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찍 진로를 찾은 편인데 10대 때 장래희망으로 <굿보이> 같은 경찰을 꿈꿔본 적은 없을까요.
전혀요! (웃음) 그런데 제 안에 정의롭고 깨끗한 사회에 대한 바람은 늘 있어요.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너무 거창한가 싶어 망설여지긴 하지만, 저는 모두가 건강하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사회가 좀더 올바르게 밝아졌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라요.
- 때로는 작품 선택의 기준이 되기도 하겠네요.
K콘텐츠가 전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외국 팬들이 작품을 통해 한국어를 공부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저도 그 영향력을 염두에 두는 편이죠. 제가 나온 작품을 보고 대화를 할 때 기왕이면 서로 건강한 메시지를 나눌 수 있다면 좋잖아요? <굿보이>는 ‘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 만하구나’를 생각하게 해줘요. 장르물에서 어쩔 수 없이 비리 경찰들이 부각되어왔다면, 정직하고 투철하게 살아가는 경찰들의 이야기도 많이 보여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제가 잘 이야기한 건가 모르겠어요.
- 재현의 대표성이 갖는 힘이 있고 균형도 중요하죠. 윤동주의 정의감과 별개로 인간 박보검이 참기 힘든 불의는 어떤 것일지도 궁금한데요.
강약약강이라고 하나요. 강한 사람에게 비굴하고 약한 사람 앞에 더 강한 모습이요. 그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하는 마음을 넘어서 그런 것들을 보고 싶지가 않아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건 아니지 않을까’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 과거의 현장은 더욱 위계가 분명한 곳이었잖아요. 경쟁을 부추기는 업계의 분위기도 있고요.
그 부분은 저도 신기한데요. 관계와 만남에 축복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정말 좋은 분들과 만났어요. 최근 몇년간 제 안의 화두가 외유내강인데요. 겉으론 유해 보여도 속은 강하다, 그게 무슨 뜻일까를 자주 질문하게 됐어요. 할 말을 해야 할 때 할 줄 아는 사람? 아니면 리더십이 있는 사람? 저는 그 의미를, 강한 사람과 강하게 맞붙기보다 그 사람을 잘 헤아리는 방식으로 포용하고 약한 사람을 피상적으로 연민하는 것이 아닌 깊이 있는 존중으로 맞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각한 것이에요.
- 주변인들이 남긴 미담이 워낙 많은 배우입니다. <폭싹 속았수다> 때만 해도 아이유 배우가 열띤 칭찬을 하는 모습이 화제가 됐고요. 촬영 현장에서 좋은 동료가 된다는 건 실질적으로 어떤 자질을 말하는 걸까요. 상황이 안 좋고 체력적으로도 지쳐 서로가 투박해질 만한 순간에 드러나는 작은 차이 같은 것일지요.
그건 그냥 고통에 반응하는 역치값이라고 할까, 사람마다 다 다를 텐데 제가 꽤 잘 견딜 수 있는 사람이어서인 것 같아요. 실제로 아픈 것도 되게 잘 참고요. (웃음) 그러니까 다 같이 힘들 때 분위기를 살짝만 더 힘차게 가져가보는 거죠. 상대방이 편하면 제 마음이 편한 타입이기도 해요.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하는 건, 제 딴엔 배려한 행동이 왜곡되어 받아들여질 때도 있더라고요. 속마음을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 편이라 그랬던 것 같아요. 이제는 소통 부족으로 괜한 오해가 생기지 않게끔 조금 더 정확하게 대화하려고 노력해요. 나는 이러이러해서 정말 괜찮으니 편하게 해달라, 고요. 나름의 요령과 지혜가 생긴 정도죠.
- 그렇게 애쓰고 나서 집에 돌아가면 그제야 푹 쓰러지는 건가요, 아니면 여전히 멀쩡한 건가요.
아, 제가 회복력도 진짜 빨라요. 맛있는 거 먹고 잘 자고 나면 놀라울 만큼 금방 충전되거든요.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동주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 친구의 진정한 초능력이라고 한다면 이런 회복 능력일 거라고 봐요.
- 대중을 위한 배우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떳떳하고 싶은 마음을 읽게 됩니다.
예능 <My name is 가브리엘>을 하면서 절절히 생각했어요. 같이 일했던 동료들,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를요. 외국인로서의 낯선 삶 속에 제가 뛰어들어서 그 사람으로 대신 살아보는 거잖아요. 그 시간 동안 체감하게 되는 건 이 사람이 주변인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비록 72시간 동안 대신 살아가는 게 전부이긴 해도 이 사람의 삶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게 돼요. 정말 잘 살아내고 싶은 거죠. 그 프로그램을 하고 나서 박보검의 인생도 잘 써내려가고 싶다고 마음을 더 다잡았어요.
- 30대의 새로운 장르들을 개척해나가는 지금, 박보검의 용광로가 막 끓고 있는 시기 같아요. 선하고 로맨틱했던 청춘의 아이콘이 조금씩 주름을 입어갈 시간들이 기대돼요. 복서에 비유하자면 앞으로의 페이스 조절에 대해 고민할 법합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기대하고 바라는 모습이 부담이었던 적은 없어요. 이를테면 선하고 무해하고 모범적인 인상을 가질 수 있었다는 데 저는 무척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아가면서 늘 한번 더 주의하고 생각할 수 있었고요. 그런데 제 삶의 경험이 넓어진 만큼 그동안 못해본 역할, 성격과 직업들로 확장해가고 싶은 의지도 뚜렷해졌어요. 다만 너무 직설적이지 않게, 조급하지 않게요. 한꺼번에 과식하지 않으려고요. 제게 다가오는 파도를 잘 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