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스> 이후 5년 만의 신작에서 클로이 자오 감독은 셰익스피어의 세계로 향한다. <햄넷>은 매기 오패럴의 소설에 기반을 둔 영화인데, 소설은 셰익스피어가 아들 햄넷의 사망을 계기로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을 집필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노매드랜드>에서도 소설을 한 차례 스크린으로 옮긴 바 있다. 그러나 마블 시리즈인 <이터널스>를 사이에 두고 감독이 추구하는 전개 방식이 현저히 달라졌다는 인상이다. 천착하는 주제는 변함없지만 전과 달리 촘촘히 감정의 방향을 설정해둔 <햄넷>의 방식은 일말의 의아함을 남긴다.
자연이 무대에 종속될 때
클로이 자오는 이번에도 본인의 인장과 다름없는 광활한 자연 풍광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초록빛으로 우거진 나무 아래 붉은 의상의 아녜스(제시 버클리)가 웅크린 채 누워 있다. 깨어나자마자 그는 자신의 매를 불러들여 교육하고 그 모습을 윌(폴 메스칼)이 목격하면서 둘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두 사람의 관계만큼이나 주요하게 비추는 것은 아녜스 옆의 커다란 구멍이다. 나무 둔치에 자리한 이 검은 구멍은 인물들의 삶, 죽음과 교묘히 연결된다. 아녜스는 장녀를 출산할 때 구태여 이곳을 재방문하고 훗날 윌의 가족들은 이 구멍 옆에서 죽은 새의 장례를 치른다. 장녀가 태어났을 때 처음 구멍을 발견한 윌은 그곳을 오래 응시한다. 영화 후반부에 연극 ‘햄넷’의 막이 올랐을 때 무대장치 한가운데엔 검은 문이 있다. 유령과 인간 모두 그곳을 통해서만 등장하고 퇴장한다는 설정은 윌이 숲속의 검은 구멍을 보며 무엇을 떠올렸는지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원작 소설이 아닌 영화에만 등장하는 몇몇 요소가 있다. 첫째가 전술한 숲의 검은 구멍, 연극의 검은 문이며 둘째는 윌이 아녜스에게 들려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다. 신화에서처럼 윌은 영화에서 두 차례 아녜스를 돌아본다. 한번은 이들이 결혼할 때, 그리고 ‘햄넷’이 초연할 때다. 끝내 재회하지 못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윌과 아녜스도 오랜 시간 갈등하며 의견을 좁히지 못한다. 클로이 자오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두 인물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아녜스는 “표현력이 풍부하고 감성적이며 자연과 깊이 연결된 사람”인 반면 윌은 “문명과 연결된 채로 어디론가 떠나거나 도망”치는 사람이다. 아녜스처럼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억누르면서 다른 사람들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자리를 지켜주”는 자이기도 하다.(<할리우드 리포터>) 그러니 이들의 갈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아들이 사망했을 때 온몸으로 슬픔을 표현하던 아녜스는 속으로 고통을 삭이며 희곡 집필로 회피하는 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햄넷>은 후반부의 연극 상연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라 봐도 무방하다. 윌이 구현한 ‘햄넷’에는 독특하게도 빽빽한 숲을 그린 무대장치가 놓인다. 이와 유사한 공간이 앞서 한 차례 등장한 적이 있다. 아들 햄넷이 사경을 헤맬 때 꿈속인 양 그가 혼자 서 있던 장소다. 사위가 어두운 공간에서 당황하던 햄넷은 새의 장례를 치를 때처럼 휘파람으로 신호를 보낸다. 윌이 신호를 감지하지만,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다. 이때 햄넷이 서 있던 공간 뒤편에도 연극과 같은 형태의 무대장치가 놓여 있다. 아마도 윌의 상상에 기반했을 이 장면은 영화의 결말부, 무대의 검은 문으로 사라지는 햄넷의 뒷모습과도 이어진다. 연극 ‘햄넷’은 아들이 죽는 순간 함께하지 못했다는 아버지의 죄책감, “사후 세계에서의 아들의 행방을 알고 싶다”던 윌의 염원이 실현된 결과다. 윌은 무대에서나마 햄넷을 소환해 그의 존재를 기리고자 하며 “칼을 들고 싸워 이기는 배우가 되고 싶어” 했던 아들의 꿈을 실현시킨다.
<햄넷>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아녜스가 햄넷 역의 배우와 손을 잡는 장면이다. 아녜스를 따라 극장에 있던 모든 관객이 물결처럼 차례로 배우에게 손을 내민다. 평범한 연극에선 절대 벌어질 수 없는, 극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아녜스와 배우, 관객 모두가 하나의 합일된 감정을 공유하는 순간이다. 이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다. <셔터 아일랜드> <컨택트> 등에서 감정을 고조시킬 장치로 활용된 이 음악은 너무도 익숙하지만 죽음을 애도하고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는 <햄넷>의 결말부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일지 모른다.
소설에선 아들 햄넷이 ‘나를 잊지 말아달라’고 전하는 장면으로 끝맺지만 영화에선 아녜스가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으로 시점의 주체가 바뀐다. 이처럼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고 뜨겁게 타오르는 것은 아녜스이며 극의 초점도 자연스레 아녜스에 맞춰져 있다. 그러나 <햄넷>은 엄연히 윌의 시점에서 쓰인 작품이다. 연극 ‘햄넷’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귀결되는 존재다. 숲, 검은 구멍, 아들의 사망, 죽음에 대한 탐구는 결과적으로 전부 연극에 복무하는 요소가 된다. <햄넷>이 희구하는 세계는 죽음을 이해하고, 애도하고, 양극단에 놓인 두 인물이 화합할 때 완성된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연극 ‘햄넷’이 막을 올린다는 조건하에 성립한다.
아녜스가 오랜 시간 거부해오던 남편과 재회하고 비로소 그의 애도 방식을 납득하게 된 것도 연극을 관람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클로이 자오는 <햄넷>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창작자와 예술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한다. 때문에 윌은 주로 작품의 주변부, 무대 뒤편에 위치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언제나 전지적 위치를 점한다. 이 설정은 클로이 자오가 전작 <로데오 카우보이><노매드랜드>에서 보여준 태도와 상반된다. 사고로 인해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게 된 카우보이 브래디(브레이디 잰드로), 남편을 잃고 노매드의 삶을 택한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은 감정을 터트리는 대신 침묵한 채 자연에 귀속된다. 이들의 고통은 해소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브래디와 펀은 벌판 위로 계속해 나아간다. 반면 <햄넷>에서 아녜스가 처음 등장하고, 윌이 아녜스를 발견했던 숲은 무대의 배경으로 축소된다. 미지의 존재이자 태초의 기원처럼 묘사됐던 검은 구멍은 인간이 나고 드는 검은 문으로 무대에 박제된다. 인간이 자연에 종속되는 것이 아닌, 자연이 예술에 종속된 형태로 <햄넷>은 화합을 꾀한다.
슬픔을 예술로 승화한다는 것의 의미
그러므로 <햄넷>의 문법은 <로데오 카우보이> <노매드랜드>가 아닌 <이터널스>의 것에 가깝다. 숲에서 태아가 탄생하듯 나타난 아녜스의 모습은 <이터널스>에서 히어로들이 생명을 얻어 깨어나는 첫 등장 신과 유사하다. 모든 갈등을 종식시키는 연극 ‘햄넷’에 부여된 절대적 힘은 히어로들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꺼내든 최후의 카드와 같다. <햄넷>에서 연극배우와 아녜스가 손을 잡는 장면은 <이터널스>에서 적대 관계이던 스프라이트(리아 맥휴)와 세르시가 화합하는 것과 겹쳐볼 수 있을 것이다. 클로이 자오는 <햄넷>의 연극 신을 두고 “하나됨의 중요성”(<할리우드 리포터>)을 강조한 바 있는데 <이터널스>에선 마카리(로런 리들로프)의 대사를 통해 직접 언급한다. “우린 하나가 됐어”라고, 히어로들 뒤편의 일출과 함께 말이다.
‘슬픔을 예술로 승화한다’는 주제는 자주 오래 반복되어왔다. 그러나 <햄넷>은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위대한 예술은 타인의 고통에 기반할 때 완성되는 것일까. 예술은 슬픔을 해소시킬 때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일까. <햄넷>은 이미 답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센티멘탈 밸류>와 <햄넷>을 나란히 둔 채 논해볼 수 있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죽음의 트라우마를 지닌 아버지가 영화와 연극이라는 예술을 통해 가족과의 화해를 꾀한다는 교집함을 지닌다. 굳이 차이를 짚어보자면 <센티멘탈 밸류>에서 영화는 구스타프(스텔란 스카르스가르드)가 딸 노라(레나테 레인스베)에게 우리 함께 고통을 나눠보자고 건네는 제안에 가깝다. 이들의 작품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영화는 두 부녀의 촬영 현장을 비추며 끝난다. <햄넷>은 윌이 자신이 완결한 예술의 세계에 아녜스를 초청하고 아녜스는 관객의 위치에서 ‘햄넷’을 관람한다. 물론 아녜스는 얌전한 관람객이 아니라 극 안으로 불쑥 끼어드는 불청객이다. 그러나 연극이 아닌 영화 <햄넷>으로 넓혀볼 때, 이 연극은 예외적인 것처럼 ‘보이는’ 아녜스의 침투가 있어야만 완결성을 지닌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문법에 따라 완성된 <햄넷>의 기승전결은 더없이 완벽하다. 클로이 자오가 이전에 시도했던 의도적인 빈틈들은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일까.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클로이 자오는 이번에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이전엔 캐릭터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는 느낌이었다면 <햄넷>에선 윌을 대리해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또한 무대를 중시한 나머지 연극을 연상시키는 여러 요소들을 극 전반에 변주해 반복하고, 이젠 감정을 고조시키는 클리셰와 다름없는 를 작품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튼다. 이쯤 되니 영화 속 다른 관객들처럼 아녜스의 손 위로 나의 손을 겹치는 것이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진다. <햄넷>의 클라이맥스에 납득되면서도 빈틈없이 짜인 무대에 또 하나의 감정을 얹기가 망설여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