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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액션의 빛과 그림자, 설 연휴 한국영화 기대작 <휴민트>

당대의 첩보 전쟁이 다루는 빈번한 소재는 무엇일까. <휴민트>가 주목한 것은 마약과 인신매매다. 조 과장이 몸담은 국정원은 강남까지 대거 유입된 마약의 배후에 북한이 자리 잡고 있음을 입증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북한 당국과 러시아 마피아가 공모하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인신매매 현장을 추적하려는 조 과장의 제안을 상부가 받아들인 것도 지극히 전략적인 선택이다. 조 과장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북한 식당에서 영민한 종업원 채선화를 발견해 휴민트로 삼는다. 암 투병 중인 어머니의 병원비와 치료제를 구해주는 대가다. 한편 북한 보위성 조장인 박건도 자국 내 실종자들의 묘연한 행방에 의문을 품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했다. 박건은 러시아 마피아들에게 마약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북한 밀매책을 잡아내지만 곧 북한 총영사 황치성의 훼방과 감시에 시달린다. 그간 국경에서의 비리를 주도해온 황치성은 박건을 처리하기 위해 그의 오랜 연인이었던 채선화를 마피아들에게 넘기려 한다.

류승완의 국외자들

<베를린> 이후 어느덧 13년. <휴민트>는 <베를린>에서 고스트라 불렸던 북한 비밀요원 표종성(하정우)의 소식을 뜻밖의 순간에 들려준다. 베를린을 장악할 만큼 유능한 요원이었고 임신한 아내 연정희(전지현)를 잃은 후엔 복수심으로 거리낄 것이 없었던 남자조차 블라디보스토크 땅에선 살아남기 쉽지 않았다는 풍문이다. 13년의 시차를 건너 류승완 감독은 첩보의 차가움을 더 단단하게 조이면서도, 동시에 감정의 온도를 높였다. 장소를 변주하는 동시에 한국 첩보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모서리를 확장해나가는 시도로서 <베를린> <모가디슈> <휴민트>는 유의미한 연속선상 위에 놓인다. 흥미로운 지점은 류승완이 선택한 블라디보스토크라는 공간의 함의다. <베를린>이 차갑고 소외된 유령들의 도시였다면, <휴민트>의 블라디보스토크는 남북의 이해 관계가 한층 직접적으로 충돌하기에 욕망과 생존이 엉겨 붙은 진흙탕에 가깝다. 러시아, 남한, 북한의 삼각 구도가 교차하는 이 접경지대는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자리에 자본의 논리가 어떻게 괴물 같은 형상을 빚어내는지 가시화한다. 특히 영화가 주목하는 인신매매라는 소재는 인간을 정보로 치환하는 첩보물의 비정한 속성을 극단적인 육체적 착취로 변주하고 있다. 차가운 배경을 상쇄시킬 새로운 주역은 배우 조인성이 연기한 조 과장이다. 그는 비정한 누아르 위에서 인간적 자질을 잃지 않는 품위의 소유자다.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얻은 인적 정보이자 그 대상을 뜻하는 합성어 휴민트(humint)를 위해 활동하는 조 과장은 정보만큼이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쇄작용에 충실하려 한다.

디지털 시대의 끈끈한 신체가 말하길

조 과장은 앞서 인신매매 범죄의 피해자였던 북한 여성 김수린을 통해 휴민트 작전을 펼치다 그를 제때 구하지 못해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목격했다. 요원의 임무는 정보를 구하는 것이지 정보원을 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직업적 요구에 상심한 남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만큼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가 않다. 조 과장의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섬광 같은 플래시백이 서사적 당위를 뒷받침하긴 하지만, <휴민트>의 주인공은 그보다 상징적인 도덕적 주체일 때 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는 <베테랑>을 중심으로 류승완의 영웅들이 가졌던 투박한 정의감과는 또 다른 감수성을 보여주기에 눈길을 끈다. <모가디슈>의 강대진이 가졌던 기민함과 <밀수>의 권 상사가 보여준 서늘한 카리스마를 통과해 다다른 조 과장은 일종의 지친 관찰자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 휴민트만이 가질 수 있는 불완전함에 이끌리기에 디지털 시대의 첩보물이 잊고 있었던 신체성에 대한 복구를 염원하는 캐릭터로서 힘을 발휘한다. 데이터와 위성은 포착할 수 없는 체취 어린 정보값이 <휴민트>가 지닌 성공의 열쇠다.

늦은 밤 홀로 잠들지 못하고, 긴 코트를 걸친 채 혹한을 누비는 요원의 뒷모습에선 언뜻 장 피에르 멜빌의 그림자도 묻어난다. <한밤의 암살자><암흑가의 세 사람>등 멜빌의 영화 속 인물들처럼 고답적인 의상은 인물이 짊어진 도덕적 무게와 지성에 관한 은유가 되어준다. 배우 조인성의 긴 실루엣은 화면에 유려함을 불어넣는 동시에 액션의 쾌감만큼이나 인물의 내면적 파동을 중요시하는 류승완 영화의 태도를 옮긴다. 점점 더 절제된 연기 스타일을 선보이면서 성숙하게 나이 든 배우의 얼굴이 만드는 깊이를 드러내는 조인성의 진화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순애주의보!

남과 북의 액션만큼 남과 여의 정념이 <휴민트>의 문젯거리다. 약혼까지 한 관계였으나 북한의 특수 체제 아래 찢어질 수밖에 없었던 박건과 채선화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재회하는 순간부터, 이전까지 인간 병기처럼 비쳐졌던 박건의 눈빛이 달리 보인다. 날 선 차가움 뒤에 숨긴 애절함으로 박건은 이후 오로지 사랑을 위한 레이스를 펼친다. 류승완 감독은 <휴민트>의 초안에서 박건과 채선화를 외삼촌과 조카 관계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오히려 조 과장과 채선화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있었으며, 작품 전체의 톤 앤드 매너도 훨씬 밝고 경쾌했다. 하지만 “조인성박정민을 전면에 내세워 작업하기로 결심하면서 익히 잘 알고 있는 두 배우의 힘을 믿고 진중하게 밀어붙여보자고 결심한 것이 현재의 구조”가 됐다. <헤어질 결심>(2022)에서 회자되는 옥상 신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내 인생 너 아니었음 공허했다”라는 대사로 박정민은 멜로드라마의 독특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인기의 연원을 절묘하게 연장하는 작품인 <휴민트>에선 빈틈없는 판단과 움직임을 거듭하던 인물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흔들리는 괴리를 보여준다. 박정민이 보여주는 멜로의 공기는 애틋함보다는 처절함에 가깝다. 80년대 홍콩 누아르의 비극적 주인공처럼 자신의 파멸을 예감하면서도 단 하나의 감정을 향해 돌진하는 초상이어서다. 특히 취조실 장면에서 조명에 의해 절반은 그림자에 가려진 그의 얼굴은,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국가적 자아와 연인을 보호하려는 개인적 자아 사이의 분열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며 극의 긴장감을 액션이 아닌 감정의 파고로 이끈다. 취조실 장면을 비롯해 후반부 대규모 총격이 벌어지는 마피아 소굴에서의 재회 신 등 <휴민트>의 멜로드라마적 묘사는 놀라울 정도로 클래식하지만 박정민의 개성이 이 모든 순간들을 상투적이지만은 않게 만든다. 나아가 한동안 부재했던 고전적 사랑 이야기의 원초적 재미가 무엇인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액션의 빛과 그림자

클래식 첩보 누아르가 <휴민트>의 그림자라면 류승완식 액션 스펙터클이 빛을 도맡는다. 우선 사람과의 대화, 관찰을 통해 이뤄지는 정보기관의 가장 전통적이고 핵심적인 정보수집 방법인 휴민트 자체가 화면의 액션을 이끌어낸다. 각종 녹화 스크린, 망원경 속 이미지 등이 빠르게 엮이고 흘러가는 힘으로 <휴민트>의 탄력이 유지된다. 다채로운 기물의 활용, 동선이 돋보이는 총격 신, 긴박한 카 체이싱 등 한정된 무대와 인물을 둘러싸고 끌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액션도 만날 수 있다. 류승완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실물 액션의 질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CG를 최소화하고 라트비아 현지 촬영에 공들였고 기자회견에서 “총기 자문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으며 총탄의 개수까지 하나하나 계산해서 찍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특히 오직 총구의 불꽃과 헤드라이트만으로 인물의 위치를 식별하게 하는 후반부 시퀀스는 빛과 어둠의 미학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명장면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조 과장, 박건, 황치성이 대치하는 3자 구도의 총격이 주는 비정함도 오래 남는다.

한편 흰 원피스를 입은 채 유리관 안에 갇힌 여성 피해자들이 액션 장면의 배경이자 도구로 활용되는 방식은 <휴민트>가 성공적으로 달성한 신체적, 감정적 스펙터클이 소강된 이후 일말의 미심쩍은 뒷맛을 남긴다. 젠더 기반 범죄를 사건화하는 동시에 그로 인해 여성이 대상화된 풍경을 영화의 절정에서 미장센으로 소비하는 형국이다. 장르의 관습과 재현의 감수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보여주는 <휴민트>는 여전히 한국영화의 주류인 남성적 장르영화의 과제를 시사한다. 채선화라는 캐릭터가 박건의 순애보를 완성하는 도구적 위치에 머물지 않고, 영화의 엔딩에서 그녀만의 주체적인 선택을 내리는 장면이 배치된 것은 고무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