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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질투, 선망, 애증을 전부 끌어안은 관계였다, <은중과 상연> 조영민 감독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상대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은중(김고은)과 상연(박지현)의 관계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은중과 상연, 두 사람은 10대부터 40대까지 넘나들며 재회와 절교를 반복한다.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사랑의 이해>를 연출한 조영민 감독은 질투, 동경, 애정, 증오가 복잡하게 얽힌 두 인물의 연대기를 차분한 호흡으로 그려낸다.

- <은중과 상연>을 연출하게 된 계기는.

= 처음에 3부까지 대본을 받아봤는데 소소하지만 잘 읽혔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작품들의 성향이 그래서인지 잔잔한 작품이 많이 들어오는데 그게 내 취향에도 잘 맞는다. (웃음) 다른 사람들이 왜 이 작품을 맡았냐고 물으면 “이상하게 은중과 상연이라는 사람이 신경 쓰였다”고 답하곤 했다. 이들이 어떻게 10대부터 40대까지 함하는지 그 과정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 들여다보니 은중과 상연은 어떤 인물이던가.

= 은중은 평범하다. 학창 시절 학급에서도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데 그런 무난함이 도리어 편안함을 주어 주변에 호감을 지닌 사람이 많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매력을 지녔고, 시청자로서도 자신과 닮은 구석을 찾아 이입하기 좋은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반면 상연은 외모도, 능력도 돋보이는 존재다. 그럼에도 들여다보면 자신만의 상처와 자격지심이 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상대의 영역을 더 크게 받아들인다.

- 상연이 은중에게 자신이 암환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자신의 마지막을 함께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둘의 서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은중과 상연은 여러모로 단순한 친구 사이로 정의내리기 어렵다.

= 나 역시 생의 마지막을 함께해달라고 부탁하는 친구는 대체 어떤 이일지 오래 생각했다. 후반부에 “네가 나를 받아주는구나, 끝내”라는 상연의 대사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 말에 꽂혔다. 상연이 그런 부탁을 할 사람은 은중밖에 없고 은중도 그걸 알기 때문에 상연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그런 둘의 관계를 좇아올 수 있도록 10대부터 차근히 서사를 쌓았다.

- 1990년대를 배경으로 상연이 은중의 학교에 전학 오면서 둘의 인연은 시작된다.

= 10대 시절의 둘은 마냥 아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때부터 은중과 상연 사이엔 선망과 질투의 감정이 존재한다. 각본을 쓴 송혜진 작가와도 나눈 이야기인데, 어른의 시점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듯 표현하는 게 아니라, 실제 아이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그려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어른 은중의 회상이 아니라 어린 은중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묘사하려고 했다.

- 배우 도영서, 박서경이 10대 시절의 은중과 상연을 잘 연기해줬다.

= 작품의 초반을 끌고 가야 하기 때문에 정말 중요했다. 그래서 수많은 오디션을 봤고 두 배우가 특히 눈에 띄었다. 개인적으로 학원에서 배운 듯한 아역 특유의 연기를 선호하지 않는데 도영서 배우에겐 그런 게 없어서 촬영할 때 자주 놀랐다. 학교에서 있던 일을 엄마에게 하소연하는 장면이 있는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고 사전에 이야기를 나눴다. 그랬더니 갑자기 방바닥에 드러눕더라. 때마침 뒤에서 그림을 그리던 동생 역의 아역배우와 부딪혔는데, 그 배우가 “하지 마~”라고 즉흥적으로 받아치자 도영서 배우가 “저리 가!”라고 응수했다. 대본에도 없는 장면을 그렇게 만들어나가는 게 신기해 기억에 남았다. 상연은 은중이가 처음 봤을 때부터 가만히 있어도 무리 중에 눈에 띄는 친구여야 하는데 박서경 배우에게서 그런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공부를 잘해 그런 분위기가 나왔을 수도 있다. 연기했을 때도 도도한 상연이의 느낌이 잘 나와 최종 캐스팅했다. 처음에는 중학생 시절을 다른 배우들에게 맡겨야 하냐는 의견도 나왔지만 나는 그대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초등학생, 중학생의 중간 나이대에 있는 도영서, 박서경 배우를 캐스팅하게 됐고 초등학생 분량은 맨 처음에, 중학생 분량은 가장 마지막에 촬영했다. 6개월 사이의 틈에 배우들이 조금 자랐고 또 교복을 입혀놓으니 다행히도 태가 다르더라.

- 작품에 덧붙여진 내레이션의 화자는 은중이다. 그래서인지 10대 시절엔 은중이 느끼는 결핍이 표면적으로 더 잘 드러나는데 20대에 상연이 처한 상황이 바뀌며 상연의 상처가 부각되기 시작한다.

= ‘20살, 21살을 전부 줄 세우면 나는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라는 은중의 내레이션에 공감했다. 그게 20대가 느끼는 가장 큰 고민이 아닐까. 현재의 나, 앞으로의 내가 얼마나 할 수 있을까에 관한 것들 말이다. 그래서 은중과 상연이 서로에게 느끼는 질투를 잘 그리고자 했다. 말한 대로 작품의 화자는 은중이고 그 화자가 마주한 대상이 상연이다. 시간이 갈수록 은중의 생활이 안정되는 반면 상연은 계속해서 큰 사건을 겪는다. 때문에 상연에게 사건이 일어난 뒤 그걸 은중이 바라볼 때의 상호작용을 잘 표현하는 것 또한 중요했다. 한편 30대가 된 상연이 벌이는 악행을 사람들이 단순히 나쁘게만 보지 않길 바랐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상연의 배경과 그의 상황과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겼다.

- 작품에 두명의 상학이 등장한다. 상연의 오빠인 천상학(김재원)은 작품에서 가장 신비감을 지닌 인물인데 여기에 김재원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는.

= 천상학은 분량에 비해 영향력이 크고 은중의 첫사랑이기도 해서 캐스팅에 공을 들였다. 김재원 배우가 맑으면서도 묘한 분위기가 있어 천상학의 미스터리함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 상연과 은중의 대학 선배이자 은중의 남자 친구인 김상학(김건우)은 의외의 캐스팅이다.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이가 <더 글로리>의 악역 손명호를 떠올릴 것이다.

= 김건우 배우가 그간 캐릭터성이 강한 역을 많이 맡았는데, 연기적으로 다른 컬러를 보여줄 때 배우의 새로운 잠재력이 드러날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 주변에 존재할 법한 인상을 부여하고 싶었는데 미팅을 해보니 김건우 배우의 느낌과 잘 어울리겠다 싶었다

- 은중, 상연, 상학은 단순한 치정 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

= 은중과 상연이 상학 때문에 싸우는 전형적인 삼각관계로 보이지 않길 바랐다. 이 관계의 포커스는 상학이 아니다. 셋의 관계 안에 은중, 상연이 한명이라도 없었다면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걸 잘 표현하고 싶었다. 입대한 상학이 휴가 나왔을 때 은중, 상연과 함께 저녁 메뉴를 상의하며 걷는 신이 있다. 그때 상연이 돌연 뒤돌아 뛰어가버리는데 상학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던 상연의 안에서 무언가가 터져나오는 순간이다. 이 장면을 특히 잘 표현하고 싶었다.

- 은중과 상연 역에 김고은, 박지현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는.

= 내가 워낙 김고은 배우를 좋아하고, 같이할 수만 있다면 어떤 작품이든 함께하고 싶었다. 김고은 배우는 지금까지 개성 강한 역을 자주 맡았는데 은중이 그중 가장 평범한 역할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껏 본 적 없는 일반인 같은 김고은의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박지현 배우와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함께해서 상대의 감정 연기를 상당히 잘 받는 연기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감정이 들쭉날쭉한 상연을 잘 소화 거란 신뢰감을 갖고 역할을 제안했다.

- 20대, 30대, 40대마다 배우들의 연기 톤이 조금씩 달라진다. 따로 디렉션을 줬나.

= 지금 내가 40대인데 20~30대와 달라진 점을 크게 못 느낀다. 은연중에 변하긴 했겠지만 그렇다고 확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건 가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캐릭터 특유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나이가 들며 변화하는 지점을 조금씩 보여주려 했다. 김고은 배우는 상대적으로 통통한 얼굴로 20대의 은중을 연기했고, 30대 때는 일할 때의 목소리 톤을 살짝 바꿨다. 일상에선 같을지라도 직업인으로서의 목소리는 달라진다는 배우의 판단이 들어간 지점이다. 박지현 배우는 상연이 아프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촉박한 일정임에도 40대 촬영에 들어가기 전 감량을 많이 했다. 배우들이 변화의 디테일을 잘 채워줬다.

- 신들은 연대기순으로 촬영했나.

= 거의 그랬다. 그래서인지 박지현 배우는 40대 부분을 촬영할 때 쉽게 몰입하며 자주 울곤 했다. 특히 은중에게 자신이 암에 걸렸으며 생의 마지막을 함께 해달라고 고백할 때 은중의 얼굴을 볼 때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래서 “여기는 아직 울 때가 아니다. 상연이가 마음을 굳게 먹어야 은중이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상연이는 감추는 게 워낙 많은 사람이라 처음부터 속내를 드러내기보다는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는 면모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 후반부로 갈수록 은중이 내레이션을 통해 상학과 상연의 말을 전한다. 드라마 작가인 은중의 직업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은 은중이 각본을 쓴 드라마라고 받아들여도 될까.

= 작품에 그렇게까지 설명되진 않지만, 그것을 염두에 둘 수 있다는 암시 정도는 나온다.

- 전반적으로 인물의 감정선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 연출할 때 앵글, 미술, 숏에 힘을 주기보다는 배우들이 감정을 잘 표현하도록 상황을 만들어주고 그것을 잘 담고자 노력한다. 40대의 은중과 상연이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대화하는 장면을 특히 신경 썼다. 은중이 침대에서 내려와 자리를 옮길 때 감정선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동선을 많이 고민했다. 그 밖에 20대의 은중과 상연이 절교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이 두 장면은 찍을 때도 느낌이 남달랐던, 정말 인상에 깊게 남은 장면이다.

사진제공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