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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 도서 - <새로 쓰는 화인열전 1-겸재 정선>

유홍준 지음 창비 펴냄

예술가가 작품을 인정받으려면, 나아가 하나의 사조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카라바조처럼 범죄를 비롯한 여러 사건을 끊임없이 저지르면서 아슬아슬하게 탐미적인 작품을 남기다 39년 만에 세상을 떠난 화가도 있지만, 모네처럼 긴 시간을 살면서 당대에 세상의 인정도 받고 작업을 계속 이어간 성실한 공무원 같은 작가쪽이 아무래도 가능성이 클 것 같다. 겸재 정선은 후자에 속한다. 2001년 초판이 나온 <화인열전>에다 그간의 새로운 연구를 보태 새롭게 선보이는 조선시대 화가 시리즈의 첫 책 <겸재 정선>에 소개된 화가의 인생은 적어도 읽으며 크게 속상하거나 아쉬울 대목은 없다.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완성한 겸재는 가난하긴 해도 양반 집안 태생으로 주변에 그림 그리 기를 가르쳐줄 사람이 있었고 함께 그림을 감상할 사람들도 있었다. 30대까지는 특별한 이력이 없다가 40대에 들어서야 자그마한 벼슬 자리를 구했고, 금강산 유람 또한 30대에 처음 시작하여 그림을 남기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80대에도 붓을 놓지 않은 대기만성의 인생을 생각하면 ‘예열 시간’이 길었구나 싶어진다. 조정에서 사화가 벌어지는 일도 있었으나, 지방에서 일한 까닭에 불똥을 피할 수 있었다.

겸재의 작품 세계는 초반에는 당대에 많이 들어온 중국의 화본에 영향을 받아 수련하는 단계를 거쳐, 조선의 사실적인 풍경을 그림에 담아내며 충실하고 차분한 화풍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70대에 접어들면서는 붓을 대담하게 쓰면서, 조형 그 자체를 순수하게 탐구하는 작업에 이른다. 긴 탐구의 시간 동안, 비 온 뒤의 인왕산 풍경을 담은 원숙한 작품 <인왕제색도>며 금강산의 뾰족한 봉우리들을 힘차게 표현한 국보 <금강전도> 등 과감한 화면 구성과 필묵법으로 유명한 걸작이 탄생했다. 이 모든 작업을, 나랏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동안 해냈다는 사실 또한 인상적이다. 그는 관리 고과 평가를 좋게 받았는데, 딱 한번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은 경우마저도 백성들에게 세수를 모질게 걷지 못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날씨가 좋아 경치가 선명한 날 서촌이나 북촌에 가면, 하늘 아래 펼쳐진 인왕산이나 백악산의 아름답고 거대한 바위들이며 나무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인상이 수백년 전의 그림에 그대로 담겨 있다는 사실은 가볍지 않은 감동을 준다. 책에는 여러 작품이 선명한 이미지로 실려 있어, 2025년에 열린 대규모 전시회를 놓친 사람들의 아쉬움을 어느 정도 달래줄 것 같다.

비록 자연의 입장에서는 ‘틀린’ 것이지만 그림의 입장에서는 ‘맞는’ 것이고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감동적인’ 것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