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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이라도 더 들여다보자, 배우 박보검 인터뷰 ➀

- 배우 박보검으로서 앞으로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주제로 직접 화보의 스토리라인을 만들어주셨어요. 턱시도 착장은 슈퍼맨 클라크 켄트가, 청재킷은 제임스 딘이 떠올랐습니다.

신기하네요. 제가 준비한 여러 레퍼런스 중 실제로 제임스 딘 모습이 있었어요! 어린 시절 저에게 성공한 배우의 이미지는 턱시도를 입은 모습이었어요. 만약 제가 레드카펫에 서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떻게 웃을지, 얼마나 떨릴지 상상해보곤 했거든요. 지금은 시상식 참석만이 아니라 MC나 시상자로도 무대에 설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영광인가요. 턱시도엔 그런 제 감정들이 담겨 있고요. 실제로 슈퍼맨을 떠올린 것도 있어요. <굿보이>의 동주가 한국형 히어로로서 다가갔으면 해요. 필름 캔과 슬레이트로 연출한 화보에선 앞으로 제 인생에 새로운 이야기들을 많이 써내려가고 싶다는 소망을 담았어요. 제 인생이 하나의 영화라면 가능한 한 다양한 역할들과 변화하는 챕터로 채우고 싶어요.

- <굿보이>는 군복무 중 일찌감치 낙점했다고요.

아무래도 대본을 받고 섣불리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보니 ‘마음을 정함’ 정도였어요. 2022년 전역 후 <폭싹 속았수다>를 먼저 촬영했기 때문에 <굿보이> 감독님도, 제작진도 좀더 기다려주셨죠. 저로선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사실 제가 군대에서 심나연 감독님의 <괴물>을 진짜 재밌게 봤어요. 생활관에 같이 있는 친구들에게 모두 전파할 정도로….

- 생활관에서 다 함께 볼만한 작품으로 흔히 연상되는 선택은 아닌데요. (웃음)

그렇죠? 그런데 다들 너무 재밌어했어요. 한방에 모여 다 같이 봤거든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군 입대를 했으니 외출도 휴가도 자유롭지 못해 다 같이 TV 볼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서 그랬을지도요.

- <굿보이> 대본의 어떤 점이 전역 후의 미래를 기약할 정도로 마음을 움직였나요.

시민의 입장에서 믿음이 가서? (웃음) 특기가 운동인 경찰들을 떠올리니 우선 든든하게 느껴졌고요. 메달리스트 출신 국가대표 운동선수들이 경찰로 변신해서 무언가를 지켜낸다는 설정 자체가 흥미롭고 신선했어요. 저도 이후에 알게 된 건데 실제로 비슷한 제도가 있었대요. 은퇴한 국가대표를 특채 경찰로 채용할 수 있도록 장려했던 거죠. 빠른 전개가 돋보이는 대본이어서 만화책 한권을 독파하는 듯한 리듬도 좋았고, 무엇보다 통쾌했어요.

- <응답하라 1988> 이후 필모그래피에서 오랜만에 희극적인 톤이 살아 있는 드라마이고 이번엔 작품의 전선을 이끌어가니까요. 새롭게 터득한 코미디의 묘가 있나요.

<폭싹 속았수다>의 양관식은 진지한 인물인데 그 속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위트가 발생해요. 나는 웃기려고 한 게 아닌데 보는 사람은 웃긴 거죠. 설정상 관식에게 약간 허당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굿보이>의 동주 역시 본인의 의도와는 별개로 빈틈을 보여줄 때가 좋아요. 그게 잘 살았으면 했고요. 제가 뮤지컬 <렛미플라이> 첫 무대를 앞두고 있을 때 오의식 배우님이 코미디는 간절하고 진실되어야만 따라온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제가 재밌으려고 재치 부리면 정작 웃기지 않더라고요.

- 복싱 메달리스트가 가질 만한 날렵한 태와 승부사 기질을 입는 과정은 어땠나요.

고등학생 때 잠깐 복싱을 배운 적이 있어요. 하지만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 선수처럼 꾸준한 훈련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죠. 반년 이상 유산소운동, 근력운동, 복싱 훈련을 지겹도록 했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조금씩 운동신경이 깨어나고 자세가 달라지는 게 느껴질 때의 보람은 확실했죠. 배우들의 마음이 비슷할 것 같은데,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필드에서 현역으로 뛰는 분들에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인정을 받는 순간만큼 기쁠 때가 없어요. 이번에도 관장님, 코치님들이 칭찬해줄 때 신나더라고요. 아마 책임감의 문제일 거예요.

- <굿보이> 포스터를 보고 반가웠던 건, 구릿빛 피부에다 상처에서 난 피와 땀으로 절어 있는 복서 박보검의 새 얼굴이었습니다. ‘맑고 무해한’ 인상으로 형용되는 인물이 아니라 아드레날린형 인간에 가까워서요. 땀냄새가 훅 끼칠 것만 같은.

<굿보이>는 제게 장르의 시작이에요. 이전에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제가 몰랐던 저의 연기를 발굴하고 도전해보려고요. 한계에 부딪쳐가면서 저를 깨워줄 작품과 만나고 싶어요. 한 배우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 지점을 충족시켜주고 싶은 욕망도 있고요. <폭싹 속았수다>의 관식과 <굿보이>의 동주가 확연히 다른 점도 개인적으로는 좋은 자극이 됐어요. 둘 사이를 성큼 건너갈 때의 이상한 행복감이랄까.

- 30대의 박보검에게 첫 아버지(<폭싹 속았수다>), 첫 활극(<굿보이>)이 찾아온 셈이네요.

나이에 따라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내면의 층이 조금씩 다르잖아요. 역할도 그렇게 된다면 좋겠죠. 한살 한살 나이 들 때마다 더 자주 하게 되는 생각이 있는데요. ‘아, 내가 만나고 마주하는 사람들, 상황들을 통해서 시야가 달라지고 있구나’ 싶은 거예요. 타인의 삶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하긴 조심스럽고, 그래도 전보다 더 귀 기울여보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 같아요. 조금씩이라도 더 들여다보자, 그렇게 생각하곤 해요.

- <폭싹 속았수다>는 배우 입장에서는 동시대도 아닌 아버지상을 소화하는 어려운 작업이었을 듯합니다. 관식이란 인물이 남긴 흔적은 무엇인가요.

나도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느끼게 해준 것입니다. 저는 관식이 세상에 없는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충분히 공감했고 이해도 됐어요. 그래서 제게는 더 소중한 어른의 모습이고요. 시간이 지나고 나서 더 애틋한 건, 유독 사람들이 제게 이 캐릭터의 이름을 말해준다는 거예요.

- 금명이가 워낙 관식이를 자주 불렀죠. (웃음)

귓가에 생생해요. 돌아보면 제 배우 인생에서 이름으로 많이 불리는 캐릭터가 세명 있어요. <응답하라 1988>의 최택. <구르미 그린 달빛>의 왕세자 이영. 그리고 <폭싹 속았수다>의 양관식. 배우의 이름만큼 캐릭터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준다는 건 귀한 선물임을 깨달아요.

- 눈가에 물기가 고였을 때 클로즈업에서 발휘되는 정서적 감화력은 동세대 배우 중 독보적입니다. 박보검의 눈망울이 멜로드라마적 애수를 주로 품었다면, <폭싹 속았수다>는 깊은 희로애락이 응축된 눈물을 마주하게 된 것 같아요.

과찬이세요. 주제상으로나 감정상 그럴 수밖에 없는 거라 생각해서…. 저는 장년 시절을 연기한 박해준 선배의 공이 크다고 봐요. 유년기의 관식을 맡은 이천무 배우와 청소년 관식을 연기한 문우진 배우 덕분이기도 하고요. 리딩할 때 다들 한번씩 뵙고는 이후로 만날 기회가 없었어요. 우리는 다 한 인물이니까 같이 붙을 수 있는 촬영 장면들이 없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이 존재함으로써 더 확실히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었어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서로 리딩했던 것들을 기억하고 연기했거든요. ‘내가 저 삶을 다 살았구나’ 하는 걸 몸으로 느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