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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귓가에 남는 얼굴, <하이파이브> 배우 박진영 인터뷰

박진영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순수한 첫사랑이나 내면의 갈등을 조용히 견뎌내는 인물들이 떠오른다. 거기에 최근에는 감정을 분출하거나 거친 기운을 품은 캐릭터들이 하나둘씩 더해지며 박진영 하면 떠오르는 얼굴의 폭이 다양해졌다. 2017년 영화 데뷔작 <눈발> 속 숫기 없던 소년이 <하이파이브>에 이르러서는 영생을 외치는 사이비 교주가 되었다. <하이파이브>에서 박진영은 초능력자의 췌장을 이식받은 영춘으로 분한다. 신구 배우가 본래의 노인 영춘을, 박진영은 하이파이브 멤버 중 힐러 약선(김희원)의 능력을 빼앗아 젊어진 영춘을 연기한다. 건강한 20대의 몸에서 그치지 않고 초월적인 존재가 되려는 영춘은 남은 하이파이브 멤버들을 추적하며 끝없는 욕망을 드러낸다.

- 딸(진희경)에게 “어디 있다 이제 와?”라고 말하는 첫 등장 신에서 놀랐다. 노인의 목소리이면서도 동시에 신구 배우의 말투와 매우 흡사하더라. 여전히 영춘이라는 걸 관객에게 설득해야 하는 중요한 장면이었다.

신구 선생님의 목소리와 말투를 따라가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그런 디테일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캐릭터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장면마다 경중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어떤 신이든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맡은 인물의 욕망에 집중하다 보면 부담이 조금 덜어진다. 이 장면에서 영춘의 가장 큰 욕망은 젊어진 몸을 딸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안달 난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 태도나 걸음걸이에서 늙은 영춘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노인의 어떤 특징을 캐릭터에 반영했는지 궁금하다.

노인 연기를 피할수록 캐릭터가 더 입체적일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갑자기 젊은 몸을 얻게 됐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더 많이 상상했다. 다시 예전처럼 뭔가를 빨리할 수 있게 됐을 때, 그 감당 못할 기쁨이 겉으로 다 표출될 거라고 봤다. 예컨대 완서(이재인)를 내팽개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의 백숏에서 어깨를 살짝 돌렸는데, 그건 ‘이렇게 몸을 썼는데도 어깨가 멀쩡하네?’라는 영춘의 놀람과 감탄을 담은, 나만 아는 제스처였다.

- 젊어진 영춘이 신도들 앞에 처음 나서는 ‘새신아버지 대부흥회’ 시퀀스를 보면서 박진영 배우에게서 처음으로 무섭다는 인상을 받았다. 신적 존재의 무게감과 위협감을 표현하는 데 있어 어떤 고민이 있었나.

이 시퀀스는 굉장한 에너지를 보여주는 파트와 아주 감정적인 파트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신도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바위를 부술 때는 과시에 초점을 맞췄다. 반대로 아픈 신도들을 낫게 하는 순간에는 자신이 고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연기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자기 능력을 확신하는 영춘의 모습이 관객에게는 굉장히 기괴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 캐릭터를 만들 때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먼저 찾는다고. 하지만 영춘은 그러기 쉽지 않은 인물이다. 심판자의 위치에 오르면 자신의 죄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는 인물에 어떻게 접근했나.

더 단순해지고자 했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라면 하나의 설정을 정해 그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본을 보며 잡은 포인트는 소리를 막 쓴다는 점이었다.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은 자기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지 신경 쓰지 않는데 영춘도 그럴 거라고 느꼈다. 게다가 그는 감정을 조절할 필요조차 없는 위치에 있다. 그래서 목소리가 갈라지거나 거칠게 나오도록 그냥 두었다. 그런 날것의 소리가 오히려 영춘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 답변을 들을수록 캐릭터의 고유한 목소리를 찾는 작업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걸 알겠다. 이전 <씨네21>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히스 레저의 ‘목소리를 찾으면 캐릭터의 호흡을 찾을 수 있다’라는 말이 계기가 됐던 걸까.

배우 인터뷰 읽는 걸 좋아한다. 히스 레저의 말뿐만 아니라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목소리에는 캐릭터의 역사가 담겨 있다’라고 한 말도 기억한다. 목소리를 만드는 작업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언젠가 연기 선생님에게 “넌 소리를 다르게 쓰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라는 말을 들은 뒤부터 자각하게 됐다. 형제를 모두 연기한 <크리스마스 캐럴>에서는 형은 거칠게, 동생은 삑사리가 나도 그대로 두며 차이를 뒀다. <마녀>의 동진은 실제 내 톤보다 살짝 높게, <미지의 서울>의 호수는 톤을 낮추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이 지금 내가 연기에서 가장 재밌어하는 부분이자 나와 잘 맞는 작업 방식이다.

- 원래 소리에 예민한 편인가. 시끄러운 카페는 못 간다든지.

혼자 있는 걸 워낙 좋아하지만 밖에서도 잘 논다. (웃음) 내 목소리에만 예민하다. 갓세븐으로 오랜 시간 가수 활동을 하며 음반 녹음을 많이 했고 내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많다 보니 자연스레 민감해졌다.

- <프린세스 아야>에서 바리 왕자 역할을 맡아 더빙 연기를 한 경험에서 얻은 것이 많겠다.

물론이다. 말을 탄 채 칼을 들고 싸우는 장면에서 움직임 하나하나에 맞는 소리를 모두 맞춰 내야 했는데 이 경험이 나중에 후시녹음을 더 디테일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성강 감독님이 현장에서 많이 이끌어주셨지만 익숙하지 않아 내내 부끄러웠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드래곤 스마우그를 연기한 영상을 찾아보고 큰 자극을 받았다. 온몸을 써서 용의 감정까지 표현하는 모습을 보며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기도 했다.

- 이렇게까지 대규모인 프로덕션 작품도, 선하지 않은 역할도 처음이었다. 그만큼 <하이파이브>가 배우로서 전환점처럼 느껴졌을 것 같다.

영춘은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액션이 많았고 몸을 만들어가며 피지컬한 연기에 도전할 수 있는 캐릭터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강형철 감독님이 영춘 역할로 제안해주셨는데 주로 정의로운 인물을 연기해온 터라 놀랐다. 잘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감독님의 확신이 큰 힘이 됐다. 슬럼프에 빠지려던 시기에 불러주신 덕분에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이 작품을 하면서 몰랐던 내 모습을 마주하며 다시 용기를 얻었다.

- 지난해 11월에 전역했고, 군 입대 전 촬영한 작품들과 올해 상반기에 촬영한 작품이 연달아 공개됐다. 현재 박진영의 계획은.

하반기에 작품을 하나 더 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지속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사회인이 된 이후 스스로 쉰 적이 거의 없다. 다만 지금은 잠시 여유가 있는 시기라 여행을 한번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국내든 해외든,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갔다 오든 지금 있는 자리에서 잠시 떨어져보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