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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한국 영화계 10대 이슈 [2]

4. DVD 시장 잠식한 온라인 P2P 파일 공유 - “영화 다운로드, 대책 없나?”

비디오 시장이 고사하고 DVD 시장이 급격히 넓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올해 반만 적중했다. 온라인 P2P 파일 공유와 교환, 여기에 더불어 해적판 DVD는 연 30%씩 성장하던 DVD 시장의 가파른 오름세를 멈추게 했고 잠재적 관객마저 잠식해버렸다. 국내영화 시장규모가 3460억원(2000년)에서 7839억원(2004년 추산)으로 2배 이상 넓어지는 동안 비디오와 DVD 시장은 같은 기간 대비 7832억원에서 7420억원으로 오히려 줄어들었다(<전자신문>, 문화관광부). 한국영상협회 김의수 온라인검색팀장은 2003년만 불법 동영상 파일로 300억원, 실질적으로는 1천억원 규모의 손실이 있었다고 말했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본 사람만 무려 각각 600만명과 400만명에 달한다는 게 한국영상협회의 추산이니, 온라인상의 파일 교환은 더 넓어질 수 있었던 영화시장의 발목마저 잡은 셈이다. DVD 시장의 상시 할인과 유통망의 과다 출혈 경쟁 등 시장의 교란은 더 심화되고 있다. 아예 DVD 플레이어 업체들은 디빅스 파일 재생 기능까지 더해 고객을 유혹하고 있다.

온라인 포털 커뮤니티는 DVD 시장과 영화시장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다음이나 네이버에서 동영상을 공유하는 카페는 5천개에서 8천개에 이른다. 무료 콘텐츠에 대한 높은 접근성은 물론이고 콘텐츠의 다양성, 심지어는 개봉 중인 영화까지 볼 수 있는 동시간성에서 동네 비디오 가게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다. 3만5천개에 달하던 비디오 대여점이 6700여개로 줄어든 데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온라인 특성상 무한정 단속만이 능사는 아니다. 공유 커뮤니티에서는 정회원으로 등급이 올라야만 최신 자료를 공개하는 등 보안도 철저해 단속의 손길도 피하는 철저함마저 자랑한다. 영상협회의 장윤환 기획팀장은 더 많은 영화사들의 저작권 보호 관심을 촉구하면서 “현행 친고죄인 저작권법 위반죄를 개정해야 하며 온라인 콘텐츠 공유를 막는 솔루션 개발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말했다.

5 . 영화인의 파병반대 선언 - “충무로에도 촛불이 켜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베트남전 이후 최대 규모의 해외파병을 두 차례 감행한다. 2003년 3월21일 정부는 임시국무회의를 통해 국군파병 동의안을 의결했고, ‘한국의 조디 포스터’ 방은진은 청와대 앞에서 홀로 ‘반전, 평화’를 위한 1인 시위를 벌였다. 그해 4월1일 명동성당에서는 12개 영화단체가 “반전을 위한 영화인선언”과 함께 독립영화 감독들이 삭발식을 가졌다. 그 다음날 국회는 파병동의안을 처리하고 우리의 서희, 제마부대는 4월30일 전장을 향했다. 1년의 세월이 흐르고 뉴스의 전쟁 동영상들에 무심해질 무렵, 알자지라 방송과 국내 언론은 평생 잊지 못할 ‘죽음의 생중계’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고 김선일 납치 사건. 정부의 파병 철회 불가론, 납치 경위와 외교통상부의 사건 대처에 대한 논란,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3일간의 다큐멘터리는 이라크전이 우리 시대에 선사하는 최고의 악몽으로 남을 것이다. 2004년 7월1일 박찬욱, 류승완, 임순례, 이현승, 김광수, 오기민 등을 주축으로 605명의 영화인이 동참하는 파병반대 선언이 이루어진다. <씨네21>은 “파병 반대를 위한 영화인 선언”으로 이들의 지속적인 선언과 편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했다. 2002년 월드컵 때 축제 상징이던 광화문은 촛불과 비탄으로 빼곡히 메워졌다.

당시 영화인선언을 주도했던 청년필름의 김광수 대표는 “탄핵규탄, 민노당 지지, 국보법 철폐, 최근의 대마초 합법화에 이르는 영화인들의 정치적 참여는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에 대한 사회적 보답”이라고 설명하고 “매우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특히 배우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라고 당시 상황을 술회했다. 다만 “주위 사람들이 가끔 물어오듯이 지속적인 후속조처가 필요했는데 현재로서는 당시에 모였던 사람들을 어떻게 다시 뭉치게 할지 모르겠다”는 아쉬움도 덧붙였다. 촛불은 계속 타올랐지만 2차 파병은 어김없이 지켜졌다. 전쟁은 끝났지만 자이툰부대의 주둔을 연장하는 파병동의안을 둘러싼 국회의 공방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6 . <송환>과 디지털 장편의 성공 - “국내 다큐 사상 최고 흥행 기록”

관객동원이나 상업적 파급력을 배제하고 2004년의 최대 화제작을 꼽는다면 그것은 단연 <송환>이다. 독립영화계의 대부 김동원이 10년을 그들과 함께하며 찍고 망설이며 벼른 다큐멘터리 <송환>은 평론가 허문영의 표현처럼 “고요하고 남루하지만 따뜻하고 강건하되 여유로운”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다.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 수상, 아트플러스 네트워크 제1호 개봉작, 전국 5개관 동시개봉을 통해 국내 다큐멘터리 사상 최다관객인 3만명 동원 등 <송환>은 극장의 안과 밖에서 이념과 통념의 벽을 넘어서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에 대해 관객이 가진 고정관념을 뒤흔든 문제작이다.

한편 한국 독립영화 디지털 장편의 원년이라 해도 좋을 2004년은 <마이 제너레이션> <신성일의 행방불명> <바이칼> <역진화론> <프락치> 등 문제작을 양산하며 충무로 밖 장편극장의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자본의 목마름에 허덕이던 독립영화계에 디지털 작품의 제작 활성화는 단비였다. 영진위와 CJ의 디지털 장편 지원에 대한 적극적 활용과 아트플러스와 CJ인디영화관이라는 영화제를 벗어난 상영공간의 발판을 통해 한국 독립영화 디지털 장편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서울독립영상제 조영각 집행위원장은 “CJ에서 3년 전 기금을 받아서 한독협이 제작지원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영진위도 뒷받침한 것이 일종의 기반이 되었다. 예전과 비교해 좋아진 상황과 맞물려 좋은 장편들이 나왔다. 고흥기, 김진성 감독처럼 충무로로 갔다가 다시 회귀한 것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관건은 이러한 제작주체들의 긍정적인 현상을 이어갈 수 있는 상영공간의 마련이다. 독립영화전용관 문제를 독립영화 진영에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조 위원장은 “관객과 피드백할 수 있는 상영관만 해결된다면 이러한 분위기는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트플러스 네트워크의 활성화와 CJ인디영화관이 국내 예술영화에 좀더 관심있는 프로그래밍을 하는 것도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7. 수입추천제 폐지 및 제한상영관의 곤경 - “제한 상영관, 영등위의 몸부림도 소용없나?”

이제는 음모를 볼 수 있다. 음모가 있는 영화라고 해서 수입을 하는 데 주눅들 필요도 없다. <지옥의 체험> 같은 영화가 수입추천 불합격 판정을 받고 <칼리귤라>나 <도쿄 데카당스>가 다시 심의를 받는 일은 2006년이면 이제 일어나지 않는다. 금기의 가위질이 무뎌진 것일까. 아니면 국민의 볼 권리가 더욱 커진 결과일까.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규제 조치가 실질적으로 없어지며 외화 수입이 쉬워지고 앞으로 더욱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2004년은 이런 변화의 조짐이 하나둘씩 나타난 한해였다. <영 아담>에서의 이완 맥그리거의 풀 죽은 성기와 <팻 걸>에서 나오는 여성의 음모와 남성의 성기는 뒤늦게 한국 관객에게 도착한 선물이었다. <쉰들러 리스트>에서의 유대인 수용소 장면 같은 ‘불가피하게’ 여겨져온 장면이 아니라 성행위 장면에서의 음모 노출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한 것이다. 영등위가 출범한 지 5년 만의 일이다. 극장 못지않게 DVD에서도 음모의 금기가 풀렸다. <샤이닝>에선 여인의 음모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관객의 맨눈 앞으로 다가온다.

버젓이 등급심의가 있음에도 수입추천심의가 존재하는 까닭에 영화계에선 수입추천제가 이중의 심의라는 비난이 거셌다. 다만 일본 문화 개방 보류 분야인 극장판 일본 애니메이션의 개방과 시기를 맞추기 위해 2006년 1월1일부터 전면 시행한다. 김수용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은 “야비한 노출은 앞으로도 막을 것이지만 올해는 표현의 자유를 대폭적으로 늘리기 위해 영등위가 몸부림을 친 한해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한층 커졌으나 제한상영관은 별다른 혜택을 입지 못했다. 지난 5월부터 어렵사리 첫 문을 연 제한상영관은 상영장소와 광고를 제한하는 등 까탈스러운 법 조항과 작품 부족과 관객의 무관심으로 맥을 못 추며 하나둘 문을 닫았다. 포항의 한 극장은 간판을 내렸고 대구의 동성아트홀은 아예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수원과 울산, 부산 등 전국 7개 극장 대부분은 경영난에 허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