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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경애하는 마음으로, 베를리날레 심사위원이 된 배우 배두나

SHUTTERSTOCK

- 한국은 지금 설 연휴인데 베를린에서 경쟁부문 심사 중이다. 가족들과 유선으로 인사는 나눴나.

아직! 떡국 먹어야 하는데. 올해 베를리날레 경쟁이 22편이라 편수도 많아서 개막식 전날부터 정신없이 첫 일정에 돌입하느라 오늘까진 여유가 없었다. 매일 세편씩 보고 있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직은 처음이라 아직은 좀 긴장한 상태다.

- 지금도 세편 관람 일정을 마치고 온 건가.

맞다. 아침부터 세편을 보고 왔다. 심사위원장이 누구냐에 따라 스케줄이 많이 달라진다고 하더라. 빔 벤더스 감독님은 함께 관람한 영화들에 관해 곧바로 논의하길 원한다. 한편 보고 토론하고, 두편 보고 또 토론하는 식이다. 아침 겸 점심을 한번 먹고, 저녁은 오후 5시쯤 일찍 먹고 있다. 밥 먹으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나눈다. 이 과정이 재밌다고 말하면 자칫 심사를 가볍게 대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걱정되는데, 사실 정말 그렇다. 이렇게 집약적으로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그래서 더 성심성의껏, 공들여서 영화를 보고 있다.

- 베를린 이전에 칸,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도 심사위원 제안을 받은 적 있다고. 3대 영화제 심사위원직을 모두 제안받은 유일한 한국 여성배우가 아닐까.

한참 전 얘기라…. 한 10년 된 것 같다. 그해에 이상하게도 감사한 제안을 연달아 받았지만 거절했다. 이유는 단순했는데, 촬영을 해야 해서. 작품 촬영 중에 최소 2주 이상인 영화제 일정을 편한 마음으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 돌아보면 30대에는 정말 계속 촬영장에 있었구나, 싶다. 첫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직을 지금쯤 하게 된 것이 나로선 다행스럽다.

- 어떤 점에서인가.

30대 때 심사를 했으면 확실히 다른 시선으로 영화를 대했을 것 같다. 세상을 보는 눈, 영화에 대한 이해도 달랐을 테고. 그래도 지금이 좀더 나은 내가 아닐까.

- 베를리날레 집행부가 절묘한 타이밍을 잡은 셈이다. 미국에서 신작 <알파 갱> 촬영을 마무리한 시점에 제안을 받은 건가.

<알파 갱>은 지난해 여름에 부다페스트에서 마무리했다. 이후 <가족계획> 시즌2를 앞둔 상황이라 준비하면서 기다리고 있던 차에 심사위원단에 합류할 수 있었다.

- 감독, 프로듀서, 작가 등 다양한 영화계 직군이 포진한 올해 7인의 심사위원 중 유일한 배우다. 배우가 영화를 바라볼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감독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가, 그것이 얼마나 나한테 화살처럼 꽂히는가. 그리고 내가 관객으로서 그 영화 안에 들어가는가? (긁적이며) 테크니컬한 건 아직도 사실 잘 모른다. 25년 넘게 일해왔지만 아직도 직관적으로, 본능적으로 배우 일을 한다. 푼크툼의 순간, 정말 화살처럼 나를 찌르는 것이 있는지, 그걸 제일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 영화제 심사위원직을 수행 중인 지금 말하자니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사실 영화에 등수를 매길 수 없다고 생각해왔고 연기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개개인이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고 자기에게 맞는 것과 안 맞는 게 자연스럽게 나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 오기 전부터 다짐을 했다. 내가 감히 순위를 매기고 평가한다고 생각하지 말자고. 그저 지금까지 대본을 선택해온 나의 기준, 촬영장에서 행해온 연기관을 바탕으로 차분히 영화를 보려 한다. 집행부가 배우로서 내 경험과 취향을 존중해서 호출했다는 점에 힘입어서. 그렇게라면 할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왔다.

베를린국제영화제 DIRK MICHAEL DECKBAR

- 배두나는 확실히, 심사위원이라는 자리를 절대적인 평가자의 위치라고 생각했다면 이 자리를 불편해할 것 같은 인상의 소유자다.

어렸을 때부터 내겐 영화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 감사하게도 신인 시절부터 장인정신을 갖고 영화를 만드는 분들과 함께한 덕분일지도. 피를 쏟고 뼈를 깎는 고통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걸 안다. 그래서 스크리닝룸에 앉아서 영화를 평가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면 이건 가시밭길이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론 마음을 조금 더 열고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여보기도 한다. 일단 겪어보지 않으면 앞으로 세상을 점점 더 모르게 될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그동안 추구해온 것을 안정적으로 따라가기 마련이니, 요즘엔 조금 더 모험쪽으로 다가가는 선택이 좋다.

- 심사위원 기자회견의 첫 질문이, 영화가 인간 삶에 끼치는 역할에 관한 것이었는데 배두나에겐 어떨까. 일례로 <다음 소희> <브로커> 등 윤리적 관찰자로 등장한 작품들이 세상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에도 영향을 끼쳤을 듯싶다. 영화를 통해 개인이 한뼘 나은 주체가 되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나.

매번, 정말로. 20대 때는 봉준호, 박찬욱 감독님이 세상과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무엇을 묘사하고 삶을 어떻게 위로하는지 현장에서 배우는 일이 내 삶에 큰 작용을 일으켰다. 30대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이 그런 분이었다. 워쇼스키 감독님들은 옆에서 지켜보면서 삶을 대하는 생각이 많이 바뀐 부분도 있다. 의식적인 가르침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저 옆에서 지켜보다가 그렇게 됐다. 여러모로 영화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 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내가 고르는 작품들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할 때 뿌듯해진다. 내가 믿는 이야기를 감독님이 세상에 전하려 할 때, 작은 역이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기쁘다. 내 입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윤리를 고민하고 발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랑말랑한 심장, 견고한 배우에게 필요한

- 배우 배두나에게 베를린이란 도시는 어떻게 기억되나.

첫 해외 작업이었던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2011년에 찍었고 그 로케이션이 베를린이었다. 바벨스베르크라는 역사적인 세트 분량도 많았는데, 엄청 추웠다. 이후로 워쇼스키 감독님들과 <센스8>를 찍으면서 다시 베를린에 왔으니 내게는 늘 촬영지였고 추위와 외로움 속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했던 도시다. 처음엔 영어도 잘 못했기 때문에 빨리 적응하려고 일부러 통역 없이 생활했다. 당연히 혼자서 부딪히고 알아내야 하는 게 너무 많았달까. 그래서인지 지금은 더 각별하고 편안한 도시가 됐다. 이번에 베를린에 온다고 10여년 전 이곳에서 샀던 안경을 챙겨왔다. 여전히 그대로인 안경점에 가서 수리를 맡기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마도 조금 몽글몽글?

- <다음 소희>로 만났던 지난 <씨네21> 인터뷰 때 해외에서 혼자 나가 일하면 배두나란 사람의 모드가 일종의 독종으로 바뀐다고 했다. (웃음) 그때도 궁금했던 건데, 글로벌 프로젝트의 경험치가 두텁게 쌓인 지금은 좀 달라졌나.

오히려 더 독해졌다. (웃음) 생존 본능 같은 것이려나.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놓치는 부분이 많다.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나를 보호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해외에서는 오롯이 자신을 지켜야 하니까. 약 15년 전쯤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찍을 땐 베를린의 길거리에서 바람 맞으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성시경님의 발라드를 들으면서. (웃음) 결국 터득한 바로는 그게 꼭 좋은 방법만은 아니더라. 음악처럼 기댈 것에 의지하고 감정에 집중하면 때론 마음이 더 약해진다. 버티려면 잠시 나를 나무토막처럼 두는 때가 필요하다.

- 연기하는 순간에 온전히 취약해지기 위해서 카메라 밖에선 외려 투박하게 버티는 시간이 필요한 걸까.

말하자면, 담아두려고 한다. 외국에서 일할 때는 부당한 일도 있고 인종차별이 없을 순 없는데 그걸 흘려보내지 않는 편이다. 차곡차곡 쌓아놓고 카메라 앞에서 비로소 나약해지는 거다.

- 심사위원 기자회견 초입에 긴장감이 역력한 모습을 보고 그마저도 배두나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듯한 여유를 꾸며내지 않길래.

쑥스러웠었나? 어색하긴 했다. 기자회견은 수도 없이 해왔지만 항상 출연한 영화가 있고 감독과 동료 배우들이 곁에 있었다. 이 영화와 인물을 어떻게 잘 소개할 것인가,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고 오기도 하고. 이번엔 나와 동행한 영화가 없으니 정말 혈혈단신으로 와 있는 것 같아서 조금 어색했다.

- 그 모습이 배우라는 존재에 관한 자연스러운 설명 같기도 하다. 맡은 캐릭터의 정체성과 동행하는 순간에 가장 편안해 보이는 사람들.

난 그래서 스타는 못 되고 그냥 배우인가 싶다. 캐릭터의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하고 촬영장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아직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 일을 하다보면 말 그대로 스타의 역할을 소화해야만 하는 때가 있는데, 애를 많이 쓴다. (웃음) 요즘은 전보다 그 부담감을 놓아버린 것도 같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나 또한 있는 그대로 믿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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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베를린에서 배두나는 심사위원으로서 상을 주는 입장이다. 하지만 배우는 늘 평가받는 입장에 가깝다. 앞서 작품과 배우를 순위로 평가하는 일의 난처함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적시에 적역에게 주어진 상이 창작자를 터널 밖으로 이끌어주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의기소침해진 시기에 배두나를 일으킨 상이 있었나.

(미소 지으며) 지금 딱 떠오르는 게 하나 있는데… 지난해 디렉터스컷 어워즈 시리즈 부문 올해의 여자배우상.

- 예상 못한 답변이다. 신인 시절 <고양이를 부탁해>로 받은 여우주연상 정도를 예상했는데.

물론 놀라고 영광스러웠지만 그건 격려에 가까웠다. 그런데 <가족계획>으로 받은 상은 위로였다. 상에 연연한 적 없었는데 존경해온 감독님들이 전해준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울컥하고 말았다. 흥분해서 인스타그램에 올릴 정도였으니까. 여전히 새롭게 봐주신다는 뜻일까 싶어 더욱 선물처럼 느껴졌다.

- 2025년 9월 <린다 린다 린다>가 재개봉했고 <씨네21>이 30주년을 맞아 설문한 30년간의 한국영화 베스트 리스트엔 <고양이를 부탁해>가 5위를 차지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여전히 배우 배두나가 품은 청춘이 퇴색 없이 호출된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었다. 지금의 배두나와 과거의 배두나를 겹쳐볼 때 큰 이질감을 느끼기 힘들달까.

<고양이를 부탁해> 20주년 상영 때 리마스터링 버전을 다시 봤는데 그 영화에 대한 내 감상이 그랬다. 어떻게 이렇게 안 촌스럽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경험이었다. <린다 린다 린다>도 마찬가지였고. 가끔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왜 여전히 이런 것에 상처받지, 어른이 됐으면 좀 무뎌질 만도 한데.’ 이렇게 나를 채근하게 될 때도 있지만 사실은 그게 내가 이 일을 하는 동력이란 걸 안다. 부딪히고 너덜너덜해지면서 연기하고 싶다. 기술로 연기하는 배우는 아니니까, 마음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다행히 아직도 마음만큼은 말랑말랑한 것 같다. 여전히 쑥스러운 건 쑥스럽고, 카메라는 편한데 사람들 생눈을 똑바로 보는 일은 좀 무섭고. 똑같다.

- 배두나에겐 여전한, 베를린의 추억의 장소가 있다면 하나 알려 달라.

마우어파크! 일요일 벼룩시장으로 유명하지만 원형 극장에서 열리는 노래자랑도 볼거리다. 노래방 기계를 가져다놓고 수십, 수백명의 다양한 시민들이 둘러앉아서 노래하는 모습을 본 적 있다. 정말 내키면 아무나 뛰쳐나가서 하는 거다. 내성적인 인간이지만 아무도 나를 모르는 이 도시에서라면 댄스를 곁들인 노래가 가능하지 않을까. 언젠가 꼭 올라가서 해보고 싶다.

- 이젠 많이들 알아볼 것 같은데. <씨네21>이 기록하고 싶으니 현장에 불러달라.

안된다. 진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해보고 싶다.

- 마지막으로 신작 <알파 갱>에 대해 살짝 귀띔해줄 게 있나.

데이비드 젤러, 네이슨 젤러. 두 젤러 브러더스 감독님이 쓰고 연출한 작품인데 케이트 블란쳇, 레아 세두, 데이브 바티스타, 라일리 키오 등 정말 좋은 배우들 사이에서 지난해 여름에 촬영을 마쳤다.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엉뚱한 코미디인 동시에 인간의 감정이 때로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들려주는 날 선 면모도 매력적인 작품이다. 알파 갱이라는 외계 집단이 지구를 침공하러 오는 이야기이니 다음번엔 외계인 배두나로 다시 <씨네21>의 문을 두드리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