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햇살 같은 히어로가 세상에 어디 또 있을까. 심장을 이식받은 이후로 근원을 알 수 없는 파워와 스피드가 생긴 완서는 배우 이재인 고유의 낙천성과 외로움을 좇아 선명하게 그려진다. 자기만의 비밀이 생겼다는 으쓱거림이나 잘생긴 사람 앞에서의 음흉한 미소는 여고생 특유의 유머를 자아내고, 중요한 순간에 차분한 무게를 유지하는 균형은 쾌활한 태권도 소녀가 감춘 사적인 결핍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제야 세상과 관계 맺기 시작한 어린 히어로의 빛과 그림자를 이해한 이는 인터뷰 끄트머리에 반짝이는 말들을 덧붙였다. “<하이파이브>를 촬영하는 동안 내가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지, 그게 얼마나 큰 마음인지 새삼 다시 깨달았다. 요즘엔 혼자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크리스마스 배경의 좌충우돌 이야기를. 이제 막 후반에 다다랐으니 언젠가 모두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 <하이파이브>에 합류한 과정이 궁금하다. 강형철 감독이 오디션에서 어떤 요청을 했나.
여전히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완서는 행동이 할아버지 같고 말투도 무척 독특한 친구다. 이런 특징을 확인하기 위해 영화 <괴물>의 희봉(변희봉) 대사를 읽어보는 미션이 있었다. 또 액션이 무척 중요한 요소라 무술감독님 앞에서 발차기를 선보여야 했다. 그날 아주 잘 올라갔다. (웃음) 무술감독님도 가능성이 보이는 발차기라고 해주셨다. 유연성이 좋은 편은 아닌데 어릴 적에 태권도를 배운 게 몸에 남아 있는 것 같다. 평소 히어로영화를 좋아하냐는 질문도 있었다. 그래서 <데드풀>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더니 웃으시며 “그거 아직 못 보는 나이 아니야?” 하시길래 “아차차! 어쩌다 봐버렸습니다” 하고 답했다. (웃음)
- 영화 촬영이 한창이던 당시, 이재인 배우 또한 완서처럼 청소년기를 거치고 있었다. 어쩐지 완서가 가깝게 느껴졌을 것 같다.
오랫동안 혼자 지내온 외로운 완서는 하이파이브 어른들을 만나 친구를 사귀는 과정을 겪는다. 나 또한 이즈음에 연기 활동으로 출석이 어려워지면서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배우의 일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즐거웠던 학교생활이 끝나버린 건 너무 아쉽고 외로웠다. 그런데 촬영장에서 하이파이브 배우분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나의 상황이 완서와 딱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완서에게 유쾌한 친구들이 생긴 것처럼 나도 이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또 완서랑 내 말투가 무척 비슷하다. 사실 시나리오에서는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 조금 더 강했는데, 진짜 나로부터 완서를 끄집어내고 싶어서 실제 나의 태도나 반응, 습관에서 시작했다.
- 히어로로부터 심장을 이식받은 만큼 가장 강한 위력을 선보여야만 했다. 그린스크린 앞에서 VFX가 접목될 액션을 연기하는 경험은 어땠나.
처음에는 정말 많이 낯설었다. 하지만 현장에 계신 모든 분들이 전문가다. 어느 부분에 무엇이 나올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셔서 그걸 상상하면서 연기할 수 있었다. 꼭 그린스크린이 아니더라도 연기라는 게 상상을 바탕으로 표현해나가는 것이라 그 자체가 어색하진 않았다. 많은 장면들이 컴퓨터그래픽과 VFX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언덕을 뛰어 올라가는 장면은 실제로 언덕 중반까지 전속력으로 달렸고, 카트 체이싱은 내가 카트를 잡고 바람을 쐬면서 트레드밀을 달렸다. 가장 어려웠던 건 타격감을 주는 듯한 모션. 박진영 배우는 탁탁 끊어지게, 그래서 진짜 무언가를 강타하는 듯한 느낌을 정말 잘 살린다. 나도 이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서 근력운동을 많이 했다.
- 액션에 대한 즐거움이 느껴진다. 앞으로 이 장르를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다.
이젠 와이어가 내 친구다. (웃음)
- 하이파이브 히어로와 빌런의 싸움이 최정점에 다다랐을 때 완서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새로운 챕터를 연다. 완서라는 인물을 살아 있게 만드는 이 무적의 포즈. 어떻게 완성된 것인가.
그 포인트 동작은 현장에서 내가 아이디어를 낸 거다! (웃음) 전투를 촬영하면서 땀 분장을 계속 하니 머리가 젖어 있었다. 그래서 마치 완서가 변신하는 것처럼 시원하게 머리를 쓸어넘기면 어떨지 감독님에게 제안드렸다. 짜잔 하고 나타나는 느낌이랄까. 내가 워낙 히어로물을 좋아하고 많이 봐서 타이밍을 더 적극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촬영 때에는 이 장면이 어떻게 영상으로 나올지 궁금했는데 너무 멋지게 나와서 진짜 히어로가 된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정말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다. 한국에서 히어로물이 흔치 않고 그 역할을 맡는 것도 쉽지 않은데 내가 그 자리에 함께하다니. 정말 영광이다.
- 영화를 설명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코미디다. 지성 역의 안재홍 배우와 코미디 합을 많이 맞췄는데, 특히 리코더 신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웃음을 이끌어낸다.
리코더 신 너무 웃겼다. (웃음) 내가 안재홍 배우의 오랜 팬이어서 작품을 함께하는 게 너무 설레고 동시에 긴장됐다. 나도 밀리지 않게 재미있고 싶었다. 그런데 엄청 웃긴 장면들도 안재홍 배우는 차분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임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많이 배웠다. 코미디란 게 진지한 태도로 임할 때 훨씬 더 웃기다는 걸. 꼭 무언가를 해야만 코미디가 완성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 지성과 기동(유아인)의 잦은 싸움은 히어로 전체의 갈등이 되기도 한다. 그 끝에서 완서는 눈물을 보인다. 여기서 물음이 생긴다. 서로 알게 된 지 오래되지 않은 시점에, 심지어 평소 냉소적이던 완서는 왜 이 갈등에서 그렇게까지 영향을 받는 것일까.
완서는 어릴 적부터 또래와 교류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만큼, 일상적인 갈등을 경험할 기회도 많지 않다. 그러니 어렵게 사귄 친구들과 마음이 맞지 않을 때 완서는 마치 인생이 무너진 것만 같았을 것이다. 그게 완서의 첫 번째 사춘기다. 지성이 그런 말을 한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꼬여.” 정말 철학적인 말이다. <하이파이브>가 인물들의 전사를 많이 보여주는 편은 아니지만, 이 말을 통해 완서의 지난 시간을 추측할 수 있다. 몸이 아픈 동안 마음속에 쌓여온 감정과 설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터져버렸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