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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실패의 서사, 소멸의 이미지, 조현나 기자의 <퀴어>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퀴어>

“너랑 대화를 나누고 싶어. 말없이. 널 만지고 싶어.” 유진(드루 스타키)에게 첫눈에 반한 리(대니얼 크레이그)는 꾸준히 구애한다. 특히 그와 접촉하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고 곁을 배회한다. 후반부에서 리는 바라던 대로 유진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그전까지 반복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투명하게 현신한 리가 곁에 앉은 유진에게 계속해서 손을 뻗는 모습이다. 리의 상상에 기반해 구현됐을 가상의 신체는 그렇게라도 상대와 접촉하고 싶은 리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일 테다. 투명한 신체가 리의 욕망을 대변한다는 전제는 영화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갑작스레 전복된다. 텔레파시를 가능케 하는 ‘야헤’를 마시고 교감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돌연 리의 눈앞에 있던 유진의 몸이 투명해지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 뒤로 현실은 물론 리의 상상 속에서마저도 유진은 자취를 감춘다. 정사를 넘어선 ‘말없는 대화’가 마침내 가능해졌을 때 리가 그토록 갈구해온 유진의 육체, 유진이란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질문해볼 수 있겠다. <퀴어>가 묘사하는 신체의 소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리는 왜 자신의 바람을 투영할 때조차 본인을 지우고 종국엔 사랑하는 유진까지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욕망을 인간의 오감을 통해 드러내길 즐기는 창작자다. 대상이 금기시된 존재일 경우 욕망과 신체적 반응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진다. <아이 엠 러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본즈 앤 올> 등을 거쳐 <퀴어>에 이르러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탐하는 자와 대상간의 신체접촉을 더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그만큼 신체의 부재를 더 자주 드러낸다. 끊임없이 장소를 바꿔가며 현실에 상상을 대입하는 리의 실험을 통해서 말이다.

취할 수 없기에 갈구하는 사랑의 대상

<퀴어>

“너 퀴어 아니지?” 술집에서 만난 한 남자에게 리가 묻는다. “쟤 퀴어일까?” 첫눈에 반한 유진을 바라보며 리가 넌지시 동료에게 말한다. 1950년대, 동성애 차별이 만연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이 질문은 화자와 청자를 바꿔가며 되풀이된다. 성적 지향에 관해 리와 유진은 상반된 입장을 취한다. 표면적으로 리는 퀴어임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오픈리 퀴어라고 해서 스스로를 오롯이 받아들인 건 아니다. 본인이 동성애자인 건 “저주”이며 “섹스 괴물로 사느니 인간으로 죽는 게 낫겠다”고 여겼던 과거를 리는 유진에게 자조하듯 고백한다. 비슷한 상황이 그의 꿈에서도 이어진다. 자신이 숱하게 건넸던 ‘당신은 퀴어인가’라는 질문이 되돌아왔을 때 리는 부정한다. 그리고 답한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거야.” 그 뒤로도 리는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자주 거론하면서 동성에 대한 이끌림을 전부 육체의 욕구로 치환하고 그것을 본인과 유리시킨다. 자기혐오가 옅게 깔려 있을지언정 이러한 리의 입장에선 몸을 통해 다른 퀴어와 교감하는 것이 가장 명확한 소통 방식이라 여겼을지 모른다. 한편 유진은 자신의 정체성을 구태여 밝히지 않는다. 리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어내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거리를 두며 그를 외면하려 한다. 그 거리감이 리를 더욱 초조하게 만든다.

내내 모호한 입장을 취하던 유진이 처음으로 자기 정체성을 고백한 건 영화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다. 야헤를 마신 그는 “저 퀴어 아니에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거죠”라고 말하고, 그렇게 리의 환각 속에서 두 사람은 점점 사라져간다. 이를 토대로 보면 유진과 리가 정신과 육체의 분열이라는 이원적 구조를 받아들인다는 점은 같지만,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관해선 확연히 갈린다. 육신을 통해 동류를 감지하고 접촉하길 바라는 리와 달리 유진은 자신이 퀴어임을 자각게 하는 신체 교감이 반복될수록 도망치고 싶어 한다. 육체가 정체성을 드러낼 유일한 언어라 여기며 이를 기반으로 사랑을 표현하려는 자와 끝내 그 언어 자체를 외면해버리는 자. 둘 사이엔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퀴어> 의 “인물들이 진정한 소통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타임>)에 관해 다루고 싶었다던 루카 구아다니노의 의도는 이러한 두 인물의 간극으로 구현됐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퀴어>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다. 전술했던 신체의 소멸, 그리고 방황을 동반한 자기 탐구다. 특히 후자의 경우 루카 구아다니노가 다뤄온 인물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지점이다. 사랑을 경유해 자기해방을 이룬 <아이 엠 러브>의 엠마(틸다 스윈턴)와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표류하던 <위 아 후 위 아>의 프레이저(잭 딜런 그레이저)와 케이틀린(조던 크리스틴 사먼), 첫사랑의 열병으로 정체성을 깨달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티모테 샬라메), 식인이란 본성을 쉽게 시인하지 못하던 <본즈 앤 올>의 매런(테일러 러셀)과 리(티모테 샬라메). 이중 <퀴어>와의 연결고리가 두드러지는 작품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본즈 앤 올>이다. <퀴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본즈 앤 올>은 각자의 방식으로 분리와 분열의 구조를 체화한다. 엘리오의 첫사랑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 건 오래전 떠난 올리버(아미 해머)가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이며, 서로가 유일한 안식처였던 매런과 리의 동행은 사건 은폐를 위해 매런이 죽은 리의 육신을 섭취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들에게 사랑은 퀴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성립될 수 없거나 반대로 기피하고 싶던 카니발리즘의 본성을 가장 극한의 방식으로 체화하게 만드는 대상이다. 비약하면 이들은 자신이 자신이라는 이유로 욕망하는 대상을 끝내 곁에 둘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퀴어>에서 그려지는 리의 사랑 또한 필연적으로 실패에 다다른다. 이를 은유하는 시퀀스가 있다. 리와 유진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할 때 표면적으로 둘의 시선은 나란히 스크린을 향하지만 여느 때와 같이 리는 유진에게 손을 뻗는 상상을 한다. 그런 둘을 지켜보던 카메라는 이들을 지나쳐 맞은편의 스크린으로 향한다. 스크린에선 장 콕토 감독의 <오르페>(1950) 중 오르페(장 마레)가 사망한 아내를 되찾기 위해 거울을 통과해 죽음의 세계로 향하는 장면이 상영되고 있다. 오르페우스 신화를 살짝 비튼 이 영화에서 오르페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여왕에게 반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산 자에게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양립할 수 없는 존재다. 죽음의 여왕의 신하가 거울 앞에 선 오르페에게 말한다. “거울은 거울일 뿐이고 그 안에는 불행한 남자가 있어요”라고. 아직 죽음의 세계에 발도 들이지 않은 오르페를 두고 그는 왜 불행한 남자라고 칭했을까. 죽음을 갈구하는 이승의 존재에게 일찍이 이별을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스크린에서 극장으로 시야를 넓혀보자. 불행한 남자로 칭해짐에도 결국 거울 안으로, 죽음의 세계로 걸어들어가는 오르페와 거울처럼 마주 선 이는 누구인가. 제 것이 아닌 이에게 무력화된 신체로나마 닿아보려는 리의 뒷모습이 더없이 처절하게 느껴진다.

<퀴어>에서 육체의 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려 전시한 장면은 야헤를 마신 리가 유진과 춤을 추는 순간일 것이다. 둘은 서로 동화되다 못해 피부를 투과해 합치된다. 엠비언스 사운드까지 제거된 이 시퀀스가 어쩌면 리가 바라던 말없는 대화가 궁극적으로 실현된 때인지 모른다. 하지만 클라이맥스처럼 전개된 이 신 이후의 상황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리와 교감을 나눈 유진은 앞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리를 외면하고 결국 도망친다. 정글 속으로 사라진 유진을 좇던 리가 잠시 뒤를 봤다 시선을 돌렸을 때 유진은 이미 그 자리에 없다. 곧이어 리는 빨려 올라가듯 하늘 위로 솟구쳤다가 그가 처음 유진을 만났던 장소, 멕시코시티에 도착한다. 2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리는 여전히 그곳을 배회하면서 떠난 유진을 그리워한다. <퀴어>엔 나오지 않았으나 <오르페>에도 유사한 장면이 있다. 신화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세계에서 금기를 깨고 뒤를 돌아본 오르페는 곧바로 생의 세계로 복귀한다. 그럼에도 오르페는 여전히 죽음의 여왕을 떠올린다. 리와 오르페, 이들에게 사랑하는 이의 소멸과 부재는, 그로 인한 사랑의 실패는 도리어 상대를 끝없이 갈구하는 발단이 된다.

닿을 수 없어서 꾸는 꿈

<본즈 앤 올>

리가 복귀한 멕시코시티에 관해 좀더 살펴보자. 멕시코시티에 오게 된 연유에 관해 리는 동성애에 관한 차별로부터 도망쳐왔다고 넌지시 운을 띄운다. 그러나 이 도피처에서도 리가 퀴어라는 이유로 편협한 시선을 던지기란 매한가지고 결국 리는 유진에게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둘의 관계에 본격적인 진척이 이루어진 건 이때부터다. 본거지 밖으로 유랑하고 그곳에서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는 이들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에선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엠마는 밀라노를 떠나 산레모에서 안토니오(에도아르도 가브리엘리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엘리오와 올리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도 프랑스의 휴가지에서다. 매런 역시 엄마를 찾아가던 중 리를 만났으며 정체를 숨기기 위해 둘은 주기적으로 외부로 떠돌거나 타지로 이동해야만 한다. 이중 드물게도 리는 명확한 목적을 갖고 자신이 등장한 장소로 회귀한 인물이다.

10대 때부터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윌리엄 S. 버로스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하길 원했다고 밝혔다. <데이즈드>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당시 자신이 쓴 <퀴어> 각색본의 첫 페이지에 ‘모든 것은 무대에서 촬영되어야 한다’고 적었고 이번 영화에서 그 계획을 실현했다. 리가 유진을 만난 멕시코시티는 실제 로케이션에 적을 둔 것이 아닌 로마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 구현된 세트다. 멕시코시티에서 유진의 흔적조차 부재함을 알고 나서야 리는 비로소 유진과 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음을, 가상의 신체를 구현해내더라도 유진과 닿을 수 없음을 절감한다. 호텔로 돌아온 리는 꿈을 꾼다. 꿈에서 리는 거대한 건물 형태의 세트장을 구성한 뒤 전지적 시점으로 내부를 들여다본다. 그곳에서 자신이 유진에게 총을 겨누고 쓰러진 유진이 사라진 뒤, 결국 자신마저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본다. 가상의 무대 위에 펼쳐진 한편의 영화를 관람하 듯이.

정체성, 방황, 자기 탐구, 욕망, 사랑. 주요 키워드로 <퀴어>를 요약한다면 전작들과의 여집합이 쉽게 걸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그 어느 때보다 이 요소들을 긴밀히 엮고 다시 분리시킨다. 유진과의 사랑은 리가 자기부정을 행할 때만이 성립 가능한 일이었고 이는 치정, 불륜과는 결을 달리하는 또 다른 금기다. 정신과 분열된 신체의 언어는 결국 사랑을 완성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신체의 언어로 기록된 한 기억이 리로 하여금 반복해 유진의 빈자리를 되새기게 한다. 정글로 여행을 떠났을 때 크게 앓은 리는 옆에 누운 유진에게 덜덜 떨며 다가가 발을 겹친다. 이 기억은 노년이 된 리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킨다.

마지막으로 가상의 신체를 불러와 그와 나눈 온기를 더듬는 방식으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미 충분히 해석된 감독일까. 연출자로서 오랫동안 품어온 작품인 만큼 <퀴어>는 그의 연출론을 새롭게 바라볼 여지를 남긴다. 실패의 서사와 소멸의 이미지로 가득한 <퀴어>는 그만큼 서글프고, 매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