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레틱>은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감독이 10여년간 머릿속에서 굴리며 애정을 키워온 영화라고 들었다. 작품과 연을 맺은 계기는.
기존 촬영감독을 대신해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감독의 전작 <65>의 재촬영을 도운 적이 있다. 그때 두 감독을 알게 됐는데, 어느 날 <헤레틱> 시나리오를 전해주더라. 그 후 제작이 진전되지 않는 것 같더니 2023년 미국작가조합, 영화배우조합의 파업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A24는 독립영화 제작·배급사라서 파업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아 작업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 종교와 믿음이라는 거대한 테마를 집 한채 안에서 다루는 실내극이다. 시나리오는 어떻게 읽었나.
너무 대사밖에 없더라! 지문도 거의 없어 도대체 어떻게 찍으라는 건지 의문이었다. 두 감독에게 “그냥 라디오 드라마로 만들지 그래? 팟캐스트에서 2시간 동안 읽고 끝내는 건 어때?”라고 농담도 했다. (웃음) 하지만 그런 텍스트도 다르게 보이게 찍어야 하지 않겠나.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해 촬영하는 동안 매일 장기를 두듯 다음 수를 고민했다.
- 촬영감독 입장에서 두명의 연출자와 일하는 건 어떤 경험인지도 궁금하다.
사실 안 좋을 때가 더 많다. 한번은 광고를 찍는데, 감독 두 사람이 커플 사이였다. 일주일간의 촬영 중 그들이 헤어지면서 중간에서 곤란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지라 마치 쌍둥이처럼 서로를 보완해가며 역할 분담을 잘하더라. 감독이 둘이어도 현장을 잘 이끌어주니 나로서도 좋은 경험이었다.
- 웅장한 돌산에서 줌아웃해서 콘돔에 관한 농담을 나누는 반스(소피 대처)와 팩스턴(클로이 이스트)의 뒷모습을 비추는 오프닝부터 인상적이다.
자연으로 시작해 콘돔으로 끝난다니 아이러니하지 않나. 서로 다른 두 소녀처럼 결이 안 맞는 영상과 대사, 자연과 광고판이 한데 있는 것이 나름대로 평화로웠다고 생각한다. 반스와 팩스턴이 자전거를 들고 푸른 들판 위 계단을 오르는 장면도 시나리오에는 없었는데, 한순간 그 계단을 보고 반드시 찍어야지 싶었다. 두 인물이 곧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갈 텐데 그전에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시간이 부족해 배우들이 헤어·메이크업 테스트하는 날 오전에 급히 찍은 장면이지만 영화에서 잘 작동한 것 같다. 인물이 그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애착이 남는다.
- 이 밖에도 줌아웃 숏이 많은데, 작은 규모의 영화로 큰 질문을 던지겠다는 제스처로 보였다.
의도한 부분이다. 이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한 인물이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다른 인물들의 반응을 보여준다. 그 과정을 즐기는 리드(휴 그랜트)의 표정을 디테일하게 살피다가, 그가 원하는 답이 나올 때 공간을 다시 넓게 보여주는 구조로 인해 트래킹과 줌이 많았다.
- 휴 그랜트와 <웡카> 이후 곧바로 재회했다.낮에는 <헤레틱>을 촬영하며 리드를 만나고, 밤에는 <웡카> 컬러 그레이딩을 하며 움파룸파를 만나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웃음) <헤레틱>을 찍으면서 그가 대단한 배우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그 긴 대사를 다 외워와 원테이크 촬영을 소화했다.
- 공간의 제약이 폐소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우선 리드의 거실은 어두운 가운데 간접조명이 종종 켜지면서 긴장감을 유발한다.
집은 리드에게 자기만의 소극장이자 무대다. 그는 여러 번 같은 호흡으로 대사를 뱉고, 방문객이 자기 의도에 말려드는 것을 보며 쾌감을 느껴왔을 테니 조명 또한 그에게 하나의 장치로 진화했을 것이다. 배우, 감독들과 함께 리드라면 조명을 어떻게 썼을지 상상하며 모두가 동의한 아이디어를 적용했다. 이런 식으로 시나리오에 없던 조명 설정을 통해 드라마를 바꿔놓은 지점이 굉장히 많다.
- 하나 예시를 든다면.후반부에 예언자가 등불을 들고 나타나지 않나. 그런 설정도 시나리오에는 없었는데, 등불의 존재가 촬영에도 이야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추가했다. 나중에는 이 등불을 지하실 책상 위에 둘지, 어딘가에 걸어둘지 여러 번 회의했다. 다행히 감독들이 내 의견을 많이 수용해줬다. 이렇게 협업하는 과정이 굉장히 즐거웠다.
- 예배당처럼 보이는 서재에서는 리드의 본격적인 설교가 펼쳐진다. 그의 광기 어린 폭주와 함께 카메라도 리드미컬하게 움직인다.
모든 영화의 카메라 움직임은 반은 계획, 반은 즉흥이다. 같은 숏을 놓고도 여러 테이크를 찍지 않나. 한번은 리드, 다음에는 팩스턴, 그다음에는 반스의 클로즈업숏으로 끝내보고, 스리숏으로 끝내보기도 하며 테이크마다 무빙을 달리했다. 게다가 <헤레틱>도 <아가씨> 때처럼 카메라가 바닥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댄스플로어를 설치했다. 배우의 연기에 따라 카메라가 가까이 들어가기도 하니 처음 하루이틀은 배우들이 힘들어했다. 3일 정도 후에 가벼운 편집본을 보여주니 배우들도 이 방식을 신뢰하더라. 나도 반스, 팩스턴에 이은 제3의 ‘시스터’가 된 것처럼 몰입하면서 찍었다.
- 좁은 복도, 계단, 그 끝에 이어진 지하실은 장르에 가장 충실한 세트가 아니었나 싶다. 어둠 속 클라이맥스를 더 잘 찍기 위해 신경 쓴 것은.
인물들은 앞이 안 보이지만 관객은 그들을 봐야 한다. 영화적인 어둠, 즉 ‘무비 블랙’을 어느 정도 경계선에 맞춰야 할지를 많이 고민했다. 지하실 신에서 카메라가 거의 360도 움직이는 순간도 있는데, 카메라가 끊임없이 움직이려면 조명이 방해가 돼선 안된다. 잘못하면 조명이 카메라에 잡히거나 그림자가 이상해진다. 무엇을 포기하고 취할지 결정하기가 까다로웠다.
- 촬영감독으로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보람이 큰 작품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헤레틱> 같은 영화를 더 하고 싶다. 미국에 온 후 소모적인 작업도 종종 했었는데, 이 작품은 창작자로서 힘을 많이 실으며 임했다. 촬영 공간이 작고, 예산도 적었기 때문인지 이 작품에 대한 나의 감정도 끈적하게 남아 있다. 시나리오에 비해 완성본이 잘 나오지 않아 실망하는 경우와 달리 <헤레틱>은 완성본도 재밌게 즐겼다. 한국에서도 많이들 봐주셨으면 좋겠다.
-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신작 <더 러닝 맨> 촬영도 마쳤다.
오랜 기간 영국과 불가리아에서 촬영했다. 잘 알려진 원작을 리메이크했으나 그것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기대하셔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