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네프 2004 가이드 [2]

<버추얼 베이루트>

‘버추얼’(virtual)은 모순의 단어다. 사전을 통해 뜻을 검색해보면 ‘(명목상이 아니라) 실제상의, 실질적인, 사실상의’란 뜻이 ‘가(假)의, 가상의, 허상(虛像)의’란 뜻과 공존한다. <버추얼 베이루트>는 베이루트가 뒤집어쓰고 있는 그런 모순된 이미지와 진실을 실험적으로 파헤치려는 영화다. 큐레이터이자 실험비디오 학자이기도 한 로라 막스가 세편의 실험비디오를 한데 묶었다. 첫 번째 다큐멘터리 <디스 데이>는 아랍권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사진자료 및 시각적 이미지들을 수집·보존하는 단체 ‘아랍 이미지 재단’(Arab Image Foundation)의 공동설립자 아크람 자타리가 만든 작품. 낙타, 레바논 군인, 사막 등 구체적인 대상을 왜곡되게 담은 사진들이 어떻게 레바논을 설명하는 진실된 유물로 간주될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 4분짜리 단편애니메이션 <슬픈 남자>는 출근 전 슬픈 얼굴을 세수로 지우고 밝은 얼굴을 새로 그려넣는 남자를 등장시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 대한 사려 깊은 이해를 전달한다. 감독의 가족사를 레바논 역사에 엮은〈A면/B면>은 감독과 감독의 친형이 어릴 때 녹음했던 목소리를 이용해 스토리를 전개하는 방식이 절묘하다.

<우리가 죽인 시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댄스댄스댄스> 초반부에는 주인공이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6개월간 집 안에서만 홀로 지내는 장면이 있다. <우리가 죽인 시간>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로빈 테일러도 2002년 11월부터 처음 거리로 발을 내밀고 카메라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이듬해 4월까지 비슷하게 생활한다. DV로 촬영된 실내장면은 강박적인 클로즈업과 프레임 밖의 사운드를 혼용하면서 개성있는 비디오일기 형식으로 구성된다. 16mm로 촬영된 외부풍경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인해 이미지와 화자는 분리되고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처럼 거칠게 보여진다. 발레스카의 얼굴이 자주 등장하는 회상장면들은 대체로 스윙음악과 강렬한 조명을 통해 고전영화나 홈비디오처럼 뽀얀 느낌으로 채색되었다. ‘전위영화 감독’임을 자처하는 연출자 제니퍼 토드 리브즈는 개인사와 9·11이라는 사회적 비극을 과감하게 겹쳐놓는다. 광장공포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불안은 거리에서 느끼는 사회적 비극과 다르지 않다. 이웃의 대화, 소음, 뉴스릴의 연설, 라디오 소리 같은 개인과 매체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요인들이 그녀의 외출을 망설이게 한다. <우리가 죽인 시간>은 미디어의 과잉에도 불구하고 ‘실험영화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Los Angeles Plays Itself

촬영지로 유명해져서 평범한 시골이 관광지로 변모하는 따위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영화라는 일종의 가상현실, 상징계의 이미지가 현실로 역류해 들어오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오히려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영화의 권능이 생활세계를 조작하고 억압하는 등의 정치적 성격을 고려해야 할 판이다. 그런 관점에서, 할리우드와의 연관성을 떼놓고서 말하기 힘든 곳, LA의 ‘도시교향악’,〈LA 자화상>은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LA의 이미지들을 모아 LA라는 실제 공간의 역사를 써내려간다. 실제 촬영한 분량은 채 5분도 되지 않는다. 연대기가 아니라 공간의 변천사를 통해 LA가 겪었던 인종, 치안, 윤리, 가족제도, 도시개발과 같은 각종 테마들의 소소한 각론들을 영화에세이로 배열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에세이는 각 영화에 대한 명쾌한 비평이자 충실한 입문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168분에 이르는 이 영화의 진정한 지적 흥분은 인구 1천만의 대도시 LA의 실제 공간이 그 일부분에 불과한 할리우드에 의해 왜곡되거나 훼손되고 있다는 그 총론에 있다. 생활공간으로서의 LA는 사라지고 번지수와 이름이 없는 익명성의 공간, 시뮬라르크로 변모해왔다는 것이다. LA 시민들의 일상과 생활세계의 거점들이 영화적 환상으로 재편되는 과정에 대한 이러한 영화적 분석은, 할리우드의 문화적 제국주의를 해부하는 내부자적 시선의 냉철함을 보여준다.

<비현실의 제국에서-헨리 다거의 수수께끼>

현실과의 최소한의 접점을 포기하는 판타지일수록 현실과 완강하게 격리되어 독자성을 입증하듯, 다변(多辯)한 세계일수록 역설적으로 그 위에는 현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평생을 혼자 살며 사람들과의 대화를 꺼렸던 세계의 은자(隱者), 헨리 다거(Henry Dagger)가 자신의 셋방에 구축한 세계도 그렇다. 그 집요함과 분량만으로는 <반지의 제왕>이 무색한 1만5천 페이지의 판타지, <비현실의 제국에서>와 300장에 달하는 일러스트레이션 위에는 사실, 한 인간의 불행이 그대로 녹아 있다. 헨리 다거는 그저 폐쇄적이고 약간의 정신지체 증상이 있는 초라한 독거노인에 불과했다. 73년 그가 사망하고 방을 치우려던 집주인이 그곳에 남겨진 어마어마한 유품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영화는 비제도권 예술가로서 가장 엄청난 규모의 작품을 남긴 이 미스터리한 인물의 삶을 추적한다. 그리고 생부에게 버림받고 수용시설을 전전하며 학대받았던 어린 시절의 상처와 1차대전의 전장에서 얻은 충격을 한 인간이 어떻게 차곡차곡 자신의 영혼에 쌓아왔는지가 드러난다. 그러나 다거의 피조세계를 정교한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하고 직업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로 내레이션의 건조한 서술을 대신하면서, 영화는 축적된 불행을 창조로 승화한 헨리 다거에 대해서 짐짓 양가적인 입장을 취한다. 진주조개의 영광일 수도 있지만, 잔혹한 이 세계의 외딴방일지 모른다는.

<원거리 전쟁>

디지털 시대를 고민하는 급진적인 이론가이자 아티스트인 하룬 파로키는 한국 관객에게는 미지의 감독에 속한다. 세네프 2004는, 에세이영화의 연장선 위에서 자신의 주장을 담론화하는 그의 영화 중 최근작 두편(<나는 죄수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원거리 전쟁>)을 ‘이미지와의 전쟁’이라는 섹션으로 묶어 상영한다. “생산과 파괴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명제를 다양한 자료화면과 자막, 내레이션을 통해 증명하는 2003년작 <원거리 전쟁>은 91년 걸프전을 통해 막을 올린 미디어 전쟁이 산업혁명과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다큐멘터리. 산업혁명과 미디어 전쟁의 가장 큰 공통점은 그 발달이 인간의 눈과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유도 미사일에 장착된 카메라를 통해 보여지는 온갖 영상, 그리고 전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생산과정에서 기계들이 감지하는 시각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는 생산과 파괴 모두에서 과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보고받는 위치로 전락했음을 깨닫게 된다. 2004년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초청작.

<겁쟁이는 무릎을 꿇는다>

무성영화 양식과 자극적인 내러티브,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세계를 구축한 캐나다 위니펙 출신의 감독 가이 매딘의 최신작. 자신의 이름을 딴 남자주인공을 등장시킨 이번 영화에 가이 매딘은, 역시 위니펙을 배경으로, 부모에 대한 자전적 기억을 녹여넣고 있다. 1930년대 위니펙에서 스타급 플레이어로 활동하던 하키 선수 가이 매딘은 경기 도중 머리 부상을 입은 뒤로 스스로에 대한 자제력을 잃기 시작한다. 낙태 수술 중에 놓인 여자친구 베로니카를 버려두고 뇌쇄적인 동양계 미인 메타에게 홀린 가이는 비밀처럼 간직된 그녀의 끔찍한 가족사에까지 매료되고, 급기야 그녀의 지독한 복수전에 휘말린다. 근친상간을 포함해 정상체위에서 한참은 뒤틀려 있는 인간의 타락한 욕망과 판타지를 끌어온 스토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유머와 함께 빨려들어갈 것처럼 빠르게 전개된다. 관객의 온전한 몰입을 방해하는 짓궂은 장치들이 곳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재미가 돋보이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