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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신중한 확신, <메리 킬즈 피플> 배우 이보영

이보영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한 발짝씩 나아가는 사람 같다. 지켜야 할 대상은 직접 낳은 아이(<신의 선물–14일>)이거나 혈연과 상관없이 보호하고 싶은 아이(<마더>)이기도 했고 때로는 커리어나 지위(<대행사>)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신작 <메리 킬즈 피플>에서는 ‘미친 신념’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극 중 그가 분한 응급의학과 의사 우소정은 더이상 치료 방법이 없는 환자에게 그래도 인생은 고귀하니 버티라는 말 대신 조력 사망을 시행한다. 은밀하지만 안정적으로 이어지던 소정의 삶은 필요한 약물을 구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고로 인해 위태로워진다. 악조건에서도 자기 일을 계속해나가는 소정은 이보영의 심지 굳은 여자들 계보에 이름을 올리며 배우 이보영에게 신뢰를 더한다.

- <메리 킬즈 피플> 대본을 받기 며칠 전, 70년을 함께 살아온 캐나다인 부부가 조력 사망을 선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고.

남편(배우 지성)과 이 얘기를 하면서 저 부부는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홀로 남겨지지 않아도 되니까. 내가 내 몸을 아직 컨트롤할 수 있고 정신도 또렷할 때 마지막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도. 함께 나이 들어가며 남은 삶에 관해 자주 대화한다. 몸은 점점 예전 같지 않고, 친구들은 하나둘씩 떠나갈 테고, 자식들도 커서 각자의 삶을 살겠지. 그러면 많이 외롭겠다. 그렇다고 슬픔에만 빠져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다짐한다. 내 곁에 끝까지 남을 유일한 내 친구, 먼저 가지 마! 아프지 말고 건강하자.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서포트하고 최대한 민폐 끼치지 말자. 매일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집에 <메리 킬즈 피플> 대본이 들어왔으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 아파하는 환자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과 그럼에도 그래서는 안된다는 마음 사이를 오가며 작품에 몰입하게 되더라. 대본을 어떻게 읽었나.

우리 사회도 이제는 이런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며 대본을 한장 한장 넘겼 다. 한국도 이미 오래전에 고령화사회에 진입했으나 노년의 삶을 화제로 삼는 데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있다. 100세 시대라고 했을 때 예순에 정년퇴직하면 40년이나 남는데도 말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또 어떤 일을 하고 누구와 부대끼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 자연스럽게 말할 필요가 있다. 이 안에는 우리 드라마가 다루는 조력 사망도 포함된다. 조력 사망을 선택한 사람들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자는 작품의 메시지에 충분히 공감했고, 이번만큼은 사회적 화두를 던지는 작품에 참여해 보자는 생각이 들어 출연을 결심했다.

- 지금 하고 있는 고민에 맞닿은 작품에 더 끌리는 편인가.

그럴 때가 많은 것 같다. 정서경 작가님의 <마더> 를 했을 때가 첫째 딸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머릿속이 온통 아이라는 작고 작은 존재로 가득했다, 세상의 모든 아이는 건강하고 사랑받고 안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정말 슬펐다. 내가 모든 아이를 구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속이 끓었다. 그런 내 마음이 고스란히 <마더> 안에 있었다. 또 다른 작품 선택 기준은 내가 정말 연기해보고 싶은 신이 있는지다. 직접 뱉어보고 싶은 대사를 만나 몇번이고 그걸 계속 중얼거릴 때, 어떤 장면을 너무 찍고 싶어서 전날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연기가 재미있다고, 이 일이 정말 좋다고 느낀다.

- 소정은 조력 사망이라는 쉽지 않은 일을 실행하면서도 전혀 자기도취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환자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알아내고, 도와드릴 방법을 함께 찾아가고 있다”라고 말하며 언제나 겸손한 태도를 유지한다.

기본적으로 소정은 선한 사람이라고 전제하고 캐릭터에 접근했다. 눈앞의 환자가 겪는 고통을 자기 일처럼 느끼고 어떻게든 편안하게 해주고 싶어 한다. 설령 그로 인해 위험해지더라도 말이다. 다만 소정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했다. 주인공인 그가 자주 울어버리면 이야기가 감정 과잉 상태가 빠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프로페셔널한 소정이라면 내가 당신의 마지막을 끝까지 책임질 거라는 믿음직한 모습을 환자에게 보여주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다.

- 흘러내리는 앞머리는 소정의 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포인트다. 최근작인 <하이드> <대행사> <마인>에서 보여준 단정한 쇼트커트와는 또 다른 분위기로, <내 딸 서영이>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혹시 스타일링에 아이디어를 보태기도 했을까.

나는 철저히 대본을 그대로 살리자는 주의다. 그래서 대사도 조사 하나 바꾸지 않고 애드리브도 하지 않는다. 흘러내리는 앞머리 역시 대본에 정확히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이수아 작가님이 소정의 헤어스타일을 부스스한 느낌으로 설정하셨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의도를 열심히 헤아려 작가님이 상상한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구현하는 것이 그동안 내가 지켜온 작업 방식이며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 정서경 작가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보영 배우는 시청률이 잘 나올 회차와 그렇지 않은 회차를 정확히 예측해서 그 눈을 갖고 싶다”라고 말한 적 있어 궁금하다. 이번 작품에서 시청자의 반응이 가장 강하게 올 것으로 예상되는 회차는.

드라마 방송 전이라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말을 아껴야 한다. (웃음) 소정은 이 일을 하면서 계속해서 곤경에 처하는데 그가 그 상황에서 얼른 빠져나오기를 바라게 되는 지점들이 있다. 거기서 시청자의 반응이 올 것이라 기대한다. 소정이 옳다고 믿고 그를 응원해주는 분들이 회를 거듭할수록 늘어나면 좋겠다. 그럴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드라마다.

- 작품을 고르는 선구안이 좋기로 잘 알려져 있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나고 싶나.

내가 맡은 인물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작품을 해보고 싶다. 이를테면 내 인물이 액션의 주체가 되어 달려나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이 발생하는 드라마. 그리고 캐릭터의 빌드업이 촘촘히 진행돼 인물 스스로 힘을 갖게 되는 이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