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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또 다른 응답 - 21세기 영화의 감각 불가능성

<멀홀랜드 드라이브>

21세기가 되었을 때 영화는 몸을 감각하며 20세기 영화의 질문을 연장했다. 20세기에 영화는 기억을 생산하고, 기억을 보관하는 창고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스크린 위로 우리가 기억하는 얼굴이 투사되었고, 스크린의 얼굴이 우리의 기억을 만들었다. 우리가 보았던 얼굴, 우리를 바라보는 얼굴의 예술.

21세기를 여는 영화가 기억을 잃은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은 영화가 여전히 기억의 예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근교 자동차도로에서 교통사고를 겪은 여성이 있다. 여성은 자기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여성은 낯선 가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데, 이름을 묻는 주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이때 여성은 집 안 욕실 벽에 붙은 고전 할리우드 시기 영화 <길다>(1946) 포스터에서 리타라는 이름을 훔친다. <길다>는 이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에 리타 헤이워스의 이름, 매혹하는 여성의 이미지, 정체성과 속임수, 죽은 자의 회귀라는 모티브를 빌려준다. 이처럼 21세기의 영화는 20세기 영화의 줄을 붙잡고 망각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하룬 파로키는 <공장을 나서는 사람들> <손의 표현>과 같은 자신의 일련의 아카이브 영화 작업에 ‘이미지 어휘집’(Bilderschatz)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철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파로키의 ‘Bilderschatz’를 ‘이미지 어휘집’(Cinematic thesaurus)으로 번역하는 대신 보물창고(schat, 寶庫)라는 뜻을 살려 이미지 보고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인류가 이미지 안에 쌓아온 고통과 비애의 형식의 원천에 ‘고통의 보고’(Leidschatz)라는 이름을 붙였던 미술 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의 생각을 빌리고자 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다이안/리타는 영화라는 이미지 보고에서 이름을 훔쳤고, 환상을 훔쳤다. 그러므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20세기를 새롭게 연장하는 21세기의 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데이비드 린치는 킹 비더, 빌리 와일더, 앨프리드 히치콕, 잉마르 베리만 등 20세기 고전 할리우드영화와 유럽 모던 시네마의 탁월한 거장들이 집요하게 다루었던 문제, 위태로운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전적으로 새로운 주제를 다루는 21세기의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데이비드 린치가 위태로운 정체성에 대해 부재와 불가능성의 스크린으로 응답했던 모던 시네마와 다른 응답을 모색했던 것도 사실이다. 데이비드 린치는 부부가 참여한 한밤의 파티와 산책이 끝나고 아침이 밝아올 때 끝나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모던한 <밤>의 방식으로 부부의 위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데이비드 린치는 얼굴의 위기, 얼굴과 몸의 위기를 통해 정체성과 관계의 위기를 보여준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또는 <로스트 하이웨이>와 <트윈 픽스> 등에서 데이비드 린치는 자주 스테디캠을 사용해 정지화면을 찍었는데 특히 이 방법으로 부서지듯 제자리에 있고, 몸과 분리된 채 몸 위에 있는 얼굴의 악몽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런데 2000년 이후 이미지의 세계는 데이비드 린치가 악몽으로 표현했던 사태, 곧 얼굴과 몸의 분리가 일상화된 세계가 되었다. 디지털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얼굴 이미지의 수정, 조작, 생성, 공유가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얼굴은 정체성을 표현하는 안정적인 대상이 아니다. 얼굴은 나의 통제 아래 내 몸에 붙어 나를 드러내는 대신 나의 통제를 벗어나고, 나의 몸을 벗어난다. 이에 얼굴에 대한 통제권을 지키기 위해 얼굴의 가시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역설적 상황이 생겨난다. 카메라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으로서 카메라가 가득한 매체 환경에서 ‘안 보이게 되기’를 실천할 것을 촉구하는 시대(히토 슈타이얼)에 이름 없는 사람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으며 감각의 세계를 확장했던 영화는 이제 어떻게 얼굴의 가시성을 다루어야 할까?

<과거가 없는 남자>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2000년대를 열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영화, 마찬가지로 기억을 잃은 인물을 다루는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2002)가 떠오른다. 특히 주인공이 병원에서 얼굴에 감고 있던 백색 붕대. 한 남성이 기차를 타고 핀란드 남부 항만도시인 헬싱키에 도착한다. 불량배들이 그를 두들겨 패고, 그가 가진 유일한 재산, 유일한 기억, 유일한 과거를 파괴한다. 의식불명 상태로 사망을 선고받았다가 갑자기 부활하는 주인공은 얼굴과 온몸에 백색 붕대를 감고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속 리타의 기억상실은 정체성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계기다. 리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쫓기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누구에게 쫓기는지, 무엇 때문에 쫓기는지 알지 못한 채로 리타는 변장을 시도한다. 이런 리타와 비교하자면 <과거가 없는 남자>는 과거의 완전한 삭제와 갱신을 뜻하는 백색 붕대, 사망 선고, 부활을 경험하고서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름이 없는 이 남자는 권력, 제도, 시장에 신원 정보를 제출할 수 없다. 도시의 주변인인 룸펜들이 이 남자에게 빼앗은 것, 이 남자가 잃어버린 것은 인구학적 통제 수단인 신원 정보다. 반면 이 남자는 음악에 대한 취향과 노동하는 신체의 기억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용접공으로 일했던 그는 기꺼이 낡은 레퍼토리를 가진 악단에 음악적 취향을 조언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자신의 직업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용접 능력을 발휘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인류가 영화에 기댈 때, <과거가 없는 남자>는 (육체)노동에 기댄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서류, 일련번호, 통계자료로 개인을 환원하는 권력에 노동을 대조한다. 얼굴을 가시화하는 대신 노동을 가시화하기. 그런데 영화 초반부 주인공을 공격했던 불량배 중 하나는 주인공 가방에서 꺼낸 용접공 보호구를 얼굴에 쓴다.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 보호구를 뒤집어쓴 불량배는 예수를 끌고 가던 로마 병사나 <스타워즈>의 어둠의 전사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장면에 중요성을 부여하자면 주인공을 예수적 형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딥페이크 시대 이전의 영화인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영화는 노동하는 신체에 대한 낙관에 기댄다.

지난 세기에 세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던 빅토르 에리세는 ‘이미지의 시세가 하락한’ 21세기에 새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2023)를 만들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영화와 기억상실이라는 소재를 연결한다. 영화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자동차 주행이 만들어내는 원근법과 파노라마가 매우 영화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무엇보다 사고를 겪지 않는 자동차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자동차는 영화적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사고를 겪고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과거가 없는 남자>의 주인공은 모두 사고를 겪었다. 반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우리에게 실종을 둘러싼 사고에 대한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영화는 우리에게 그가 어떤 사고를 겪었는지 알려주는 대신,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를 보여줄 뿐이다. 그는 이름뿐 아니라 신체의 기억도 잃은 것 같다. 요양원 벤치에 앉아 있는 그는 예술에 대한 취향이나 예술에 대한 직업적 능력, 죄의식과 불안조차 잊은 것 같다. 그리고 영화는 극장이 아니라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20세기 영화의 필름은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인물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준비한 상영에 소환된다. 영화는 일상의 아무 곳에서나 우리를 불러 세우지 않고, 우리를 응시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불안과 사랑을 알려주지 않는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가 이제 일상적인 세상을 보는 우리의 두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영화는 보기 위해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눈을 감고 영화와 얼굴의 잔상, 한스 벨팅이 ‘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 신체 이미지라고 부른 이미지를 보라는 뜻일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배심원#2>(2024)와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머리 없는 여인>(2008)은 교통사고를 일으킨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다. 그런데 카메라가 도처에 있는 시대에 만들어진 두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일어난 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가정된다. 운전자가 모두 악천후 상태에서 운전했기 때문이다. 디지털매체 환경 시대의 사용자들이 대체로 여러 가지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처럼 이들도 산만한 상태에서 운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편의 영화는 편재하는 카메라 시대, 감각과 시선 사이의 분리가 문제시되는 시대에 대한 우화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두 영화의 비가시성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교통사고를 다룬 20세기의 고전 중 하나를 떠올려보려고 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텔레비전용 장편영화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던 클로드 샤브롤의 <야수는 죽어야 한다>(1969)다. 샤브롤의 영화는 아들의 뺑소니범을 뒤쫓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한국영화와 넷플릭스 드라마 복수극에서 관객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하는 피해자의 전형과 유사하다. 그는 자식을 잃은 피해자지만 복수를 시행하기 위한 치밀함과 체계성을 갖추고 있다. 복수를 다짐하며 정신을 잃은 듯 절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착오 없이 적에게 접근하기 위한 스토리를 꾸민다. 피해자는 관객의 주목을 이끌어내면서 가학적이고 즉흥적이며, 경제적으로 성공한 범인에게 접근한다. 물론 샤브롤은 전형적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서사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는다. 그러나 샤브롤이 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희생자의 얼굴과 이름을 보여주는 데 공을 들였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야수는 죽어야 한다>는 아이의 얼굴과 함께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노란색 우비를 입은 아이가 멀찍이 해안가에서부터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 이 사이 한적한 마을을 향해 질주하는 자동차 숏이 끼어든다. 시끄러운 자동차 엔진 소리와 카 오디오의 클래식음악이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빠르게 전환된 화면에서 카메라는 마을 성당 앞 삼거리로 걸어오는 아이를 천천히 줌인한다. 카메라는 우리에게, 심지어 우리가 바닷가에서 보낸 시간에 만족하듯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막 확인했을 때 자동차가 아이를 들이받는 걸 보여준다. 자동차 앞좌석의 승객이 비명을 지른다. 운전자는 그대로 차량을 몬다. 자동차는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카메라 크레인은 바닥에 쓰러진 아이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비춘다.

<배심원 #2>과 <머리 없는 여인>의 운전자들은 차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못하고,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런데 두 운전자 모두 모종의 충돌을 감각했음을 인정한다. 사태는 이 감각에서부터 역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 영화들은 감각의 자극과 고양이 감각의 분별로 이어지지 않음을 확인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더는 기억의 주관성이나 관점의 주관성이 아니라 감각의 무분별함이다. 감각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정의, 진실에 대한 불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머리 없는 여인>은 이와 함께 ‘보지 못함’의 근원에 있는 계급적이고 인종적 배경을 지적하는 영화다. 치과의사인 주인공이 모는 차가 저소득층 유색 선주민 거주 지역의 외딴 도로에서 무엇인가를 친다. 겁에 질린 주인공은 자신이 사람을 친 것인지, 산짐승을 친 것인지 확인하지 않은 채로 현장을 벗어난다. 영화는 도로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여주는 오프닝과 주인공과 다수의 선주민 가정부, 정원사 등을 화면 곳곳에 배치하면서 식민주의는 가시화와 비가시화를 결정하는 권력이고, 식민주의의 유산이 우리의 감각의 무능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21세기의 문을 연 영화들은 몸과 감각을 통해 영화와 정체성의 위기를 표현하고자 했다. 오늘의 영화가 근심하는 것은 아마도 굴과 몸, 시선과 감각, 감각과 영화의 공존 불가능성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