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용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투쟁, <도주> 아다치 마사오 감독

아다치 마사오란 이름의 무게는 쉽사리 가늠할 수 없다. 눈썹까지 하얗게 센 1939년생 노인, 1960~70년대 일본 영화미학의 최전선을 이끌었던 전위 영화계의 기수, 1974년부터 1997년 국제 지명수배를 통해 체포되기까지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에 참여했던 행동가. 이처럼 수많은 수식과 이력이 따라붙는 아다치 마사오 감독이지만 그의 역사는 20세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2000년 형기 만료 후 일본으로 강제송환된 그는 여전히 영화를 만들고 있다. 올해 일본에서 공개된 <도주>는 1970년대 일본의 반정부 조직이었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소속 기리시마 사토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49년 동안 도피의 삶을 살아온 그가 사망하기 며칠 전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공개했고, 아다치 마사오는 영화를 통해 그의 투쟁에 화답했다. 일본 정부의 출국금지 조치로 한국에 올 수 없는 그를 화상으로 만났다.

- 굉장한 애연가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하루에 얼마나 피우시길래. (본격적인 인터뷰 이전 아다치 마사오 감독은 역시나 담배를 피우며 인사를 건넸다.)

아, 그것은 극비 정보입니다만…. 이번 기회에 밝혀보겠습니다. (웃음) 하루에 2갑 정도는 피우는 것 같습니다. 가급적 2갑을 넘기지 않으려 하는 중입니다. 당신처럼 젊은 사람들보다 더 술과 담배를 과하게 하고 있지만 이걸 그만두면 오히려 내일이라도 당장 죽어버릴 것 같습니다. 9년 전쯤 의사가 폐기종이 생겼다며 금연하지 않으면 금방 죽는다고 경고했는데 보시다시피 아직은 살아 있습니다.

- 그래도 부디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전작 <레볼루션 +1>의 주인공 가와카미가 벌인 행동은 정치적 의도의 테러리즘이 아니라 개인의 결기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도주>의 주인공 기리시마 사토시도 실존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단 점에선 비슷해 보입니다만 기리시마는 다분히 정치적 행위로 가득 찬 인물 같습니다. 그렇다면 <도주>는 개인의 결의와 정치적 투쟁이란 동기가 모두 섞인 영화일까요.

맞습니다. <도주>는 명백하게 더 정치적인 영화이지요. 가와카미의 실제 인물인 야마가미 데쓰야는 자신이 치를 행위의 대가와 사회적 영향을 굉장히 냉정하게 바라봤다고 생각합니다. 결행 전에 남긴 편지에도 “이것은 개인적인 행동이며 이것의 모든 파장은 받아들이겠다”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즉 어떠한 대의나 사회적 변혁을 목적으로 삼았다기보단 순수하고 사적인 동기로 움직였다고 봐야겠지요. 기리시마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멤버로서 뚜렷한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 동기를 축으로 움직였단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사적인 실익보단 그룹의 목적성을 우선시했던 것이지요.

- 감독님 역시 1970년대 중순부터 일본 적군의 주요 일원으로서 팔레스타인 투쟁에 참여했습니다. 동지들과 투쟁했던 기리시마의 역사에 개인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기리시마란 인물을 감독님에 빗대어 감상했다는 평도 많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조금 곁들여야 할 것 같군요. 1970년대에 제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두개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1972년에 일어난 연합적군의 동지 살해 사건(일본의 신좌익 게릴라 집단인 연합적군의 조직원들이 사상 단결을 빌미로 29명 중 12명의 대원을 사살한 사건이며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도 불린다.-편집자)입니다. 또 하나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늑대 부대가 일으킨 미쓰비시 중공업 폭발 사건이지요. 두 사건을 바라보며 전 ‘어떻게 이 참패를 교훈으로 삼을 것인가?’란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뼛속 깊이 반성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반성의 결과가 바로 일본 적군의 창립이었습니다. 함께해야 한다고 느낀 것이지요. 그 이후로 정치와 혁명을 공부하며 아랍의 젊은이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 전 어떠한 정치 조직에도 속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통해 조직적 투쟁을 펼치다가 혼자가 된 기리시마와는 완전히 다른 입장이었던 것이지요. 저와 반대로 연대를 펼치다가 고립에 들어선 기리시마에게 강한 존경심을 느꼈고 그것이 바로 <도주>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은하계>

- ‘반성’은 감독님의 작품 전반에 드러나는 핵심적 주제입니다. <도주>의 기리시마가 또 다른 자신과 투쟁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승려의 모습을 한 기리시마가 나타나 “갈!”을 외치는 모습은 <은하계>(1967)의 주인공 M이 끝없이 펼치던 자문자답의 과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맞습니다. 아마 제가 너무 어리석기에 영화를 통한 자문자답이 아니라면 타인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웃음) 무지하고 유약하기에 계속 질문하고, 실행하고, 반성하려 합니다. 자신의 변화 없이 어떻게 세계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옆에 있던 아다치 감독의 부인은 “말로만 이렇지, 일상에서도 다른 사람들이랑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다”라고 핀잔을 줬다.)

- 2024년 기리시마 사토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처음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영화 작업을 통해 감정의 변화가 있으셨는지도 궁금합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멤버들과는 이전에도 교류한 적이 있으나 그들은 조직 내외부에서 익명을 사용했기에 기리시마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었죠. 엄청난 물음에 휩싸였습니다. ‘대체 이 사람은 왜 49년 동안 도망치다가 최후엔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까?’ 저의 답은 기리시마가 최후의 투쟁을 펼쳤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폭발 사건 뒤에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메시지를 지속하기 위해선 자신이 체포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잘못된 공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싸움을 이어왔고, 그 투쟁을 본인의 손으로 마무리한 것이지요.

- 감독님에게 ‘투쟁’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숨 쉬듯이 계속, 이 세상에서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을 바꾸기 위한 의지의 실행입니다.

- 1970년대 영화적 투쟁을 함께했던 일종의 동지 장뤼크 고다르는 2022년 안락사를 택했습니다. 한편에선 더이상 영화로 투쟁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마친 고다르의 마지막을 서글프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습니다. 감독님의 생각은 어떠셨나요.

처음 고다르의 소식을 접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도망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쉬움을 이기지 못해 고다르의 지인들에게 연락하여 상세한 사정을 들었습니다. 안락사 이전 1년 동안은 암 통증으로 인해 영화제작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단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뒤엔 그의 결단을 존중하게 됐습니다.

- <도주>에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늑대 부대가 자신들의 ‘의도’가 사상자 발생이란 ‘결과’로 인해 실패했다고 자책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간 영화라는 매체가 정치적인 투쟁을 펼쳐온 역사도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고다르의 지가 베르토프 집단이 그랬고, 지금의 영화는 20세기보다도 투쟁의 힘을 상실한 상태라고 느낍니다. 그럼에도 감독님은 “여전히 영화는 100%, 투쟁의 방식이 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일까요.

단순하지만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금 시대의 영화는 영상매체의 일부로서 너무나 좁은 장르가 되었고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영화를 통한 혁명의 가능성을 믿으며 삽니다. 지금 갑자기 하나의 형식적 실험이 떠올랐습니다. ‘다이어리 시네마’라고 이름 붙이고 싶군요. 전 쉬는 날엔 대개 TV를 보며 지냅니다. 그리고 TV에 펼쳐진 여러 거짓된 정보와 권력의 야욕에 화를 내지요. 이런 저의 모습을 매일 일기처럼 찍어 영화로 재구성한다면 어떨까요. 기록이라는 영화의 원시적 힘을 다시금 꺼내 보는 것입니다. 사회를 규정하는 미디어의 정보를 저의 사적인 기록으로 재편하여 자문자답한다면 미디어의 정보와 영화적 정보 사이의 균열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성실한 작업을 하려면 술과 담배를 좀 줄여야겠지만요. (웃음)

- 감독님께선 “모든 영화는 풍경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독님의 다이어리 시네마는 일종의 미디어 풍경론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실제의 조각이 아닌 미디어 속의 풍경에서도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죠. 한 가지 궁금합니다. 지금처럼 대개의 영화적 시공간을 CGI로 만들고, 그린스크린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영화들도 풍경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커다란 변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을 통해 만들지라도 연출자의 사유와 의지에 맞는 풍경을 구현할 수 있다면 충분하겠죠. 권력에 대한 저항을 풍경의 돌파를 통해 이뤄낸다는 점에선 아날로그 영화든, 만들어진 이미지의 디지털 영화든, TV 프로그램이든 똑같습니다. 핵심은 자신에게 내재한 이미지를 그저 바깥으로 반영하거나 과거의 모습을 재현할 뿐인지, 세상의 본질을 또렷하게 바라보는 주체로서 이미지를 대하는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이론은 이론입니다. 이론을 파악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마땅합니다. 과거와 현재의 시스템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저 살 것이 아니라 부정해야 합니다. 부정의 방식이 약할수록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도 사그라듭니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고 만족하며 더이상 해바라기를 그리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만의 해바라기를 그려야 합니다.

<약칭: 연쇄살인마>

- 해바라기를 언급하시니 <약칭: 연쇄살인마>에서 종종 등장하는 해바라기 숏과 <도주>에도 등장하는 해바라기 숏이 겹쳐 떠오릅니다.

허허. 발견해주셨군요. 해바라기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확신을 가진 이들도 고개를 숙이지 않지요. 이러한 해바라기의 성질을 기리시마의 인생에 빗대고 싶었습니다.

- 2019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발행한 <아다치 마사오의 은하계>에선 “현재의 예술은 파괴의 역사를 주시하는 노력이 고갈되어가고 있으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의지와 역량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메시지의 힘도 약해지고 있다”라고 적었습니다. 이 생각엔 변함이 없으신가요.

그렇습니다. 현대 예술은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과거의 것을 탐닉하며 만족하고 있습니다. 부정하고 파괴하는 힘이야말로 예술의 근원입니다.

- 근래 일본영화에 대한 고견도 여쭙고 싶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등 젊은 감독이 세계에서 주목받는 일을 어떻게 보시나요.

흥미도 없고 재미도 없습니다. 무척 성실하다고는 생각합니다만 매번 비슷한 서사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의문입니다. 물론 모든 젊은 감독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지만, 지금 널리 주목받는 일련의 영화들은 대개 그렇다고 느낍니다.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영화를 만든 사람의 의지와 세계를 향한 사유가 더 깃들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 <도주>와 <레볼루션 +1>의 시각적 유사성에 대해서도 여쭙고 싶습니다. <도주>는 시퀀스 사이의 잦은 화이트아웃(백색 화면이 스크린을 뒤덮는 방식)이 활용됩니다. 그리고 두 영화의 마지막엔 빛이 인물들을 집어삼키듯 화면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감정, 정보의 맺고 끊음과 서사의 막간을 종용하는 이 방식은 <이탈리아에서의 투쟁>(1971) 등에서 고다르가 활용했던 검은 화면의 방법론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고다르의 방식과 비슷한 접근일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질문하고자 한다는 연출자의 바람이 담겨 있단 점에서 말입니다. 다만 고다르가 영화를 일부러 ‘멈추는’ 쪽에 가까웠다면 저는 반대로 영화의 이미지를 완전한 ‘자유’의 형태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빛이라는 무(無)의 형상이 영화를 녹이면서 관객에게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의 순간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 팔레스타인의 비극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영화를 만들 계획은 없는지요.

물론 있습니다. <13개월>이라는 제목의 각본을 써서 제작위원회까지 꾸렸습니다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결과적으론 아직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에 대한 영화를 구상하기도 했습니다. 지진 직후 일본 내 52개 원전 인근을 돌아다니며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동일본대지진은 분명한 인재입니다. 이를 눈감고 넘어가려는 일본 사회의 태도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크나큰 사건 앞에서 모두가 말을 잃을 수밖에 없던 이유를 되묻는 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일본대지진에 대한 2천여편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다고 들었는데, 저 역시 이를 잊지 않고 재난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자 합니다. 아직은 재정적으로 어려워 진행이 더딘 상태지만 마냥 기다리진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찍어야지요.

- 반세기 넘게 영화를 통한 투쟁을 이어오셨습니다.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글쎄요. ‘최종’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니까요. 매일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우듯이 그저 해나갈 뿐입니다. (웃음) 영화가 이 세상을 해방할 때까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진제공 우즈마사(UZUMA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