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 중 뭘 제일 좋아하나요. 직업적으로 ‘당신의 올 타임 베스트가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 편이다. 솔직히 묻는 사람도 진짜 궁금하진 않을, 자기소개서의 취미와 특기란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 예정된 테스트는 익숙해지긴커녕 매번 곤혹스럽다. 왜 그럴까 고민하며 작품들을 복기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나 이 작품들 고르기 어려울 만큼 하나하나 되게 진심으로 좋아했구나. 상황과 형편, 기분과 컨디션에 따라 리스트의 우선순위가 달라지는 와중에 요즘은 조금 엉뚱하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의 단편 중 <On Your Mark>가 계속 뇌리를 맴돈다. <On Your Mark>는 일본의 록밴드 차게 앤 아스카의 뮤직비디오로 제작된 단편애니메이션이다. 1995년작 <귀를 기울이면>과 동시상영된 이 작품은 6분37초의 짧은 분량이지만 감히 지브리의 낭만과 정수가 응축된 결과물이라 할만하다. 안도 마사시의 작화, 야스다 미치요의 채색, 오가 가즈오의 배경 등 주역 스태프들의 솜씨는 ‘지브리의 육체’를 대변한다. 그 위에 비행기와 날개, 활공을 테마로 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꿈, ‘지브리의 영혼’이 자유의 형상으로 너울거린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시작으로 <모노노케 히메> <천공의 성 라퓨타>가 차례로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On Your Mark>가 자동 재생됐다. 동시에 몇해 전 보았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2023년 10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개봉 덕분에 취재차 스튜디오 지브리를 방문한 적 있다. 매체 인터뷰를 하지 않은 지 오래라 직접 만나진 못했지만 건물 뒤편에서 서성이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봤다. 작업용 앞치마를 한 채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던 모습이 꽤 오랫동안 눈가에 머물렀다. 살짝 움츠려 구부정한 등 실루엣이 왜 좀처럼 잊히지 않았는진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약간 서글퍼지는 곡선과 어울리지 않게 살짝 부산해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말과 연구와 평가가 이미 쌓여 있다. 아주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해 멋대로 떠들자면, 나는 그가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비관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이미 망했다. 뭘 해봤자 크게 바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내가 손놓고 있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뭘 이루려 한 건 아니다. 그냥 하는 거다. 그게 (나의) 일이니까.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요즘, 미야자키 하야오 어록을 자주 찾아본다. “영화를 만드는 건 고통스러워요. 나는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건 제 희망과 꿈을 담아두는 상자예요. (열어보며) 비었네요.” “미래는 분명해요. 무너질 겁니다. (주변을 둘러보며) 묻히기 좋은 자리네요.” 마치 내 마음 같은, 거장의 덤덤한 염세론을 들으며 더할 나위 없이 평안을 느끼는 내가 이상한 걸까. 목적과 수단으로서의 업무에 몰두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On Your Mark>를 배경음악 삼아 다시 미야자키의 어록을 반복 재생한다. “영화를 끝내기 전에 세상을 떠나도 괜찮아요. 아무것도 안 하다 가느니 차라리 일을 하다 갈 겁니다.” “늙은이는 겁먹지 않아.” 그 말에 기대어 이번주는 한번 해보고 싶었던 걸, 해버렸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2종 커버에, 지브리를 되돌아보며 특집도 꾸렸다. 아무쪼록 흠뻑 즐겨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