록하고 음성으로 그것을 읽는다.

피아노곡을 감상하는 엘레나의 얼굴로 시작하는 <와서 직접 봐봐>는 연인 사이인 엘레나와 다니엘의 얼굴을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에바와 엘레나 역을 맡은 잇사소 아라나가 트루에바의 영화에 잇따라 연인이자 주인공의 자리에 출연하며 연결성을 지니기 때문에 엘레나의 표정과 얼굴은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들의 전사가 이미 완결되었다는 인식을 전한다. 피로한 과거를 곱씹고 있을 거라는 인상을 환기하는 이는 다니엘 역으로 등장하는 비토 산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 배경이 코로나19 팬데믹이었기에 <와서 직접 봐봐>의 대화 테이블에서는 관계의 미묘한 단절이 탐지된다. 신경 쓰이는 대화 사이의 짧은 침묵들은 엘레나와 다니엘이 친구 커플인 수사나와 기예르모와 함께 숲으로 산책하러 가며 전환을 맞는다.

도시에서 시골, 시골에서 자연으로의 산책은 팬데믹 시대에 고립된 개인의 세상에서 빠져나와 마침내 경험으로 체화할 수 있는 세계로의 이동을 이뤄낸다. 푸르름이 절정에 달한 나무 사이로 이들 넷은 대지를 쓰다듬듯 천천히 세계와의 연결을 향해 조용히 열린다. 세계를 향해 열린 물리적, 감각적 연결의 의미는 트루에바의 현재의 영화적 지형도와도 연결될 수 있다. 누군가에는 에릭 로메르를, 우디 앨런을, 홍상수를 떠올리게 하는 텍스트와 감각의 지형은 비물질적 세계로의 경계마저 열어젖힌다. 디지털 시대에 트루에바의 영화에 재등장한 산책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책을 읽고, 수기를 쓰고, 필름 카메라로 기억을 남긴다.

다시 <와서 직접 봐봐>의 끝에 엘레나의 얼굴이 카메라 가까이 포착된다. 풀숲에 비밀스럽게 쪼그려 앉은 엘레나의 얼굴은 현재 그가 느끼는 행복감이나 과거의 기억, 혹은 이후 드러나는 영화 촬영의 엔지 장면의 하나로 보이게 된다. 트루에바의 영화가 말을 멈추고 사유의 언어를 직접 지시하지 않을 때 화면을 초월한 어떤 감각은 우리가 보거나 보지 않은 보편의 경험과 기억을 불러내 데자뷔 현상과도 유사해진다. 헤어진 연인과 아버지가 없는 아이(<어거스트 버진>), 유산된 아기(<와서 직접 봐봐>)는 모두 과거엔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것을 향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파편적 예시다. 트루에바의 영화에서 롱테이크숏은 가만히 지켜보다 의미가 떠오르기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지금 보고 있는 것 이외의 것을 떠올리고 환기하며 지속되는 시간이다.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얼굴 너머를 지켜보는 트루에바의 롱테이크는 <어거스트 버진>에서 얼굴만 있는 조각상의 불완전성이 가진 완전성을 공유한다.

틀린 예감의 영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어거스트 버진>과 <와서 직접 봐봐>에 비해 실험 정신이 크게 도약하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는 이것이 영화임을 일깨우려는 방편을 드러낸다. 카메라의 대담한 전환과 점진적인 클로즈업 구도가 그것이다. 오래된 커플 알레(잇사소 아라나)와 알렉스(비토 산스)는 이별을 결심한다. 서재에 합쳐둔 책을 나누던 알렉스는 알레에게 연기 영상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창가에 마주 보고 앉은 알레는 헤어질 연인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는다. 여러 번 테이크를 시도하던 알레가 화면 밖에서 말한다. “빛이 계속 달라져서 좀 어렵네.” 알레의 이 대사 이후 조금 전까지 미세하게 변하던 빛의 밝기가 갑자기 큰 폭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알렉스의 얼굴에 들이치는 창밖의 빛은 이제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한다.

이 장면은 <와서 직접 봐봐> 엔딩의 엘레나의 얼굴과 유사하게 화면에 드러난 알렉스의 얼굴과 대사 이상의 것을 포착할 가능성을 여는 지점이다. 이 숏은 알렉스의 대사와 표정에서 드러나는 정서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화면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빛의 조도 변화를 머릿속에 그려보게끔 한다. 이를테면 오후의 해가 구름에 가려졌다 드러나기를 반복하는 바람 잦은 날이나 헤어지기로 한 오랜 연인 앞에서 작별의 대사를 연기하는 알렉스는 무엇을 떠올리고 있었을까, 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고정된 프레임은 화면의 다른 층위에서 내적 풍경이 환원되어서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트루에바의 영화는, 잇사소 아라나와 비토 산스의 얼굴은, 화면 밖의 상상적 층위에서 지금 영화의 화면이 가지지 못한 것을 관객이 환기하여 그려낼 수 있느냐를 실험 중이다.

이런 실험이 가능한 이유는 호나스 트루에바가 다루는 세계가 보편적 경험인 연인 관계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까지 세편의 영화가 공유하는 지점은 사적이지만 친밀한 보편적 경험의 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레와 알렉스 커플이 이별을 선언할 때마다 친구들은 개성적 개별 인간인 알레와 알렉스의 고유한 서사가 아니라 인간 보편의 연애사를 떠올리는 것이다. 영화의 화면 안에서 말과 이미지의 물질적 흔적으로 고정될 수 없는 이별과 재회로의 기억은 그것이 보편적 세계이기에 가능함을 다시 강조한다. 지인 중에서 가장 처음 이별제에 초대받은 밴드의 드러머 마누는 휴대폰 저편에서 알레와 알렉스에게 말한다. “이런 일은 끝이 늘 같아. (중략) 너희는 다시 합치게 될 거야.”

트루에바가 언어의 인덱스로 ‘반복’ 개념을 영화에서 강조할 때, 그 지표를 피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반복과 유사한 개념인 ‘축적’이 떠오른다. 영화는 이별의 선언과 파티 초대를 거듭하는 알레와 알렉스의 말을 쌓아올리고, 그들의 헤어짐이 무산될 거라는 주위의 기대를 쌓아올리다 결국에 그 반복(축적)의 감각을 어그러뜨린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의 전반에 걸쳐 구성된 감각의 지도는 그들의 이별제(離別祭)가 열리고 나서야 영화가 이미지의 반복과 축적이 아니라 어긋난 예감을 쌓아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순환적 시간과 선형적 시간을 지시하며 시간의 혼란한 감각을 안기려 한 트루에바의 영화는 마지막까지 이 이별제를 결혼식이라 칭하는 거대한 농담을 선언한다. 이 결말은 절대로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농담이고 누군가에는 진실일 이 결말은 관객의 기억과 사유가 있는 자리마다 낯설고 새로운 방향으로 계속해서 열릴 것이다.

나의 의식(儀式), 우리의 축제(祝祭)

‘우리’와 ‘나’는 호나스 트루에바의 세계를 이루는 거대한 두축이다. 연인이거나 친구, 가족이 되기도 하는 우리는 어느 하나가 사라져도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사라진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어거스트 버진>의 에바는 헤어진 연인을 마주친 영화관에서 만월 의식을 행한다는 두명의 마리아를 만난다. 8월 성모제가 한창인 마드리드에서 에바는 자신만의 조용한 의식을 거행한다. 연인과 헤어져 혼자 박물관을 거닐던 에바의 친구 루이스는 마드리드로 여행 온 관광객과 함께 밤의 유성우를 보러 간다. 우리의 축제는 여름밤처럼 따뜻하고 부드럽다.

그렇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언제나 즐겁고 평온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교류가 끊겨 어색해진 친구 수사나 커플을 만나고 난 뒤에 지친 엘레나는 집으로 돌아와 천천히 양말을 신으며 일상의 의식을 치른다. 오래 함께 공유한 책장에서 서로의 책을 꺼내어 나누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의 알레와 알렉스도 기억을 확인하며 신성하고 슬픈 나의 의식을 거친다. 트루에바의 영화에서 ‘나의 의식’과 ‘우리의 축제’는 서로를 침범하거나 흡수하지 않는다. 그 둘은 각자 흔들리는 감정을 동등하게 떠올리며 고요히 공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