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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아 대신 허울을 입고, <악연> 배우 박해수
*<악연>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악연>의 목격남(박해수)은 하나의 몸뚱이에 4개의 인격을 가진 남자다. 출소 이전 재소자, 출소 이후 때깔 좋은 범죄자, 순진해 보이는 목격자, 전신 화상을입은 환자까지. 악의 총람을 종횡으로 펼쳐 보인 박해수는 고민 끝에 자신이 분한 캐릭터의 본질이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상정한 후 연기에 돌입했다. 늘 남의옷을 빌리고 남의 허물을 악용하며 돈 벌 궁리를 하는 남자가 가진 건 자아가 아닌 허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박해수는 어쩌면 작품 후반에 등장하는 목격남의 본명 또한 그의 실제 이름이 아닐 수도 있고, 심지어 그가 주민등록이 말소된 인물일 수도 있다는 가설마저 정연한 근거를 들어 내세웠다. 박해수가 목격한 악인의 심연으로 들어가보자.

사진제공 넷플릭스

- 처음 대본을 읽고 받은 인상은.

이야기의 강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8부작으로 쓰인 초고를 먼저 읽었거든. 이를 6부작으로 압축한 지금 버전의 대본을 접하니 작품의 속도감이 좋았고 그제야 목격남이 궁금해졌다. 지독하게 끝까지 악으로 치닫는 캐릭터를 나는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 다행히 <오이디푸스>나 <맥베스> 같은 고전을 무대에서 연기할 때부터 인간의 본성을 탐구해왔다. 선과 악의 대별점,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 같은 것들 말이다. 결론적으로 스토리와 캐릭터 모두 마음에 들었다.

- 이일형 감독과 캐릭터에 관해 많은 이야길 나누었다던데.

주로 목격남의 선택이 지니는 정당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양심과 도덕을 따르지 않는 목격남의 선택을 연기자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화 끝에 이를 ‘생존’의 방도라 정리하고 촬영에 임했다. 목격남이 경찰에 신분이 노출된 이후 사채남(이희준)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정하는 순간이 윤리를 저버리는 기점이다. 그전에도 나쁜 놈이었지만(웃음) 계획이나 동기를 세우거나 스스로의 범행을 합리화할 새 없이 무작정 폭주하는 것이다. 이런 대화도 나눈 적 있다. 과연 목격남이 출소 이전에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을까? 이전에는 비즈니스맨을 상대로 금융 사기를 치는, 경제사범 언저리의 범죄자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목적이 욕심이 되고, 욕심이 욕망이 됐다. 사람이 변하는 건 종이 한장 차이라 악의 폭주도 순식간에 벌어졌을 것이다.

- 등장인물의 대다수가 악인이고 이들끼리 얽히고설키는 구조의 작품이다. 그중 가장 악독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좋아해줄 구석이 없는 캐릭터로 6부작을 이끌어가야 하는 부담은 없었나.

감독님이 자신의 연출 의도를 전해주었다. 스토리의 스피드와 배우들의 독기 어린 연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카타르시스를 유념한다고. 작품의 레퍼런스로 언급된 영화는 코언 형제의 <파고>(1996)다. 감독님이 블랙코미디 특유의 톤 앤드 매너를 주지해준 덕분에 그에 맞춘 밸런스 조절이 가능했다.

- 누구도 박해수 배우와 이희준 배우가 외형적으로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을 텐데 <악연>은 두 사람의 외모 유사성을 납득시킨다. 그리고 이 설정이 작품 초중반의 주요한 트릭으로 활용된다.

이희준 배우와 몸의 형상을 일정 부분 맞추고자 했다. 희준 형은 당시 다른 작품을 위해 몸을 한껏 키운 상태였는데 촬영 전 나와 맞춘다며 근육을 뺐다. 나도 형과 비슷한 몸집을 만들려 노력했고.

- 2부에서 목격남이 귀도리를 어떻게든 사수하는 장면은 <악연>에서 거의 유일하게 웃음이 터지는 순간이다. 대본에 명시된 설정인가.

계획에 없는 설정이었다. 그날 촬영 현장이 정말 추워서 근처 다이소에서 방한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귀도리를 샀다. 혹시 귀도리를 쓰고 연기하는 것에 대해 감독님께 여쭤보니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그 귀도리가 목격남만의 독특한 포인트를 만들어냈다. 귀도리는 목도리만큼 흔하진 않지만 누구든 사려면 살 수 있는 아이템 아닌가. 귀도리가 목격남에게 필요한 평범함과 비범함을 동시에 충족해줬다고 생각한다. 과연 목격남은 상훈(이광수)에게 결박된 후 폭행을 당하는 것까지 계산에 포함했을까? 아니라고 봤다. 덕분에 사력을 다해 자전거 페 달을 밟았다.

- 작품에서 가장 에너지가 팽팽히 맞부딪치는 장면은 목격남과 주연(신민아)이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치하는 장면 아닐까. 대사 없이 위압적인 눈빛만으로 장면 전체를 압도해냈다.

병원에 들어올 때 이미 사채남이 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는데 자신의 정체를 꿰뚫어보는 듯한 여자를 만난 셈이다. 목격남은 그 눈빛에 당황하면서도 일단 살고 보자는 길을 택했겠지. 우선 주연의 증오에 일시적으로 부응해준다. 이후 주연을 밀폐된 공간 안으로 몰아넣고 원수로부터 벗어나 다 잊고 살라는 식의 솔직한 조언을 건넨다. 그다음 장면에서도 신민아 배우와 연기적으로 교감했다. 주연이 도주하는 목격남의 택시를 멈춰 세우지 않나. 그때 신민아 배우가 겁을 낼 수밖에 없는 눈빛을 보냈다. 목격남의 성격상 주연의 눈빛을 외면할 리 없는데, 이상하게 신민아 배우가 노려보니 절로 시선을 피하게 됐다.

- 목격남이 왜 주연의 눈을 피했다고 보나.

일말의 양심이 작용하지 않았겠나. 칠흑 같은 어둠도 새벽의 아스라한 햇빛 앞에서는 부서지기 마련이다. 신민아 배우가 가진 순수한 에너지가 있다. 아무리 독한 사람도 절대 선 앞에서는 패악을 부릴 만용을 감히 부리지 못하는데, 신민아 배우가 딱 그런 기운을 품었다.

- 넷플릭스의 아들답게 두편의 차기작 또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다.

영화 <대홍수>는 감독님이 한창 후반작업에 열중인 것으로 안다. 휴머니즘이 강한 슬픈 SF고, 나는 대홍수 속에서 안나(김다미)를 구하려 고군분투하는 보안요원 희조를 연기했다. 시리즈 <자백의 대가>는 먼저 제목을 향한 오해를 짚으면 좋겠다. 자백의 대가(大家)가 아니고 대가(代價)다. 미스터리한 속성이 강한 스릴러물이고, 전도연 배우와 김고은 배우의 살 떨리는 연기 배틀을 볼 수 있다. 나는 두 여성 사이의 갈등을 증폭하는 검사 백동훈으로 나온다.

*이어지는 글에서 배우 신민아의 인터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