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홀레는 아내의 죽음 이후 오슬로를 떠났고, 표면적으로는 경찰 일에서도 손을 뗐다. 신용카드 한도가 초과될 때까지 술을 사 마시던 그가 다시 오슬로로 돌아가려면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야 할 텐데, 참으로 그 사람다운 사건이 생긴다. 영화 때문에 진 큰 빚을 갚지 못해 채권자에게 죽게 생긴 한 여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돕기로 결심하는데, 때마침 오슬로에서 벌어진 여성 실종 및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태도는 무뚝뚝해도 자기와 별 관계도 없는 여자를 목숨 걸고 도와주려는 이타적인 마음을 다들 알기 때문인지 오슬로에는 해리에게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일단 남들은 모르지만 해리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수사관이 있고, 해리를 좋아하는 검시관도 따로 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용의자의 알리바이와 관련된 증거를 슬쩍 건네주는 여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죽음을 앞둔 예전의 남자 동료는 병원 입원실을 해리 수사팀의 임시 회의실로 기꺼이 제공해준다. 남녀를 가리지 않는 이 어마어마한 매력은 해리의 이타심만이 원인은 아닌 것 같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누아르적 허무함을 발산하기 때문일까, 알코올중독이라는데 희한하게도 양복이 잘 어울리는 날렵한 체격을 유지하기 때문일까.
매력에 대해 새삼 생각해본 것은, 이번 해리 홀레 시리즈가 타인의 욕망을 자극하는 기생충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블러드문>은 이 시리즈의 열세 번째 책이자 이쯤 되면 좀 늘어지지 않을까, 라는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책이다. 해리의 수사에 주어진 시간은 열흘이고, 그만큼 수사가 빠르게 진행되는 한편 범인으로 짐작되는 두세명의 시점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두 이야기의 흐름이 빈틈없이 탄탄하게 맞물린다. 책 분량이 상당하고 미국 범죄드라마 어디선가 본 듯한 일화들도 있으며 자극적인 묘사들도 상당하여 독자가 읽다가 지칠 수도 있지만, 이야기는 진짜 범인이 누구일지 쉽게 알려주지 않으면서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연쇄살인사건을 재빨리 보도하려는 기자들의 경쟁, 사건을 통해 정치적으로 이득을 보려는 정치권 인사들의 계산도 곁들여져 있고 사나운 폭력과 끈질긴 복수의 심층에는 가부장적인 억압이 숨겨져 있다는 지적도 빠지지 않는다. 한국계 입양아 출신의 수사관 캐릭터 또한 눈길을 끈다. 그리고 망가진 삶을 살던 해리 홀레가 아이의 존재로 인해 금주를 결심하게 되었다는 점 또한 아주 축하할 일이다.
“밥 딜런이 백만장자가 되었고 목소리는 쓰레기 같은데도 여전히 콘서트를 하러 다니는 이유가 뭔지 질문받았을 때 했던 대답과 같아요. ‘그게 내 일이니까.’” 51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