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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눈이 시리게 웃기고 서글픈 신자유주의의 푸른 멍, <어쩔수가없다>

만수(이병헌)는 실직했다. ‘올해의 펄프맨’까지 수상한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지만 공장의 사주가 바뀌며 구조조정 대상자가 됐다. 1년이 넘도록 재취업을 못하자 아내 미리(손예진)가 허리띠를 졸라매지만 그렇다고 집안의 경제 사정이나 가장의 자존감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경쟁사 ‘문 제지’의 문을 두드려봐도 최선출 반장(박희순)으로부터 수모만 당할 뿐이다. 이에 만수는 죽이는 결심을 한다. 유령회사를 차려 자신과 유사한 경력을 지닌, 실직한 제지 전문가들의 이력서를 받고 그들의 개인정보를 토대로 실직자들을 찾아가 직접 잠재적 경쟁자를 없애겠다고. 만수의 최종 용의선상에 최선출은 물론 구범모(이성민), 고신조(차승원)가 오른다.박찬욱 감독은 <어쩔수가없다>를 두고 수차례 “내가 만든 영화 중 제일 웃기는 영화, 진입장벽이 아주 낮은 영화”라고 말했다. 이번만큼은 감독의 말을 믿어도 좋다.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12편의 장편영화 중 가장 웃음 타율이 높고, 가장 보편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작품이다. 이는 같은 대사의 변주를 통해 완성된다. 예컨대 <어쩔수가없다>에서 “어쩔 수가 없다”는 총 네 차례 등장한다. 해고를 당하는 자도 시키는 자도,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를 바라는 자도 점유한 자도 하나같이 자신의 결단을 “어쩔 수가 없다”고 일축한다.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남을 밟고 올라설 수밖에 없는 시대. 그리고 누군가의 경제적, 실존적 생존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단에 논거 대신 우격다짐이라도 덧붙이면 명분이 산다고 믿는 사람들. <어쩔수가없다>의 세계는 그래서 우스운 동시에 서글프다. 2025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이며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다.