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백색인>과 <지리멸렬>을 거쳐 1995년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2000년에 <플란다스의 개>로 장편 데뷔한 봉준호 감독의 30년은 오늘의 우리가 지시하는 ‘한국영화’에 긍지의 색채를 입힌 결정적 시간이다. 일상의 부조리를 만화적인 유머로 비튼 신선한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그 흥행 실패조차 2000년대의 새 감수성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되고, 곧이어 등장한 <살인의 추억>(2003)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비옥함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한강에 잠복한 돌연변이 <괴물>(2006)은 봉준호식 풍자와 점액질의 장르가 천만 관객의 것임을 확인시켰고, <마더>(2009)는 범죄의 속살 위에 구세대 모성의 정념과 광기를 입혀 우리가 그를 낭만주의의 감독이라 확신할 충만한 토양으로 기능했다. 첫 해외 프로젝트인 옴니버스영화 <흔들리는 도쿄>(<도쿄!> 중)를 거쳐 첫 영어영화인 <설국열차>(2013)에 당도한 봉준호는, 계급과 존엄에의 투쟁을 한층 초국적 무대로 확장하는 동시에 장르의 지하실로 향하는 수직운동도 지속해나갔다. 소녀와 거대 동물의 우정을 통해 글로벌 자본주의 탐욕의 민낯을 우화적으로 고발한 <옥자>(2017), 반지하와 저택에 공존하는 두 가족의 삶을 교차시켜 한국 사회의 계급도를 블랙코미디에 응축한 <기생충>(2019),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8번째 영화 <미키 17>(2025)이 그렇게 탄생했다. 반복되는 삶과 죽음으로 착취당하는 복제인간의 소요극이자 러브 스토리는 후기 파시즘의 증식을 염려하는 한편의 SF 우화로서 동시대 관객에게 선명한 집중을 요한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을 모두 거머쥔 <기생충>으로 한국영화 100주년의 피날레를 장식한 그에게도 다음 작품은 언제나 예측 불허의 ‘빨간 버튼 누르기’다. 주도자로서는 인간-비인간 생명체와 포스트 휴먼을 아우르고, 안타고니스트로 일련의 독재자 시리즈를 완성해낸 봉준호의 다음 행선지는 심해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전히 거장을 향한 묵직한 기대에 부응하기보다 장르의 심연을 파고드는 집요한 강박의 구현자를 자처한다. <미키 17>의 전세계 개봉 일정을 순회하는 호텔방에서 첫 애니메이션 <더 밸리> 작업을 동시에 진행 중인 그를 일찌감치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한번 귀찮게 했고, 이번엔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인 에무시네마에서 열리는 관객과의 대화를 앞두고 극장 안에서의 대화를 좀더 일찍 시작해보자고 청했다. <씨네21> 창간 30주년과 봉준호의 영화 궤적 30여년이 만나는 이 지점에서 확신하는 것은 그의 심해가 여전히 부글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잠시 봉준호의 시간, 그리고 영감을 빌려봤다.
*이어지는 글에서 봉준호 감독과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