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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바로 옆 사람을 위한 판타지, <하이파이브> 강형철 감독 인터뷰

<하이파이브>로 만난 강형철 감독은 알려진 모습보다 한결 살이 빠져 있었다. 7년 만의 신작을 내놓는 일이 그의 수명을 좀 줄인 게 아니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들이 오갔지만 정작 그는 예전보다 훨씬 건강해졌다며 조용히 웃었다. “언론시사회 전날에도 평소와 달리 잘 잤고, 집 근처 작업실을 오가며 산책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걱정은 줄여 달라.” 한국전쟁 당시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탭댄스로 자유를 꿈꾸던 이들(<스윙키즈>)에게 맞춰졌던 그의 시선은 동시대 평범한 초능력자들로 향했다. 신원 불명 초능력자에게 장기를 이식받고 각기 다른 능력이 생긴 보통 사람 다섯명, 심장의 완서(이재인), 폐의 지성(안재홍), 신장의 선녀(라미란), 각막의 기동(유아인), 간의 약선(김희원)이 팀 ‘하이파이브’를 이룬다. 반면 여섯번째 이식자 췌장의 영춘(신구/박진영)은 이들의 능력을 흡수해 초월적 존재가 되겠다는 야망으로 멤버들을 좇는다. 귀를 사로잡는 음악을 타고, 소중한 사람을 향한 소박한 마음으로 흐르는 <하이파이브>는 그간 합심의 이야기를 만들어온 강형철의 영화답다. 신작을 두고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그가 좋아하고, 하고 싶고, 지향하게 된 세계로 뻗어갔다. 강형철 감독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완서 역의 배우 이재인과 젊은 영춘 역의 배우 박진영과 나눈 이야기가 이어진다. 극 중 초능력자들처럼 단단히 뭉쳐 만들어낸 작품에 담긴 진심과 열정을 들여다본다.

- <과속스캔들>의 아침 출근 타이틀백에서부터 <스윙키즈>의 클래식한 오프닝까지 늘 인상적으로 시작해 <하이파이브>는 어떻게 문을 열지 궁금했다. 이번에는 고전 벽화와 함께 BC 5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장엄하게 출발한다.

스릴러나 누아르처럼 시작하지만 실은 코미디라는 트위스트를 주고 싶었다. 초능력의 기원에 대한 미스터리한 뉘앙스를 얹는 것도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극 중 장기기증자의 초능력은 고대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서 기원한 거대한 힘이고, 그 힘을 가진 존재는 때론 신으로 추앙받거나 때론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이야기. 그렇게 수많은 몸을 거쳐 전해진 힘이 어느 날 한국의 한 장기기증자에게 깃들고 그의 뇌사 이후 여섯명에게 나눠지며 <하이파이브>가 시작한다.

- 여러 작품을 함께해온 안나푸르나필름의 유성권 프로듀서와의 아이디어 회의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들었다.

<타짜-신의 손> 이후 2014년쯤이었을 거다. 유 PD가 워낙 아이디어 뱅크다. 초능력자에게 장기를 이식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로그라인을 듣는데 조합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스윙키즈>를 끝내고 난 뒤 다음 작품을 고민하던 중 문득 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초고가 생각보다 술술 써졌다. 유 PD가 떠올린 언덕길을 달리는 교복 입은 소녀의 이미지가 큰 줄기가 됐고, 이 소녀에게 가장 강한 힘을 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괴력 소녀를 중심으로 다른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원래도 글을 쓸 때 처음부터 모든 걸 정해놓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괴력 소녀와 다르게 여리여리한 아저씨가 한명 있으면 어떨까, 폐 이식 능력자는 숨을 참거나 뱉을 때 너드한 느낌이 나면 좋겠다. 각막 캐릭터는 시각과 와이파이와 엮어보자 하는 식으로 이어갔다. 이렇게 느슨하게 설정해둔 인물들을 머릿속에 풀어두면 어느새 자기들끼리 움직이고 말하고 관계를 만들어간다. 그럼 나는 그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 선녀에게만 뚜렷한 능력을 주지 않았다. 관객이 선녀의 능력을 모호하게 받아들일 거라는 염려는 없었나.

공격, 타격계 능력이 있다면 힘을 옮겨주는 순환계 역할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후에 선녀도 빛나는 순간이 있다. 팀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을 때 선녀가 아주 시원하고 결정적인 한큐를 만든다.

- 완서가 초고속으로 오르막길을 내달리는 시퀀스를 보면서 <스윙키즈>에서 판래(박혜수)가 <Modern Love>에 맞춰 달리던 시퀀스의 상승 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뛰는 완서와 춤추는 판래. 둘 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 순간이라 더 겹쳐 보였다.

오르막길 시퀀스의 구조 자체는 단순하다. 뛰고, 점프하고, 착지하는 흐름이라 컷도 최대한 심플하게 짰다. 다만 VFX가 많이 들어가니 계산적으로 접근했고 타이밍과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중간에 음악이 바뀌면서 재설계를 하기도 했다. 중고등학생 시절 즐겨 듣던 스매싱 펌킨스의 <I Am One>이 들어가 감회가 새롭다. 믹싱을 섬세히 공들이고 악기도 추가하면서 지금의 사운드가 완성됐다.

- 음악을 듣다가 장면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고. 어쩐지 기동의 능력을 소개하는 스나프(Snap!)의 <The Power> 시퀀스가 그런 경우일 것 같았다.

음악과 신이 늘 엇갈리듯 동시에 온다. 기동이가 좀 자랑쟁이지 않나. 그래서 ‘I got the power’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곡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짧고 굵은 리듬에 맞춰 걸어가는 기동이를 점프 매칭 컷으로 연결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머릿속에서 콘티가 순식간에 그려졌다.

- 거대한 힘이 생긴 이들이 그 힘을 어디에 발휘할지를 유심히 봤다. 팀 하이파이브가 달려가는 곳은 젊은 노동자가 갇힌 새신재단의 작업장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초능력이 있다면 가장 먼저 쓰여야 할 곳이 이같은 노동 현장이라고 생각해서 내린 선택이었을까.

‘우리 주변 사람들이 초능력을 갖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장면이다. 판타지를 다루지만 현실에 발 붙이고 싶었다. 하이파이브 멤버들의 삶이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배경 역시 익숙한 사회 공간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산업재해나 하청노동 현장처럼 뉴스에서 자주 접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들어왔다.

- 같은 초능력을 두고도 하이파이브와 영춘의 사용 방식은 극명하게 갈린다. 오로지 자기 권세와 영생을 위해 능력을 쓰는 영춘은 힘의 윤리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인물이다.

영춘의 능력은 주는 게 아니라 빼앗는 쪽이다. 그건 그가 살아온 방식이나 지위, 욕망과도 맞닿아 있다. 좀더 확장하자면 그는 양극화 시대의 리더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너희 같은 것들이 내놓으라면 내놓고 해야지, 왜 이기려고 해”라는 젊은 영춘의 대사가 그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강자는 다 가져야 하고, 약자는 멍청하니까 못 가지는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자기 기준의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이기에 전형적인 빌런이라고 보긴 어렵다.

- “용서받지 못할 걸 아니까 신이 되려 한다”라는 대사에서 그래도 영춘이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맞을까. 또 그에게 세계 제패 같은 궁극적인 목표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영춘은 원래 무신론자였기에 교주 행세를 하며 부와 권력을 누릴 때는 별다른 죄의식이 없었다. 하지만 초능력을 얻은 뒤부터 상황이 달라진다. ‘신이 정말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처음 느낀다. 그러나 그는 속죄가 아닌 하이파이브의 초능력을 모두 흡수해 진짜 신이 되겠다는 쪽을 택한다. 영춘의 목표는 단순하지 않다. 영생에 대한 집착, 초월적 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이 뒤섞여 복합적이다. 그가 되고자 하는 신이 악마든, 죽음의 신이든 말이다.

- 새신재단 지하 공간에서 멤버들이 젊은 영춘과 대격돌하면서 후반부 액션이 펼쳐진다. 맞부딪혔다가 솟구쳐 올랐다가 빙글빙글 돌기도 하면서 힘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난장의 재미가 가득하다.

전 스태프의 공동 목표는 ‘진심으로 합시다’였다. 오락영화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액션이 집약된 후반부만큼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격투 신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타격감을 실감할 수 있는 액션을 중심으로 디자인했고 집에서 본다면 아래층에서 층간소음인 줄 알고 뛰어올라올 정도로 사운드를 쿵쿵 울리게 만들자는 목표도 함께 세웠다.

- 강형철의 영화를 떠올리면 복수의 인물이 나란히 앉아 있는 그림이 연상된다. 그동안 앙상블의 영화를 주로 만들어왔는데, 한 사람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전기영화 같은 장르에는 마음이 동하지 않나.

전기영화도 정말 좋아한다. 이를테면 밀로스 포먼의 작품들. 전에 진지하게 ‘누구 이야기를 해볼까’ 하며 혼자 아이템을 구상해본 적도 있다. 다만 여러 인물이 함께 있는 그림에 내가 좀더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나 <풀 몬티> 같은 영화 포스터를 좋아했는데, 프레임 안에 어딘가 부족한 인물들이 모여 있는 그림에 이상하게도 계속 끌린다. 그래서 지금까지 앙상블 영화를 만들어온 것 같다. 그래도 운명이 허락한다면 전기영화도 꼭 해보고 싶다.

- 음악과 별개로 효과음을 활용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듯하다. <과속스캔들>의 드럼, <타짜-신의 손>의 화투, <스윙키즈>의 탭댄스, <하이파이브>의 핑거 스냅까지. 장면의 리듬을 맺고 끊거나 전환할 때 인상적으로 사용되던데, 우연의 일치일까.

그럴 리가. 소리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악기이자 연주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분야이기도 해서 깊이가 충분해지면 그때 관련한 이야기를 풍부하게 나누고 싶다.

-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하나쯤은 있을 것 같은데. 기타나 피아노, 아니면 지성이처럼 리코더라도….

옛날에 이것저것 다 해보긴 했다. 그런데 악기에는 재능이 없더라. 듣는 걸로 만족하고 있다. (웃음)

- 플레이리스트가 궁금하다. 만약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게스트로 나가 요즘 자주 듣는 곡을 추천해달라고 부탁받는다면 어떤 곡을 고르겠나.

어렵다. 어젯밤에 60년대 말레이시아 음악을 잠깐 듣긴 했는데 요즘은 딱히 즐겨 듣는 음악이 없어서다. 원래는 좋아하는 곡을 반복해서 듣는 스타일이었는데 최근 들어 랜덤 플레이에 재미를 붙였다. 유튜브 뮤직에서 추천해주는 내 취향의 음악들을 그냥 틀어놓는다. ‘이 노래 뭐지?’ 싶어도 굳이 찾아보지 않고 흘려듣는다. 이런 여유로운 상태가 장면을 떠올리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작명의 비밀

“완서는 박완서 작가님이 맞다. 워낙 좋아해 집 책장에 작가님 책들이 쭉 꽂혀 있는데, 어느 날 글을 쓰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특히 자전적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속 들판을 뛰어다니는 소녀의 싱그러움이 확 와닿았고 그 느낌이 주인공 소녀와도 잘 어울려 자연스럽게 작가님 이름을 가져오게 됐다. 지성의 경우는 세계를 무대로 쉼 없이 뛰던 박지성 선수의 모습이 폐 이식 캐릭터의 패기와 닮아 있다고 느꼈다. 기동은 어감과 느낌이 좋아 예전(기동이란 이름은 <과속스캔들> <스윙키즈>에도 등장한다.-편집자)부터 애정해온 이름이고, 실제 친구 동생 이름이기도 하다. 철없고 순수한 각막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다시 썼다. 약선은 단순하게 약손에서 따왔다. 선녀 역시 친구 동생 이름에서 가져왔다. 작명에 특별한 철학이 있는 건 아니다. 이름이 주는 감각적인 인상과 분위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