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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위한, 깊은 어둠의 필요 - 봉준호 감독 인터뷰 ➀

- 그동안 <미키 17>의 개봉 일정을 따라 전세계를 순회하셨죠. 관계자들 사이에서 과로하는 ‘준호 17, 준호 18’ 아니냐는 전언이 떠돌았습니다.

런던, 베를린, 파리에서 연달아 <미키 17> 스크리닝을 하고, 미국 LA와 뉴욕에서도 여러 홍보 스케줄이 있었고…. 서울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배우들이 들어와서 스케줄을 다 마쳤죠. 개봉 후인 3월 중순쯤인가, LA 오스카 뮤지엄에서 제 섹션을 만들어서 상설 전시를 여는데(아카데미영화박물관 ‘감독의 영감’전, 2027년 1월까지) 거기 다녀왔고요. 전시 오프닝 행사를 마치곤 바로 도쿄에 가서 일본 개봉 홍보를 했어요. 일본이 원래 개봉을 늦게 하잖아요? 3월28일에 일본 개봉 일정 맞춘 행사까지, 그동안의 긴 홍보 일정을 마무리하고 귀국했습니다.

- 4월4일은 어떻게 보내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웃음) 저는 열심히 생중계 봤죠. 매우 즐겁게. 어떤 분들은 즐겁지 않은 날이었던 것도 존중하고요. 정치적 관점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 앞으로 2년간 이어지는 아카데미영화박물관 전시는 알려지기로 각종 자료를 포함한 감독님 소장품으로 아주 빽빽하다고요.

미셸이라는 큐레이터가 있었고 한국 스태프도 한명 있었어요. 각종 스케치, 콘티 등 온갖 자질구레한 자료가 많아서 가져가는 것 자체가 일이었죠. 지지난해부터 서울에 세번 정도 왔는데 정말 집요하더라고요. 오프닝 행사 때 “나보다 더 집요한 사람들인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방 전체가 <기생충> 스토리보드로 덮여 있는 공간, <살인의 추억>과 <마더>의 스토리보드가 영화 화면과 함께 보이는 벽이 마음에 들어요. <괴물> 크리처 모형, <옥자> 현장에서 안서현 배우의 연기를 위해 제작했던 실물 사이즈의 옥자 머리통이 있고. 아, 김혜자 선생님이 <마더> 때 쓴 불에 그슬린 침통도 있네. 규정상 영화 개봉연도에는 관련 전시를 할 수가 없대요. 그래서 <미키 17> 관련 전시품은 내년 3월 이후에 추가될 예정입니다.

- 공개된 전시 풍경 중 <플란다스의 개> 스케치 노트를 봤어요. 감독님이 버너 불빛을 받아 희번덕한 얼굴로 장광설을 펼치는 아파트 수위를 그려둔 페이지였습니다. 새삼 고 변희봉 배우의 부재란 곧 봉준호 영화를 채운 특정한 캐릭터성과의 작별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옥자>까지 항상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로 등장하셨잖아요? <살인의 추억>에선 형사반장이셨지만. 아무튼 제가 한 세대, 그 제너레이션을 표현하는 방식과 선생님의 존재는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죠. 미국서 함께 전시를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지요. 2023년 가을에 변희봉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잖아요. 투병 중이실 때 제가 몇 차례 찾아뵌 적이 있어요. <옥자> 크라이테리언 블루레이에 스페셜 피처로 변희봉 선생님 인터뷰가 있는데 항암 치료 중이셔서 삭발한 상태로 꽤 긴 인터뷰를 하셨죠. 어디 인터넷에 올라가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제 생각에 아마 생전 마지막 모습이 담긴 푸티지가 아닐까 싶은데… 그 인터뷰를 제가 진행했습니다. 선생님 댁에 이전에도 몇번 왔다 갔다 했으니까, 사람들이 우르르 와서 하는 것보단 그냥 카메라만 간단하게 세팅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냥 저랑 대화하신 거죠. (잠시 생각) 선생님이 오스카상 한번 꼭 구경하고 싶다셔서 제가 가방에 트로피를 넣어갔는데, 그게 되게 무거워요. 근데 그거 들고 사진도 찍고 막 껄껄껄 웃고 좋아하셨어요. 그 사진이 저한테도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이 됐죠.

빛을 위한, 깊은 어둠의 필요

- <설국열차> <괴물> <옥자> 등과 비교해 <미키 17>의 이질성은 감독님 영화를 통틀어 혈연관계의 끈적함이 가장 소거된 인물 구도를 보여준다는 점이었습니다.

일단 원작 소설을 봤을 때 가장 가슴이 찡했던 장면이 나샤(나오미 애키)가 미키(로버트 패틴슨)와 함께 가스실에 들어가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대목이었어요. 그만큼 사랑 이야기가 중요했지요. 사랑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가족관계가 없는 게 낫겠더라고요. 아, 물론 사랑에 관해서라면 토니 콜레트(일파 마샬 역) 배우가 “둘의 사랑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사랑도 무시하지 마라”고 자주 일깨워줬죠. (웃음) 항상 저를 붙들고 “나와 마크의 사랑도 사랑이다. 남편이 죽었다고 자기도 미쳐서 따라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영화 속 우주선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인데 그 안에서 세대 개념을 최대한 단순화했어요. 아이들이나 노인이 안 나오죠? 케네스 마샬(마크 러펄로)의 표현대로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 청춘 남녀들”이 주 구성원이 되고 오직 독재자 부부만 부모 세대로 존재합니다. 스티브 박이 연기한 지크 요원이 그나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드문 인물인데, 유일하게 약간 삼촌 세대 정도일까. 가족 구도가 사라지고 청년 위주의 큰 커뮤니티로 꾸리고 나니 제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사랑하는 남녀 주인공이 제대로 등장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아요.

- 일파의 사랑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미키 17>엔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뜻밖에 등장하는 악몽 신이 있습니다. 차갑고 음산한 기운이 불쑥 영화에 끼어드는 순간이기도 한데요. 워너브러더스와 편집 과정에서 의견 차이도 있었다고요.

악몽 신이 제 입장에서는 정말 중요했어요. 그 컴컴한 신 다음에 쨍한 햇살로 나오잖아요. 미키가 밝은 분위기에서 폭파 버튼을 누르길 바랐습니다. 한때는 트라우마였던 버튼이 이제는 자기 극복의 버튼이 되는 장면인데, 일단 제가 버튼을 좀 좋아하고요. (웃음) 햇살 아래서 버튼을 누르는 엔딩 신에서 기본적으로는 간결함을 추구했지만 동시에 악몽의 잔상도 계속 남아 있었으면 했어요. 왜 아침에 일어나서 햇살 속을 걷고 있고 공원에 꽃도 피어 있고 좋은데, 이상하게 전날 밤 악몽의 잔상이 계속 따라오는 그런 느낌 있잖아요. 미키의 악몽에서 케네스 마샬이 다시 출력되는데 우리가 지난 4월 3일 밤, 4월4일 아침까지 계속 꿀 만한 악몽이 그런 게 아닐까요. 현실의 미국에선 과거의 대통령이 돌아오기도 했고…. 그분을 모델로 한 건 아니지만요. 미키는 다행히 악몽의 끄트머리에 ‘18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떠올리더니 곧바로 깨어납니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스스로 꿈에서 깨어나는 느낌이죠. 그 지점이 필요했어요.

- <기생충>의 말미에 묘사된 가족의 재회 장면도 현실이라기보다 차라리 백일몽 같습니다.

기우(최우식)가 도착하자 아버지 기택(송강호)이 지하에서 전등을 켜고 올라오죠. 두 사람, 그리고 엄마(장혜진)도 합류해서 모두 함께 껴안다가 화면이 페이드아웃되면서 다시 겨울 반지하로 카메라가 내려가죠. 이번엔 밝은 햇살에서 어둠으로 가는 거예요. 좀 잔인하긴 하지만 <기생충>은 애초에 그 장면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 같아요. 기우가 그 집을 사려면 54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왔다고 해요. 그의 예상 연봉으로 따져보면요. 그런 숫자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모두가 직관적으로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죠. 그래서 오히려 따뜻한 햇살 아래서 집을 둘러보는 장면을 하나의 현실로 촬영했고요. 그것을 꿈이라고 지시하는 영화적 장치는 없어요. 화면에 특별한 필터나 이상한 전환도 없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직관적으로 “저럴 순 없다”라고 보고, 믿게 돼요. 극장에 앉은 관객의 위치에서는. 그게 슬픈 겁니다.

- <플란다스의 개>의 아파트 복도, <살인의 추억>의 하수로, <설국열차>의 터널과 기차 칸, <옥자>의 컨베이어 벨트, <기생충>의 계단과 지하실, 그리고 <미키 17>의 휴먼 프린터와 사이클러까지…. 감독님 영화에서 통로가 갖는 위상이 있습니다. 감독님을 자극하는 부분은 어떤 걸까요. 드나듦의 움직임? 혹은 주로 원형의 이미지인가요?

<미키 17>에 한정하자면 긴 통로의 이미지보다는 원의 이미지가 영화에서 더 지배적이었던 것 같아요. 미술감독과 처음 프린터를 디자인할 때 친숙한 느낌을 주고 싶어서 병원의 MRI 같은 원통형 이미지를 참고했어요. 모션적으로는 SF에서 주로 묘사되는 클론의 탄생이 아니라 정말 종이처럼 출력된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죠. 뚜껑을 열면 완성된 사람이 있는 형태가 아닌, 진짜 덜컹거리며 출력되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하는. 인간을 프린팅한다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존재 가치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일인 거고. 휴먼 프린터의 원이 생명을 상징한다면 사이클러의 원은 죽음으로 향하죠. 동그란 원 아래 불구덩이가 소용돌이치는 모양 때문에 현장에선 농담처럼 옛날 캐럴코 픽처스 로고 같다고들 했는데. 미키의 개인적인 트라우마, 잘못된 죄책감과 자존감 부족과 같은 여러가지 문제가 버튼 하나에 강박적으로 얽혀 있기도 하죠. 그 연속 선상으로 악몽 신에서 일파의 손목을 타고 흘러나오는 피가 손바닥에 마치 빨간 버튼 모양처럼 고이게 했어요.

- 봉준호 영화는 수직적인 이미지에 대한 지속적인 매혹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상하게 수직적인 상황 묘사를 늘 좋아했던 것 같아요. <괴물>도 한강을 배경으로 하니까 처음엔 사람들이 다 수평적인 영화라고 추측했는데 사실은 아주 수직적인 영화였잖아요. 좁고 깊은 수직적인 공간에 두 어린아이가 갇혀 있는 상황의 공포로 가득 찬, 그곳에서 어떻게 탈출하느냐의 문제였어요. <설국열차>는 넓게 보면 물론 수평 방향 운동이지만, 마지막에 엔진 속 참혹한 진실이 밝혀질 때 에드 해리스 배우가 엔진실 마룻바닥을 열면 수직의 이미지를 목도하는 것으로 수직의 형상을 넣었어요. 거기서 마침내 끔찍한 리얼리티가 드러나도록. <미키 17>은 크레바스에서 오프닝을 시작했고요. 수직의 제일 밑바닥에 미키가 누워 있으니 어떤 의미로는 본인의 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위치에서 영화가 열리는 거죠. 항상 그런 느낌의 이미지를 그려왔던 것 같아요. 사실은 더 노골적인 ‘세로 영화’를 찍어보고 싶은 생각도 많이 있어요.

- 세로 영화라면요?

개인적으로 왕가위 감독님의 <화양연화>가 저한텐 탁월한 세로 영화라고 느껴지는데, 당시 홍콩의 밀집된 공간들이 더욱 비좁은 프레임으로 묘사되었고 거기서 오는 정서가 분명해요. 바글거리는 이웃들 사이에서 거리가 확보되지 않은 채로 부대끼면서도 비밀을 지켜야 하는…. 좁은 복도와 계단에서 두 사람이 교차하는 유명한 장면들까지 더해서 아주 아름다운 세로 프레임의 영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수직적 공간과 프레임을 저는 장르적으로 전혀 다르게 접근하겠지만.

- 신작 애니메이션 <더 밸리>도 깊은 심해가 배경입니다.

역시 넓게 펼쳐진 심해가 아니라 일명 크랩 밸리라고 하는 협곡이 무대예요. 마리아나 해구처럼 꽤 좁고 깊은 지형이죠. 이번 애니메이션도 수직적인 움직임이 많아요. 물론 좁다고 해도 절대 사이즈로는 꽤 큽니다. 바닷속에서 외롭게 사는 귀여운 크리처한테 일어나는 사건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