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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꽉 찬 분노를 넘어서기, <악연> 배우 신민아
*<악연>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하던 주연의 삶이 일그러진 건 ‘박재영’이라는 화상 환자가 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다. 학창 시절부터 현재까지 자신을 트라우마에 잠식시킨 가해자의 이름을 마주한 뒤, 주연은 그를 향한 복수심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의 사이에서 갈등한다. 돈에 눈이 멀어 거리낌 없이 범법 행위를 저지르는 이들 사이에서 배우 신민아가 연기한 주연은 유일하게 선을 넘지 않는다. 사건이 벌어진 이후 현재까지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을 이뤄본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채 자신의 삶을 지킨다. 의사 가운을 걸친 메마른 얼굴. 이토록 건조한 표정을 유지하며 상대에게 날을 세우는 신민아를 만난 적이 있던가. 그렇기에 더욱 주연의 감정과 변화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 <악연>은 시리즈의 엔딩까지 다 본 뒤에 인물들간의 얽힌 관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다. 대본 자체도 흥미로웠을 것 같은데.

처음엔 내게 들어온 배역이 주연이라는 것만 알고 봤는데 일부 캐릭터들이 이름도 없이 목격남(박해수), 사채남(이희준) 등으로 표기된 게 인상적이었다. 읽을수록 이야기가 재밌어서 다음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했다. 어느 순간부턴 시나리오라는 걸 잊고 추리 스릴러 소설을 읽듯이 빠져서 읽고 있었다. 대본을 완독한 뒤 받은 인상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정확하게 감정을 전하는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인물들의 서사를 얽고 풀어내는 이야기의 힘이 좋아서 이 대본이 최종적으로 어떤 색깔을 지닌 드라마가 될지 기대가 됐다. 다른 캐릭터들의 에피소드가 워낙 자극적이라 주연이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완성본에선 잘 어우러져 있어서 안심했다.

- 이전에도 <디바> 등의 장르물에 출연했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복수를 꿈꾸는 캐릭터를 연기한 건 처음이다.

그래서 처음 대본을 읽을 땐 주연을 연기하는 게 너무 어려울 것 같았다. 다른 스릴러 장르나 복수물 속 주인공처럼 복수를 차근히 계획하고 그에 맞춰 서사와 감정을 쌓아나가는 게 아니라, 앞서 강렬하게 등장한 다른 캐릭터들에 맞서 주연의 몰아치는 감정을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건의 피해자인 주연의 상흔을 어떻게 그려내야 진정성 있게 전할 수 있는지에 관해 고민이 많았다. 주연의 감정에 관해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나눴고, 종국에는 주연의 인생을 망친 가해자에게만 집중하기로 단순하게 접근했다. 대본에 답이 있다고 여기는 편이라 <악연> 안에서 주연이란 인물에게 주어진 의도를 파악하려고 했다. 또 주연은 대사가 많지 않고 ‘불안하고 떨리는 호흡’과 같은 비언어적 설명이 많아 등장할 때마다 상황에 맞게 감정을 다르게 표현하는 걸 중요하게 여겼다.

- 주연에게 주어진 의도를 무엇이라고 생각했나.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복수를 다짐하지만 그렇다고 가해자와 똑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 이일형 감독과는 주연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사실 방금 했던 대답과는 반대되는 입장에 서서 대화를 나눴다. 주연이가 앞장서 가해자를 살해하진 않더라도 작게라도 그에게 해를 가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주연이 심적으로 너무 답답하고 그의 고통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 초반엔 컸다.

- 어쩌면 다수의 시청자들 역시 주연이 직접 복수를 하길 바랐을지 모른다.

그래서 감독님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주연의 엔딩에 관해서도 여러 버전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피해자인 주연이 가해자를 처단하는 것이 복수물의 정석이고 실제로 그랬다면 여러 시청자들이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했듯 피해자인 주연이 가해자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 걸 보여주는 게 <악연>이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 목격남에게 칼을 겨누기까지 했지만 주연은 결국 상대를 살해하지 않는다. 그 신에서 주연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스쳐가는 듯 보였다.

주연은 정말로 가해자를 없애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예기치 못하게 가해자를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 과거의 사건이 생생히 떠올랐고, 자신은 의사고 마침 손에 메스를 들고 있으니 그를 죽여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건 ‘고작 저런 인간 때문에 네 인생을 망칠 순 없지 않냐’라는 연인 정민(김남길)의 말이 발단이 되었을지언정, 주연이가 목격남을 향해 겨눴던 칼을 결국 스스로 내려놓았다는 점이다. 목격남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이 망가진 모습, 이 얼굴을 기억할게’라며 마무리하는 주연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너는 지금의 험한 꼴로 인생을 계속 살아갈 테니 나는 그것만 기억하겠다는 그 대사가 지극히 주연이다웠다. 주연이 목격남과 제대로 마주하기 전 자신의 꿈속에서 목격남을 가격하는 장면이 있다. 감독님이 주연에 관해 나와 대화를 나눈 뒤 ‘꿈속에서라도 가격해봐라’라며 넣어주신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고 그 신을 촬영할 때 주연이 지닌 분노를 전부 표현하려고 했다.

- <악연>을 본 이들은 배우 신민아의 신선한 얼굴을 발견했다고 느낄 테다. 본인 역시 <악연>을 통해 새롭게 느낀 지점이 있나.

현장이 무척 좋았다. 감독님, 배우들, 스태프들 모두 현장에서 최상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오랜만에 느껴지는 긴장감이 있었다. 이렇게 다들 집중하고 있는데 실수해선 안되겠구나 다짐하게 만드는 기분 좋은 긴장감. <악연>을 보면서도 현장의 긴장감과 설렘 같은 것들이 작품의 분위기에 잘 담겼다고 느꼈다. 이번에 함께한 배우들 대부분이 처음 뵌 분들이었는데 그럼에도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책임감으로 단단히 뭉쳐 공동으로 끌고 나가는 게 상당히 재밌었다. 앞으로도 여러 배우들이 함께 이끌어나가는 작품을 더 많이 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