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의 총괄프로듀서를 맡은 고바야시 산시로는 2006년에 설립한 영화 제작·배급사 우즈마사(UZUMASA)를 통해 아다치 마사오 감독과 연을 이어오고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일본 핑크영화의 대부 와카마쓰 고지 감독을 통해 시작됐다. 고바야시 프로듀서는 1970년대에 다수의 핑크영화에 출연했던 연극계 출신의 배우이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 덕에 고바야시 프로듀서는 와카마쓰 고지 감독의 절친한 동네 술친구였다. “우즈마사 사무실과 와카마쓰 감독님의 사무실 중간에 있는 술집에서 자주 만났고, 내가 나타나면 감독님은 ‘우리 돈줄이 왔구나!’라며 반겨주시곤 했다.” 그러던 중 2012년 와카마쓰 고지 감독이 타계했다. 우즈마사는 장례식의 접수를 도맡았고 아다치 마사오 감독은 장례식의 위원장(한국의 상주와 같은 역할.편집자)을 맡았다. 이때부터 우즈마사는 아다치 감독의 <단식 광대> <레볼루션 +1>의 배급을 맡으며 협업했고, <도주>에 이르러선 제작까지 함께하게 됐다. “일본 영화인이라면 아다치 감독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내가 이분의 작품을 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라며 깊은 감흥을 느꼈던 고바야시 프로듀서지만 영화작업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하게 제작자의 임무를 지켰다. “아다치 감독님의 영화엔 초현실적이고 실험적인 연출이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특징을 살리면서도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도주>의 편집에 대한 의견도 몇번이나 “투쟁처럼” 주고받았다.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을 위로하는 일련의 초현실적 순간이 있는데, 이것은 다소 무책임한 결말이 아닌지 감독님에게 문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완성본을 보고는 감동할 수밖에 없는, 필요한 장면이라고 느꼈다.” <도주> 가 아다치 마사오 감독 특유의 기이한 형식미와 인물의 드라마, 영화의 내러티브를 유하게 조율해낸 것은 이러한 ‘감독과 제작자의 투쟁’ 덕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도주>의 소재엔 분명한 논쟁의 여지도 있었다. 실제 기리시마 사토시의 죽음이 밝혀졌을 때 일본 대중은 “이제 와서 자신의 이름을 밝힌 일은 조금 치사한 방식이 아니냐”는 여론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다치 감독과 고바야시 프로듀서는 “기리시마의 도주가 투쟁의 방식일 수도 있다는 시선을 제시”하려 했으며 나아가 “그간 우리가 펼쳐왔던 일본의 투쟁 방식이 옳은 방법을 취했었는지, 혹은 합당한 목적을 지녔었는지 우리 사회가 꼭 돌아보길” 바랐다. 덧붙여 고바야시 프로듀서는 “최근 일본의 젊은 세대는 정치와 분리돼 있다고 느낀다. 다만 정치란 일상의 문제”라며 “최근의 엔저 현상으로 내가 외화를 수입하기 어려워진 것처럼 자신의 일상에서 벌어진 어떠한 변화와 사건이라도 모두 정치에 연관”돼 있단 사실을 영화로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언더그라운드 영화의 편수는 늘고 있으나 대개의 소재가 자기 중심의 신변잡기에 가까우며, 사회와 시대에 대한 너른 시선이 부족”하단 안타까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에 우즈마사는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만주에 남겨진 여성들이 어떤 피해를 겪었는지 알리고 증언하는 <구로가와의 여자들> 등 전후 80년을 돌아보는 3편의 영화”를 올해 선보일 예정이다. “과거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일본이 아시아에 가했던 잘못이 풍화되어 잊히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 영화를 만들겠다.”
[인터뷰] 역사의 풍화를 막기 위해, <도주> 고바야시 산시로 총괄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