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클로드 를루슈 감독이 우연히 목격한 해안가의 풍경에서 <남과 여>의 아이디어가 시작됐다. 영화 <위대한 순간들>의 상영 및 배급이 여의치 않자 답답함을 느낀 클로드 를루슈 감독은 충동적으로 차를 몰고 도빌 해변으로 향했다. 잠시 눈을 붙인 뒤 바라본 새벽의 해안가에서 그는 아이, 개와 함께 해안가를 걷는 한 여자를 보았다. 그녀가 아이와 단둘이 해안가를 찾은 이유를 상상하면서 를르슈 감독은 장루이와 안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구상해나갔다. 결국 도빌은 <남과 여>의 실제 배경지가 됐으며 아이와 바닷가를 거니는 오프닝 시퀀스로 안느는 처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스크립터인 안느와 카레이서인 장루이는 각각 딸과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다. 주말을 보내고 아이들을 학교 기숙사로 복귀시키고 파리로 돌아오던 중 안느가 장루이의 차에 동석한다. 짧은 시간 동안 둘은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린다. 안느는 스턴트맨이었던 남편을 사고로 떠나보냈고, 장루이의 아내는 레이싱 도중 크게 다친 남편을 보며 패닉에 빠진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관계가 진전될수록 두 사람은 남편과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서도 안느는 장루이를 떠나기로 결정하지만 그런 안느를 붙잡기 위해 장루이는 다시 먼 길을 달려간다.
<남과 여>의 특징은 인물의 대사를 최소화하는 대신 주제곡이 지닌 정념을 극대화했으며 세피아 톤에서 흑백, 컬러를 오가는 비주얼 효과로 신의 톤 앤드 매너와 인물의 감정선을 조율했다는 것이다. 신의 톤과 질감의 변화는 클로드 를루슈 감독이 흑백·컬러 필름, 16mm, 35mm 필름 등을 혼용해 사용한 결과로 여러 비평가들이 해당 시도가 지닌 상징성을 긍정적으로 분석하곤 했다. 필름을 혼용한 시도는 후에 제작비 문제의 여파로 밝혀졌으나 결론적으로 질감을 달리한 안느와 장루이의 시선, 신체 접촉의 몽타주와 음악의 결합은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우아하게 드러내는 장치가 됐다.
클로드 를로슈 감독은 <남과 여> 이후로도 2편의 속편을 발표했다. <남과 여 20년 후>는 제목과 같이 20년이 지난 후 안느와 장루이의 재회를 그리며 영화 제작자가 된 안느가 장루이와 과거 둘의 일화를 영화로 만들자고 제안하는 과정을 담았다. 그로부터 33년 후 공개된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은 장루이 아들의 부탁으로 안느가 치매를 앓고 있는 장루이와 해후하는 모습을 그린다. <남과 여> 3부작은 53년에 걸쳐 안느와 장루이의 관계를 다뤘다는 점에서 ‘비포 삼부작’에 비견되곤 한다. <비포 선라이즈>가 하루 동안 일어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의 첫 만남에 포커스를 뒀다면 <남과 여>는 과거 인연을 필연적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안느와 장루이의 역사성을 강조한다는 차이를 지닌다. 장루이와 안느가 교감할 때 전 연인에 관한 회상 신이 수시로 틈입한다. 새로운 사랑의 설렘에 죄책감, 거리감이 섞여들면서 둘의 감정엔 시차가 발생한다. 사별이란 동일한 상흔이 서로를 이해할 출발점이 되는 동시에 둘의 선택이 확연히 갈라서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떠난 안느를 끝까지 쫓아가는 장루이의 선택은, 그런 장루이를 마침내 받아들인 안느의 선택은 과거를 새 레이어로 덮어씌우는 대신 그런 과거까지 포함해 온전히 상대의 세계를 끌어안겠다는 의지의 표명에 다름없다. 스턴트맨이었던 안느의 남편처럼 카레이서인 장루이의 운명에도 매 순간 위험이 따를 것이다. 이별과 재회를 반복한 속편에서의 장루이와 안느의 모습처럼 둘의 관계가 지속될 것이란 보장 또한 없다. 다시 말해 사랑, 결혼, 자신들이 영원하길 소원한 것들은 사실 언제든 쉽게 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안느와 장루이는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위태로운 사랑의 길을 새 동반자와 다시 걸어보기로 결정한다. 사랑의 힘을 신뢰하고 증명하고 싶어 하는, 그런 서사를 마주하기 바라는 현재의 관객들과 여전히 공명하는 멜로드라마다.
직접 운전대를 잡은 이유
클로드 를루슈 감독이 쓴 <남과 여> 초기 시나리오에서 남자주인공의 직업은 본래 카레이서가 아니었다. 장루이 트랭티냥은 1960년대에 배우이자 프로 레이서로 활동했다. 1964년 24시간 르망 레이스에 참가한 이력도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클로드 를루슈 감독은 남자주인공의 직업을 카레이서로 변경했다. <남과 여>의 카레이싱 몽타주나 실제 트랙 위를 질주하는 신들은 대부분 스턴트맨 없이 장루이 트랭티냥이 직접 운전해 소화했다.
칸영화제 최초의 듀얼 포스터
<남과 여>는 유독 칸영화제와의 인연이 깊다. 1966년 제19회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이자 2016년 제69회 칸영화제 클래식 부문 상영작이며, 지난해에는 작품 스틸이 제78회 칸영화제의 공식 포스터에 활용됐다. 영화제측은 “분열과 고립의 시대에 (재)결속을 목표”로 영화사에서 상징적인 결합의 이미지 중 하나인 장루이와 안느의 포옹 장면을 포스터에 넣었다고 밝혔으며 두 인물을 나란히 배치한 듀얼 포스터가 칸 역사상 처음으로 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