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년간 들려온 할리우드발 엔터테인먼트 뉴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뉴스를 꼽으라면? 바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MCU 복귀 소식이다. 2024년 여름 샌디에이고 코믹콘 무대에 깜짝 등장해 “New Mask, Same Task”를 외친 그는 이번 <판타스틱4: 새로운 출발>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MCU에 속한 작품들은 연대기순으로 타노스와 전면전까지를 다루는 페이즈1에서 3까지의 작품을 인피니티 사가, 5년간 인류의 절반이 사라졌다 되돌아온 블립 이후를 다루는 페이즈4에서 6까지의 작품들을 멀티버스 사가로 묶어 부른다. <판타스틱4: 새로운 출발>은 MCU 멀티버스 사가를 마무리할 페이즈6의 첫 번째 영화다. 이번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닥터 둠의 등장 여부는 영화 팬들의 중심 화제였다.
1961년 만화가 스탠 리와 잭 커비에 의해 탄생한 ‘판타스틱4’는 마블 코믹스가 제작한 최초의 슈퍼히어로팀이라는 상징성을 지닌 캐릭터다. 천재 과학자 리드 리처드(페드로 파스칼)를 중심으로 운동선수 출신 우주비행사 벤 그림(에본 모스바크라크), 리드의 연인 수잔 스톰(버네사 커비)과 수잔의 남동생 조니 스톰(조지프 퀸)이 한팀을 이룬다. 이들은 지구를 대표해 우주선을 타고 시험 비행에 나섰다가 우주 방사선에 노출되어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지구로 돌아와 자신들의 정체를 공개하고 존경받는 유명인사로, 지구의 수호자로 살아간다. 마블 최초의 가족 캐릭터인 판타스틱4의 숙적이 바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할 닥터 둠이다. 닥터 둠 역시 리드와 마찬가지로 천재 과학자 출신의 슈퍼 빌런으로, 2005년작 <판타스틱4>에서도 빌런으로 등장한 바 있다.
<판타스틱4: 새로운 출발>의 근사한 프로덕션디자인과 군더더기 없는 플롯, MCU에서 본 적 없는 다정한 가족 히어로 설정 등 여러 성과를 언급하기도 전에 닥터 둠 이야기부터 꺼낸 이유가 있다. 심지어 쿠키영상에서 뒷모습만 잠시 비춘 것 외엔 아무런 활약을 하지 않는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행성 포식자’로 알려진 갤럭투스(랠프 아인슨)가 엄연한 빌런으로 등장하지만 이 존재는 실은 전통적인 의미의 빌런이 아니다. 존재의 기원도 딱히 설명하지 않은 채 등장한 그는 우주적인 허기를 채우기 위해 행성을 삼켜야 하는 일종의 자연 재난 현상에 가깝게 묘사된다. 기능적으로는 리드 리처드와 수잔 스톰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프랭클린이 엄청난 코스믹 파워를 지닌 캐릭터라는 걸 일깨워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 때문에 관객은 다음 편에 등장하게 될 빌런에 게 시선을 뺏기게 되는 것이다.
빌런의 존재감이 약하다고 해서 <판타스틱4: 새로운 출발>의 완성도 전체가 흔들린 건 아니다. 오히려 페이즈4 이후 등장한 작품 중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만듦새를 자랑한다. 세계관을 통합한 마블 시리즈 고유의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번 영화의 가장 주목할 전략은 캐릭터의 기원 서사를 과감히 건너뛴다는 점이다. 동시기에 개봉한 제임스 건 감독의 <슈퍼맨>(2025)도 같은 전략을 구사했다. 지난 20여년간 슈퍼히어로영화의 전성기를 함께 보낸 대중은 히어로의 기원을 지겹도록 반복해서 봐왔다. 10년 전 조시 트랭크 감독은 자신의 주특기였던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문법을 도입해 10대 청소년의 트라우마와 성장담에 초점을 맞춰 슈퍼히어로의 기원 서사를 재해석했지만 결과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한때 관객은 과거의 상처에 사로잡힌 비운의 히어로를 열렬히 소비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피로도를 호소한다. 여기에 더해 판타스틱4 멤버들은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 멤버들의 성격이 모나지도 않았고 <썬더볼츠*>의 캐릭터처럼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 지구를 집어삼킬 갤럭투스에 맞서 해결책을 강구하던 리드가 포털을 만들어 지구를 차원 이동시키자고 아이디어를 내자 전세계 국가가 나서서 이를 돕는다. 위기의 굴곡은 얕지만 판타스틱4 멤버들은 코스믹 파워를 지닌 아기 프랭클린의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맞선다. 클라이맥스 액션 시퀀스의 완성도 또한 매끄럽고 스펙터클한 볼거리도 충분히 선사한다.
또한 <판타스틱4: 새로운 출발>의 주요 스토리라인은 페이즈4 이후 멀티버스 사가에 위치한 영화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과도 연관없이 흘러간다. 수많은 우주 행성의 민원 처리를 위해 돌아다니는 캡틴 마블과도, 우주에서 탄생한 아들 스카와 함께 지구로 돌아온 헐크와도, 후계 구도를 형성해 콤비로 활동 중인 호크아이나 토르와도, 장렬하게 희생해 신성한 타임라인을 지켜낸 로키와도 동선이 겹치지 않는다. 바로 판타스틱4 멤버들이 활약하는 지구가 기존 MCU의 616 지구가 아닌 828 지구이기 때문이다. 연출을 맡은 맷 샤크먼 감독은 프로덕션디자이너 카스라 파라하니와 함께 828 지구를 레트로 퓨처리즘의 세계, 즉 우주 개발이 한창이던 실제 1960년대 미국의 발전상을 모티브로 복고풍 미래의 뉴욕으로 만들어냈다.
828 지구의 슈퍼히어로는 오직 판타스틱4만이 존재하는 지구로 추측된다. 미드센추리 스타일의 디자인으로 이뤄진 벡스터 빌딩에서 지내는 슈퍼히어로들은 화목한 가족이며 동시에 희생정신을 강조한다. 인류가 코스믹 파워를 안고 있는 아이의 희생을 강요하며 이들을 위기로 내몰 때에도 이들은 고전적인 히어로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팬데믹으로 전세계 영화 시장이 흔들리고 여러 논란으로 어쩔 수 없이 MCU의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 때 마블 스튜디오의 수장 케빈 파이기는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이미 알고 사랑하는 캐릭터들을 독특하면서도 놀라운 방식으로” 소개할 수 있을지, 또한 “하드코어 팬이나 만화 팬조차도 거의 알지 못하거나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캐릭터들을 선보일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이번 영화의 전략은 익숙함을 세련되게 전달하고자 한 제작진의 노력이 성공한 케이스다. 감독 개인의 연출 색깔을 강조하지도 않으면서 새로운 환경에 놓인 익숙한 캐릭터의 변주를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이제 남은 숙제는 828 지구에서 어둠의 힘을 구축하고 있을 닥터 둠의 존재를 MCU의 616 지구로 옮겨놓는 작업이다. <더 마블스>의 쿠키영상에서 언급됐던 모니카 램보가 불시착한 엑스맨 세계의 지구와의 세계관 대통합도 앞으로 풀어갈 숙제다. 2026년 겨울 공개될 <어벤져스: 둠스데이>와 2027년 겨울 개봉 예정이자 멀티버스 사가의 최종장이 될 <어벤져스: 시크릿 워즈>에서 얽힌 실타래가 풀릴 것으로 기대된다. 한때 멀티버스 사가의 중심축으로 설계됐던 정복자 캉의 퇴장으로 인해 MCU 비전 전체를 수정해야 했던 사태가 이제야 비로소 수습되었다.마블 영화를 37번째 극장에서 만나고 있는 관객이 살고 있는 현실의 지구는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혐오와 분열의 시대를 살고 있는 중이다. 극장을 찾는 관객의 세대와 성별이 달라진다 해도 슈퍼히어로영화에서 기대하는 바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멀티버스의 붕괴 위기 속에서 수많은 히어로들이 다시 한번 ‘어셈블’을 외치는 영광의 순간이 재현되기만 기다리는 중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복귀 사실을 알리며 외친 ‘Same Task’의 의미는 어벤져스의 영광을 멀티버스 사가에서 재현하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결국, 우리가 보는 마블 영화의 최고작은 언제나 다음에 나올 개봉 예정작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또 한번 반복할 수밖에 없다.
코믹스의 왕, 잭 커비를 기리며
<판타스틱4: 새로운 출발>의 엔딩크레딧과 쿠키영상을 본 관객은 “내가 창조한 인물들을 보면 내가 보일 것이다. 어떤 인물을 만들거나 상정해도 내 일부가 항상 거기 담겨 있다”라는 말과 함께 잭 커비(1917년 8월28일~1994년 2월6일) 추모 문구를 확인했을 것이다. 닥터 둠이 등장하는 쿠키 장면 외에 판타스틱4 멤버들의 초창기 디자인이 담긴 애니메이션 영상도 쿠키영상에 등장하는데 이 또한 잭 커비와 관련 있다. 뉴욕 출생의 만화가 잭 커비는 마블과 DC 코믹스가 설립되기 전부터 활동했던 초창기 작가 중 한명으로, 캡틴 아메리카를 만들어낸 작가다. 지금까지는 그의 동료였던 스탠 리가 대표적인 마블 슈퍼히어로의 창조주로서 추앙받아왔다. 스탠 리가 대부분의 캐릭터 기획이나 스토리, 구성을 담당하고 잭 커비는 일러스트와 디자인 위주로 담당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0년대 이후 최근에 이르러 그가 마블 코믹스에서 일하던 1960년대 당시에도 불공정한 크레딧 대우 논란을 겪었다는 사실, 어벤져스, 아이언맨, 블랙팬서, 헐크, 앤트맨, 판타스틱4, 엑스맨 등 주요 마블 캐릭터를 만들 때 스탠 리와 공동으로 작업했다는 사실이 재조명됐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이번 영화의 엔딩크레딧에는 아예 잭 커비를 기리는 문구가 삽입돼 있다. 공식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번 영화의 배경인 828 지구의 숫자가 잭 커비의 생일을 오마주한 것 아니냐는 추측 또한 그의 과업에 헌사를 보내는 마블의 제스처로 해석된다. 지금껏 마블 스튜디오가 MCU를 설계하면서 잭 커비의 성과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과거 케빈 파이기 프로듀서와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토르: 라그나로크>를 만들 당시에 잭 커비의 디자인을 참조해 프로덕션디자인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잭 커비의 대표작인 판타스틱4는 앞으로 MCU에서 더 큰 활약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